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학부모 갑질이라는 것은 신돌석씨 세대에게는 정말 생소한 이야기다. 물론 굉장히 힘이 센 고위층이 학부모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것은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사람들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교사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시대의 문제는 보통사람이라고 보이는 학부모들이 갑질을 하고, 그것이 교사들을 심각하게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신돌석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 아버지가 학교에 가는 일이 없어서 학부모와 교사의 관계가 어떤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에 치맛바람이라는 말이 상당히 유행이었고, 아이들조차도 그 말을 모르는 경우가 없을 정도였다. 학교에 가면 으레 돈봉투를 갖고 가야 했다고 들었다. 촌지라고 했는데 그때는 그런 말을 썼던 것 같지 않다. 나중에 유행한 말인 것 같다. 아무튼 학부모들은 교사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말하는 교권이 강했냐 하면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서울시장의 조카가 같은 학년에 있었다. 아들도 아니고 조카인데 그 아버지가 학교에 왔을 때 교장부터 교감, 주임, 평교사까지 따라다니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잊히지를 않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신돌석씨는 확실히 반골 기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일에 대해 뭔지 몰라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전에는 대체로 공부를 잘 하거나 부모가 학교에 잘 찾아오는 애들을 선생들이 예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들이 너무 많아서 담임들이 그 애들을 챙기기가 벅찼었다. 뒤에 이야기를 나눠 보면 그런 애들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좋은 편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어느것에도 해당되지 않다 보니 선생들에 대한 기억이 사실 별로 좋지 않다. 몇 분 선생님은 이제라도 소식을 듣고 싶은 분이 있지만 대체로 안 좋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몇 안 되는 선생님 중에 6학년 때 담임이 있다. 뭔가 자부심이 강했고, 강한 소신을 갖고 가르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2학기 때 이제 졸업을 하니 기념으로 좀 멀리 소풍을 간다고 했다. 소풍이라면 창경원, 덕수궁, 경복궁을 가거나 조금 멀리 가봤자, 금곡 등인데, 마지막 소풍이라고 버스를 대절해서 충청도 어디를 간다고 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애가 두명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신돌석씨와 가까운 데 살고 친했던 서주혁이었다.

담임이 갑자기 학급회의를 하라고 시켰다. 당시에는 반장, 부반장이 있고, 학급회의를 주재하는 회장, 부회장이 있었다. 전교 어린이회장은 회장 중에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 잘 하고 집에서 밀어주는 애들은 5학년 때까지는 반장을 하려고 하다가 6학년이 되면 회장이 되려고 했다. 전교 회장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신돌석씨야 어차피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안 두었지만 지금 보면 그 옛날 변두리에서도 미래를 위한 경력 쌓기 경쟁이 있었다.

담임이 학급회의를 시킨 것은 못 가는 애들이 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란 것은 사실 뻔한 것이었다. 돈을 걷으면 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애는 없었다. 아마도 자기들 마음대로 그런 생각을 말할 만큼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 같다. 회의를 지켜 보던 담임이 전부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갑자기 토끼뜀을 시키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몇 바퀴 돌게 한 다음 반장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담임이 물었다.

반장이 말을 제대로 못했다. 애들이 말하지 못하고 뭐하냐고 여기저기서 쑤군댔다. 다시 한 바퀴 돌았다. 다음 차례는 부반장이었다. 반장이 말하지 못한다고 뭐라고 하던 그가 막상 자기를 시키자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다음 순으로 회장, 부회장 하다가 결국 부회장이 돈을 걷어서 대신 내주자는 말을 해서 그 날의 기합은 그 선에서 끝났다. 그날 기합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흘 동안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할 정도였다.

