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시대 한 마을의 호구(戶口)를 집성한 기록을 호적부 또는 호적대장이라 말하고, 그 초안을 호적중초(戶籍重草)라고 한다. 반면에 말(馬)을 집성한 기록, 즉 말의 적부(籍簿)는 마적, 또는 마적부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다수의 말이 있을 때 각 말의 특성을 기록한다.

이러한 마적부는 전존(傳存)하는 것이 매우 희소하다. 그런데 이번 ‘2023 제주고서전’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400여 년 전의 마적부가 출품되었다. 현존하는 마적부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 헌마공신 김만일과 그 후손들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의 김만일(金萬鎰, 1550~1632)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金殷說, ?~968)의 22세손, 조선 개국일등공신 의정부좌찬성 익화군 충민공 김인찬(金仁贊, ?~1392)의 8세손이며, 김인찬의 셋째 아들인 김검룡(제주 입도 시조)의 7세손이다.

『헌마공신 김만일 묘소』,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사진 제공 – 서귀포시]
『헌마공신 김만일 묘소』,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사진 제공 – 서귀포시]

김만일은 탁월한 목축기술과 위기극복 능력으로 수많은 양마를 길러 임진왜란 등 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천 필의 전마(戰馬)를 헌납하여 국난 극복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김만일은 1594, 1612, 1618, 1620년 연이어 전마를 헌마하니 광해 임금이 직접 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정2품)에 임명하였다.

1622년에는 각별히 키운 말을 임금에게 올려보냈고, 1624년부터 5년간 양마 수백 필을 헌마하는 등 1천3백여 필을 헌마(獻馬)한 공로로 1628년에는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어, 헌마공신으로 칭송되고 있다.

이후 김만일의 후손들은 230여 년 동안(1659~1895) 제주산마감목관(83명, 종6품 현감과 동급)직을 맡아 산마장을 운영하면서, 왕이 타는 어승마(御乘馬)와 전마는 물론, 양마 산출에 진력함으로써, 국가 전마의 공급처로서의 기능을 했다.

김만일이 준마를 길러 나라에 헌마한 때부터 무려 300년 가량 한 집안에서 국방의 기초가 됐던 전마를 도맡아 감당했다. 김만일에 이어 후손들까지 나라에 올려보낸 말은 최소 2만여 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공헌은 세계사에서도 그 유래가 유일한 역사적인 공훈이라 할 수 있다.

2. 제주도 판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권제9, 1653년 이전, 갑인자체 훈련도감 목활자본 복각본,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권제9, 1653년 이전, 갑인자체 훈련도감 목활자본 복각본, 목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1653년에 출판된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탐라지(耽羅誌)』에는 『역대장감박의』 책판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목이나 대정현 및 정의현의 간기가 보이는 『역대장감박의』 인쇄물은 발견된 바 없다.

그런데 이번 ‘2023 제주고서전’에 개인이 비장하여 오던 1620년과 1625년에 작성된 「마적부」가 출품되었는데, 그 「마적부」는 『역대장감박의』의 뒷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목판본 『역대장감박의』보다 「마적부」가 먼저 기록되었고, 『역대장감박의』는 「마적부」의 이면지를 활용하여 찍은 책이다”라는 점이다. 즉 마적부를 파책(破冊)한 종이의 뒷면에 『역대장감박의』가 인출된 것이다.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이면(裏面), 「정의현 마적」, 1620년 첫 장, 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이면(裏面), 「정의현 마적」, 1620년 첫 장, 원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이면(裏面), 「정의현 마적」, 1620년 첫 장 왼쪽 상당부, 원본. 이 사진의 왼쪽 모서리에서 보듯이 문서가 잘라져 나간 것을 보면, 『역대장감박의』보다 「정의현 마적」이 먼저 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마적부에는 사각형의 붉은 인흔이 보인다. 이 『정의현 마적』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서지학계에서는 또 한 종의 제주에서 출판한 판본 실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역대장감박의(歷代將鑑博議)』 이면(裏面), 「정의현 마적」, 1620년 첫 장 왼쪽 상당부, 원본. 이 사진의 왼쪽 모서리에서 보듯이 문서가 잘라져 나간 것을 보면, 『역대장감박의』보다 「정의현 마적」이 먼저 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마적부에는 사각형의 붉은 인흔이 보인다. 이 『정의현 마적』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서지학계에서는 또 한 종의 제주에서 출판한 판본 실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시대의 장부나 2차 기록이 인쇄되거나 사용된 종이의 뒷면에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마적부와 『역대장감박의』는 사용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특히 「정의현 마적」, 1620년 첫 장 왼쪽 상당부, 원본의 왼쪽 모서리에서 보듯이 문서가 잘라져 나간 것을 보면, 『역대장감박의』보다 「정의현 마적」이 먼저 쓰였음이 입증된다.

