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탐라록(耽羅錄)」은 『영주창화시(瀛洲唱和詩)』의 이칭(異稱)이다. 「탐라록」의 원고본 『영주창화시』가 남아 있다는 것은 간간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 원본을 ‘2023 제주고서전’에서 공개 전시하여 여러 전문가의 관심을 끌었다.

1. 석북 신광수와 「탐라록」, 즉 『영주창화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는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시인(大詩人)이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이헌경(李獻慶, 1719~1791), 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고,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그런데도 그는 남인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인이 득세한 상황에서는 출사할 수가 없었다.

신광수는 39세(1750) 때에 진사에 올랐다. 그러나 50에 이르도록 향리 한산(韓山)에서 소일하던 중, 영조(英祖, 재위 1724~1776)가 시행한 탕평책의 일환으로 벼슬길에 나가, 49세(1760)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1764년)에 종6품의 금오랑(金吾郞, 義禁府都事)으로 1764년(영조40)에 잠시 제주에 입도하였다.

『영주창화시(瀛洲唱和詩)』의 석북 자서(自序)와 「잠녀가(潛女歌)」 부분, 1765년경 정초본(正草本), 1책. 석북 신광수는 1764년애 제주를 다녀간 바 있다.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영주창화시(瀛洲唱和詩)』의 석북 자서(自序)와 「잠녀가(潛女歌)」 부분, 1765년경 정초본(正草本), 1책. 석북 신광수는 1764년애 제주를 다녀간 바 있다. 필자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는 제주도에 갔다가 풍랑으로 40여 일을 머무르는 동안에 『영주창화시』를 지었다. 『영주창화시』는 당시 신광수가 제주에서 보고 느낀 제주의 풍토⸱산천⸱조수(鳥獸)⸱항해 상황 등을 주제로 지은 한시(漢詩) 작품이다. 제주와 관련한 한시는 모두 49편으로 『석북선생문집(石北先生文集)』 권지7에 「탐라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영주창화시』의 작품 중 5⸱7언시 「망한라산오체(望漢拏山吳體)」는 제주의 개국신화⸱전설을 내용으로 시상을 전개했고, 「토풍(土風)」에서는 제주와 본토가 언어와 풍속이 다름을 나타냈다. 또한 「하포(下浦)」에서는 장수자(長壽者)가 많은 고장임을, 「입도(入島)」에서는 흰 꿩이 나타나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삼월십삼일제해(三月十三日祭海)」는 용제(龍祭)를 소개하여 풍속지적(風俗誌的)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하였다.

고체시(古體詩)는 가창할 수 있게 지었는데, 그 중 「한라산가(漢拏山歌)」는 한라산의 위치와 삼신산(三神山)이 일컫는 신화와 전설을,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는 당시 제주인의 비참한 생활상을, 「잠녀가(潛女歌)」는 제주 해녀들의 생활과 관리들의 횡포 등 실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영주창화시』에는 조선 본토와는 다른 제주의 여러 가지 특색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1764년을 전후로 한 조선중기 제주지방의 신화⸱전설⸱언어⸱풍속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풍토지 관련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2. 석북 신광수의 제주 왕복 길

53세 때인 1764년 1월 13일 석북은 왕명을 받아 제주로 향했다. 당시 그의 직책은 의금부도사였다. 의금부도사는 죄인을 체포, 호송하거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임금은 1764년 1월 12일 “제주 어사(濟州御史)인 이수봉(李壽鳳)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별유’는 임금이 특별히 내리는 유지(諭旨), 즉 특별한 지시 사항이다. 이에 앞서 제주에서는 역모 사건으로 유배된 자들이 있었다. 석북은 역모사건과 관련히여 유배된 자들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왕명으로 제주도 출장을 갔던 것으로 보인다.

석북은 왕명을 받자마자 서울에서 해남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영주창화시』의 서문에 “주야치일기(晝夜馳馹騎) 삼일반도해남(三日半到海南)”이라고 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역마를 달려 3일반 만에 해남에 도착했다. 해남에서 바람을 기다리느라 4일을 보내고 고달도(古達島)에서 배를 탔다. 고달도는 현재의 해남군 남창리 포구다. 여기서 배를 타고 반일(半日) 만에 제주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시를 보면 석북은 소안도(蘇安島)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출발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창리에서 다도해를 빠져나와 소안도에 이르고, 소안도에서 제주에 갔다. 여기서 반나절 만에 제주에 도착한 것이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8일이 걸렸다.

다도해의 음력 1월은 북서풍이 분다. 해남에서 제주 쪽으로 분다. 따라서 순풍을 받아 제주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환길이 문제였다. 석북은 도착 다음날 육지를 향해 제주를 떠났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북서풍을 만나 제주로 회항했다. 다른 배로 출발했던 어사(御使)는 무사히 육지에 도착했다.

석북은 그 뒤에도 45일 동안 4차례 육지로 가려고 배를 탔으나, 그때마다 바람이 세거나 역풍이 불어 제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석북은 화북 포구의 객관 환풍정(喚風亭)에 머물러 있다가 3월 13일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배를 출발시킨 후 추자도를 경유하여 15일 밤에 해남에 도착한다.