아주 오래 후에 이때를 생각하면서 돈이 없어서 소풍을 가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돈을 걷어서 가자고 생각하게 만든 담임은 그 당시로서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까짓 두 명 분 정도면 담임이 내 주어도 될 일 아닐까? 그걸 위해 애들을 그렇게 기합을 주면서 고통스럽게 만들 일이었을까? 물론 그것 말고도 이 선생님은 당시 어른들로서는 뭔가 옳은 말을 애들한테 많이 해주는 분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하지만 이 선생님이 자기 돈으로 내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왜냐하면 돈과 관련해서 또 다른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소풍을 갔다 오고 졸업을 바로 앞둔 때였다. 서무과장이 반마다 돌면서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애들을 불러서 독촉을 했다. 심지어 때리기도 했다. 그때 선생들의 구타나 기합은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다. 육성회비를 못 냈다는 죄로 많은 애들이 보는 앞에서 뺨을 맞고, 발로 채이고, 심한 욕설을 들어야 했다.

육성회비는 신돌석씨가 6학년 때 처음 만든 제도였다. 그 전에는 기성회비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사춘회비 등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신돌석씨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육성회비 제도를 만든 것은 경제적 수준에 따라 육성회비를 차등적으로 받자는 취지였다. 소득 수준이 다른데 같은 돈을 내고 다닌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최하층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을 한 반에서 열 명 정도 골라서 면제를 해주었다.

그런데 여기에 꼼수가 있었다. 다섯 명 정도는 진짜 가난한 애들이 면제받고, 나머지 다섯 명 정도는 경제적으로 어렵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낼 수 있는 애들이 면제를 받았다. 그런 애들은 대개 공부를 어느 정도 했고, 어머니가 학교에도 자주 왔다. 면제받는 기준은 셋방 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과는 달리 당시 신돌석씨가 다니는 학교에는 아마 절반 이상, 어쩌면 2/3 이상이 셋방을 살았을 것이다.

한 집마다 서너 가구 이상이 셋방이었으니 자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서울의 대부분이 그랬으리라고 신돌석씨는 짐작한다. 그러므로 셋방은 당시로서는 못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중에는 셋방을 살지만 공무원이거나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셋방 산다는 것으로 면제해 주고, 그들이 낼 육성회비를 담임한테 주는 것이었다. 그런 일을 반장 어머니가 알아서 했다.

신돌석씨는 당시까지 전혀 모르고 있던 일이었는데 서무과장이 난리굿을 한바탕 치르고 난 뒤 면제를 받는 열 명이 교장실로 불려갔다. 갔다 온 애의 말에 따르면 교장이 이 학생들한테 중학교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가난한 것으로 위장한 다섯 명은 그냥 고개 숙이고 '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부반장이 갔다 와서 이야기했다. 부반장은 공부도 괜찮게 하고 아버지가 공무원이라고 들었는데 뜻밖에도 육성회비를 면제받는 학생이었다.

교장실 갔다 온 뒤 그런 이야기를 마구 떠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슬쩍 한 이야기가 그 돈이 담임한테 간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난한 애들과 함께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애들을 토끼뜀까지 시키던 선생과 거짓으로 육성회비 면제자를 만들고 그 돈을 받는 선생 중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러웠다. 어른이 되어서 이 때 일을 생각하면 아마도 둘 다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삶을 살면서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중학교 때 학부모한테 호되게 당한 선생이 있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담임이 아닌 애들까지 지각 결석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사람이었다. 수업시간만 되면 출석부를 들고 지각 결석한 애들을 하나 하나 불러내서 혼찌검을 냈다. 수업시간의 3분의 1 정도를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 한번은 점심시간에 실내화를 신고 운동장에 나갔다 들어온 애가 이 선생한테 걸렸다. 교무실로 데려간 뒤 바닥에 무릎을 꿇린 뒤 애가 신고 나갔던 신발로 따귀를 때렸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교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그 애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음악선생을 찾으며 난리를 친 것이었다. 음안선생은 마침 그 자리에 없었는데 그 애 아버지는 별 욕을 다하면서 아이한테 한 대로 그대로 해주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쉬는 시간이라서 애들이 몰려 들어서 구경을 했다. 교무주임이 여기는 교무실이니 조용히 말씀하시라고 했다가 네 자식이 이런 일 당해도 조묭할 수 있겠냐는 핀잔만 듣고는 애꿎은 애들한테 화풀이만 해댔다.

