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약점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계속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전쟁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도 전부 없었던 일이다. 그로부터 일본은 인권의식도 아주 낮고 문화의 발달도 지체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단지 일본이나 한국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고 전 인류를 위험에 빠트릴 수있다고 생각한다."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발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과 김성웅 감독,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가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발물관에서  진행된「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재일 동포 출신 오충공 감독과 김성웅 감독,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가 1923년 간토대지진 제노사이드, 재일동포가 겪어온 차별과 극복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15일 오후 인천 소재 한국이민사발물관에서 진행된 「영화, 재일동포 역사를 기록하다」 주제의 토크콘서트. 

초대손님으로 나온 재일동포 출신 김성웅 다큐멘터리 감독은 '차별과 전쟁을 반대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착실하게 내딛어야 한다'며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김성웅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성웅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일본 오사카 츠루하시에서 태어나 지역 초등학교의 70%이상이 재일동포인 곳에서 '소수자이되 주류'인 이중적 정서를 가지고 자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뼈아픈 배외주의, 차별은 역설적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긴 여정을 견디게 한 힘이 되었고,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어 '더 좋은 사회'를 위한 또 한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게 된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첫 장면에서 할머니는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라곤 단 한번도 없었어..."

전쟁을 경험한 마지막 1세대인 할머니들은 간토지방에 몇 안되는 재일동포 집거지인 가와사키시 사쿠라모토에서 '전쟁결사반대'를 외치는 800m 짧은 거리행진을 단행하고 극우단체의 차별과 혐오 발언(헤이트스피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이 할머니들의 모습을 남겨둘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에 담은 「아리랑 랩소디」이다.

5분여의 예고편 끝 부분의 자막엔 활짝 웃는 할머니들의 얼굴 위로 '나의 마음에 봄이 찾아온 것 같다'는 찡한 문구가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일본 현지에서 내년 2월 개봉하고 영화제 출품도 할 예정이다. 국내 개봉은 준비중이다.

김 감독은 전후 50년 역사를 재일동포의 시각으로 담아낸 오덕수 감독의 역작 「재일」(1997년 발표)의 조감독으로 시작해 「꽃할매」(2004), 「사쿠라모토」(2022) 등 작품을 연출했다.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오충공 감독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날 토크콘서트에는 「숨겨진 손톱자국」(1983), 「불하된 조선인」(1986), 「93년의 침묵」(2016) 등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문제를 40여년간 파고 든 재일동포 출신 오충공 다큐멘터리 감독도 출연해 무게감을 더했다.

간토학살 60주기를 앞두고 영화학교 졸업작품으로 만든 「숨겨진 손톱자국」은 사진이나 영상자료 한 점 없던 당시 강덕상 히토츠바시대학 교수(2021년 작고)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을 다룬 첫 영화.

가해자인 일본인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선인이 대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화를 내야 마땅한 피해자는 많이 울고 이를 본 가해 일본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유언비어만 믿고 왜 조선사람을 그렇게 죽였느냐고 물으면 가해자들은 "'조선 정벌, 조선인 토벌'이라는 말이 횡행했었다"고 당시의 광기어린 풍경을 기억했다. 

영화 촬영을 위해 도쿄 아라카와 강 하천부지를 헤매고 다니며 자경단에 의해 살해된 조선인 희생자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해발굴에 실패하자 '과연 조선인 학살이 있었느냐'는 억측이 나와 고생도 많이 했다. 묻혀서는 안되는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게 된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40년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매달렸다.

식량 배급한다는 거짓말로 조선사람들을 불러내어 군대의 명령이라며 죽였다. 살해한 조선사람들의 이름은 기록하지도, 묘비도 쓰지 않았다. 

급기야 10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는 또 다시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부정하는 일본의 범죄를 묵과할 수 없어 40년 세월동안 이 문제에 매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세편의 간토학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조상의 묘가 일본에 있거나 명부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유족들이 고국 땅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한국을 오가며 유족들을 만났다.

2017년 부산에서 처음으로 유족회를 만들고 올해 100주기 추도제에는 일본으로 유족들을 모셔가기도 했다.

아쉽고 또 아쉬운 건, 한국정부가 아직도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일본정부가 조선인 학살은 없었다고 말하는 일에 똑같이 가담하는 짓'이라고 질타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들은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사람'으로서 '살아있던' 사람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아파하고 이같은 학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100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현재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현재 전북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토크콘서트에 함께 한 이규수 전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 교수는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를 기리는 한국사회에서 '간토대학살'이라는 용어가 빈번히 나오는데 우려를 표시하면서 먼저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1937년 중국 난징대학살을 염두에 둔 표현인 듯 한데, 간토대지진 당시 특히 700~800명에 달했던 중국인 학살을 병렬해서 다루는 태도를 경계한 것.

일부에서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류구인'(琉球人, 오키나와인)에 대한 학살도 있었고,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겪었던 참변도 있었다며, 이를 함께 묶어 '대학살'로 평가하면 당시 의도적으로 유포한 유언비어를 근거로 군부가 동원된 계엄령 치하에서 조선사람을 구체적인 살해 목표물로 삼았다는 핵심이 희석된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과 냉전의 소용돌이속에 고국을 떠나 일본에 자리잡은 재일동포의 이산(Diaspora, 디아스포라)은 4~5세대를 이어가며 더욱 복잡해졌다. 일본의 잔혹한 배외주의와 차별도 힘들었지만 조국도 따뜻한 품이 되어주지 못했다.

가깝게는 100주기를 맞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간토학살 100주기 진상규명, 좀더 긴 안목으로 보면 그 모진 차별을 극복해 온 재일의 역사를 민족의 수난사로 끌어안아 모두의 마음에 봄이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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