석북이 제주로 갈 때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배로 갔지만 올 때는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5차례 시도한 끝에 겨우 해남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즉 석북은 1월 20일 해남에서 출발하여, 3월 15일 해남으로 귀환했다.

3. 『영주창화시』와 제주에서의 석북 신광수

제주는 신화가 살아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에는 요즘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었기에 제주는 관념적 세계였다. 하지만 제주를 경험한 지식인에게 제주를 왕복하는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적 세계이다. 1764년 서울에서 파견되었다가 풍랑에 발이 묶여 45일간 제주에 머물렀던 신광수에게 제주는 ‘갇힌 공간’이었다.

석북 신광수가 제주에 체류하며 남긴 『영주창화시』의 앞에는, 갑신(1764년) 4월에 석북이 지은 자서(自序)가 있고, 그다음에는 여와 목만중(睦萬中, 1727~1810)과 해좌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지은 서(書)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을유(1765년) 8월 하한(下澣)에 이수환(李壽煥, 1713~?)이 지은 지(識)가 있다.

『영주창화시』에 석북이 지은 자서가 갑신 4월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나, 문집에서는 자서를 언제 지은 것인지 언급이 없다. 이는 『석북선생문집』 권지7의 「탐라록」과는 달리 구체적이다.

『석북선생문집』의 「탐라록」에는 영원 이익(李瀷, ?~1769, 本 全州)의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는 여와 목만중(睦萬中)과 해좌 정범조(丁範祖)의 서(書)가 있으며, 끝으로 석북의 자서가 있다. 즉 「탐라록」에는 이수환이 지은 지(識)가 없으며, 수록한 서의 순서도 다르다.

문집 「탐라록」의 서문을 쓴 이익은 1763년에 사망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1764년 당시 석북과 함께 의금도사로 있던 영원 이익이다.

그런데 『영주창화시』에는 각 시를 지은 시기와 상황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영주창화시』에는 동행인 의금도사 박수희(朴壽喜)와 영원 이익(李瀷)의 부화시(附和詩)가 들어 있는데. 『석북선생문집』 권지7 「탐라록」에는 박수희와 이익의 부화시는 빼고 석북의 시만을 수록함으로 해서 시로서의 대화가 단절된 감이 든다.

그리고 『영주창화시』에는 『석북선생문집』 권지7 장22의 앞면에 있는 한시 ‘망한라산(望漢拏山)’과 ‘증녹벽제자월섬(贈綠璧弟子月蟾)’ 사이에 ‘부탐라잡시(附耽羅雜詩)’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석북선생문집』 권지7 장25의 앞면애 기록된 ‘도경(到京)’ 기록이 『영주창화시』에는 없다. ‘도경’은 후인의 추록(追錄)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영주창화시』의 끝에는 기축(1769)년 정월 13일 석북 신광수가 지은 이익의 제문 ‘제이영문(祭李令文)’이 추록(追錄)되어 있어, 석북과 동행한 영원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런데 이 이익의 제문은 『석북선생문집』 권지14 장31 뒷면부터 장33 앞면까지 실려있다.

석북은 육지로 돌아온 이후 제주에서 기록한 『영주창화시』를 주위 지식인에게 보여주고 목만중, 정범조, 이수환의 서문을 받았다. 이들이 써 준 서문을 『영주창화시』에 옮겨 적는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미루어 보면 『영주창화시』는 이수환이 을유(1765년) 8월 하한(下澣)에 지(識)를 지은 이후에, 이익이 서문을 짓기 이전에 정서된 재초본(再草本)이자 정서본(淨書本)이다. 이익은 1769년에 사망하였는데, 그가 언제 서문을 썼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런데 신광수의 서문과 목만중, 정범조, 이수환 등 3인의 서문은 제주를 바라보는 인식에서 큰 차이가 존재한다. 3인의 서문에는, 제주는 신선이 사는 동경의 공간인 동시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가기 싫은 공간이라는 이중성이 나타나는데, 신광수에게 제주는 절도(絶島)이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고립무원의 폐쇄된 공간이었고,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당대의 지식인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제주의 경험을 기록한 『영주창화시』에 보이는 신광수의 제주 인식은 18세기 문학을 바라보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연구할 연구자가 있다면 필자는 흔쾌히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4. 석북의 문학을 평가한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석북 신광수의 한시가 우리 문학사상에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석북의 시인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關山戎馬)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關西樂府)」가 유명하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라고 평하였다. 그는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석북 신광수의 『영주창화시』의 뒷부분에 수록된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는 당시 제주인의 비참한 생활상을, 「잠녀가(潛女歌)」는 제주 해녀들의 생활과 관리들의 횡포 등 실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민중시(民衆詩)이며, 석북은 조선시대의 민중시인(民衆詩人)의 효시(嚆矢)라 할 만하다.

필자가 석북가(石北家)의 자료 100여 점 이상을 일괄 매입하고 30년이 넘도록 고이 간직하고 았는 이유가 바로 그는 조선시대 민중시인의 효시라는 사실에 있다.

한편, 석북은 제주에서 돌아 온 뒤, 말년에 선공봉사(繕工奉事), 돈녕주부(敦寧主簿),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1772년 61세 때에는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그를 대단히 대우하여 그가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석북은 우승지와 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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