한참을 그러다 교감이 교장실로 데려 가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 뒤 그 선생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계속 수업을 했으니 별다른 처벌은 없었을 것 같다. 학생들 사이에 한참 화젯거리였는데 대체로 고소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그 선생에 대한 반감이 컸다. 물론 이런 경우는 당시에도 일부 교사들의 일탈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교사들이 학생을 때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자라나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은 상처가 깊어만 갔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체벌 금지가 아주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인권조례도 지켜져야 한다. 그때 맞은 애의 아버지는 종로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상무인가를 했던 사람이란다. 말하자면 조폭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니 교무실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배짱이 있었으리라. 만약에 신돌석씨가 그런 경우를 당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교무실을 뒤집어 엎고도 남을 배짱이 있지만 학교에 가지 않으려 했을 것 같고 어머니는 속앓이만 했을 것이다. 피해에 대한 대응도 각자도생인 시대였다.

일부 학부모들 말고는 교사에게 갑질을 못하던 시대라고 해서 교권이 확립되어 있던 때는 아니었다. 유신체제가 절정을 이루던 고등학교 시절에 폐품 수집과 도시락 검사가 담임들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도시락 검사라는 것은 혼식 검사였다. 이럴 때 학생주임, 새마을주임이라고 등이 설치고 담임들에게 독촉을 해댔다. 고3 때 담임은 과외를 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아주 싫어했지만 별 수 없었다. 항상 애들한테만 짜증내는 식이었다.

한 번은 도시락 검사를 해서 잘 한 애들 것을 옆 반으로 옮겨 갔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알고 보니 청와대에서 도시락 검사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교장 교감 주임들이 분주히 다니면서 혼식이 잘 된 도시락을 골라냈다. 담임들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이가 없는 시대다. 지금도 아마 대통령실에서 떴다 하면 고등학교가 긴장할 것이지만, 이때처럼 마치 군대 하부조직처럼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술이 꽤 올랐을 때 촛불집회에 갔던 사람이 왔다. 그는 오늘은 행진에서 풍물에 참여하지 않고 왔다고 하였다. 풍물을 시작한 이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정말 손꼽을 정도로 빠졌는데 오늘 빠져서 아쉽다고 하였다. 우리와 만나는 게 그만큼 큰일 아니냐고 류성길이 말했고, 이준표도 그나마 집회라도 참가한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했지만, 박성학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술을 마시면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 안부를 묻고 아주 피상적으로 정세 이야기를 좀 하다가 시간이 많이 흘렀고 술도 어느 정도 되어서 일어섰다. 조금 이야기가 깊게 나가면 서로 불편해지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신돌석씨는 요즘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다. 저렇게 날뛰는 극우정권과 맞서 싸우려면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광범위한 연대 연합을 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신돌석씨는 애써 스스로 위로해 보곤 한다.

1호선 시청쪽으로 처음부터 있었던 박성학, 유성길과 함께 가게 되었다. 걸어가면서 박성학이 말했다. 우리 애는 그래도 다시 건강해져서 교단에 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애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자괴감이 들어요. 전교조 가입하고 해직되고 복직되고 활동했던 것도 이런 상황이 되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 동안 했던 일들이 어디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요즘 깊이 생각하게 돼요.

플랫폼에 들어서서 박성학은 반대편 열차를 탔다. 류성길과 둘이 남았을 때 그가 말했다. 우리의 세상이 나빠진 점도 있고, 나아진 점도 있지만, 결코 나빠지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험한 세월을 겪으면서 우리는 세상을 많이 바꾸었어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원한다고 봐요.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새로운 미래로 가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어요. 아니 그것은 특정한 세력들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관성과 잔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돌석씨는 류성길의 말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교권 침해 문제도 그런 것 아닐까? 이전처럼 학생의 인권이 없는 시대를 넘어섰고, 교사들의 권리도 존중되어야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런데 교권이라는 미명으로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세력이 완강하게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 속의 이기심, 경쟁의식, 차별의식 등도 그것에 편승하고 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옛것은 사라져야 하되 완강히 버티고 있는 현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신돌석씨가 생각하게 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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