이 마적부에는 사각형의 붉은 인흔이 보인다. 이 「정의현 마적」 문서가 이 책의 이면에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이 『역대장감박의』가 제주도 판본임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서지학계에서 규명된 최고본 『역대장감박의』는 1691년 경남 고성(固城)에서 간행된 것이다.

그런데 1653년에 간행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장감박의』 책판이 수록되어 있어 제주에서 1653년 이전에 『장감박의』가 출판되었음을 알수가 있었는데, 본 「정의현 마적」이 나오기까지 제주판 『역대장감박의』의 실존 여부는 알 수가 잆었다. 이 『정의현 마적』을 통하여 서지학계에서는 또 한 종의 제주에서 출판한 판본 실물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목판본으로 인출된 『역대장감박의』의 필체를 보면, 이 책은 갑인자체 훈련도감 목활자본을 복각한 판본이다. 찍혀진 글자체에 목니가 보이지 않고 획의 끝부분이 매우 분명하여, 손쉽게 초쇄본임을 알 수 있다.

3. 임란 직후의 ‘마적부’

‘2023 제주고서전’에 출품된 『역대장감박의』 뒷면에 있는 ‘마적부’는 ①「萬曆肆拾捌年(1620)伍月日 旌義縣馬籍」와 ②「天啓伍年(1625)拾月日大靜縣馬籍」이다. 제주도에서 1625부터 1653년 사이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던 『역대장감박의』에 기록된 문서철이다. 책은 판식이나 서체로 볼 때 갑인자체 훈련도감 목활자본을 복각(覆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역대장감박의』의 판심(版心)의 하단에는 간혹 ‘生男’, ‘玄’이라는 각수(刻手)의 표시가 있는데, 마적부의 전체 분량은 권제8〜9의 이면에 정의현과 대정현에서 관리되던 말에 대한 마적(馬籍)이 약 50장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의 종류, 나이, 암수 구분, 상태(얼룩, 신체 모양 특징 등), 색깔, 갈기의 색과 모양 등과 별도의 죽은 말의 수, 그 해 태어난 말의 수, 병든 말, 공납하는 말에 대한 정보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말의 종류 명칭은 절다, 류마, 고라, 구랑, 공골, 태성, 표가라, 담가라, 월라, 오류마 등등 여러 종류 구분을 각각의 말별로 표기하였다. 말의 관리는 목장의 한 단위 당 보통 400〜500마리 정도이며, 이 문서에는 점검한 기록과 천자문 순으로 군두(群頭), 1번군, 2번군 등으로 나누고 관리 목자(牧子) 이름과 소속을 기록하였다.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양마(養馬)」, 홍만선(洪萬選, 1643~1715) 편저, 필사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양마(養馬)」, 홍만선(洪萬選, 1643~1715) 편저, 필사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존하는 자료 중 목장의 관리 단위별로 개별 말에 대한 목록은 이 마적 이외에는 확인된 바 없으며, 제주도(정의현, 대정현) 말에 대한 관리 대장도 남아있지 않다. 이 자료는 1620년과 1625년의 마적 상황을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 시기는 김만일의 생전 시기이다. 더군다나 김만일이 태어난 의귀리는 1620년 정의현 마적을 만든 그 정의현에 속한 지역이다. 이 자료는 김만일 시대 말 산업을 실증하는 기본 자료로 매우 중요한 고문서이다.

4. 사족 ; 조선시대와 현대의 보훈 정책

헌마공신 김만일을 통하여 고금(古今)의 보훈 정책을 살펴보자. 고대의 전장(戰場)에 있어 말은 기마대와 전차의 핵심이니, 곧 지금의 장갑차나 탱크와 같은 존재이다. 감만일이 국가에 공납(貢納)한 말 한 마리의 위력은 보병 20명의 위력보다 큰 전력이다.

그가 말을 키워서 일본이나 청(淸)의 외침을 방어하는 전쟁에 보낸 것은 전쟁에 참여한 장수의 공훈에 못지않은 것이다. 그러하니 조선왕조에서는 김만일 자손들의 감목관 지위를 세습적으로 인정하였다. 즉 조선시대 공신들의 공훈은 공신도감(功臣都監)과 충훈부(忠勳府)가 맡도록 하여 대를 두고 보상을 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요즘의 국가보훈부의 역할보다 조선시대의 공신도감이나 충훈부 역할이 더 방대하고 구체적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필자가 알기에 지금의 북한에는 국가보훈부 같은 부서나 광복회 같은 관변 단체가 없는 것 같다. 한국처럼 국가의 한 부서가 보훈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조직의 지도부가 공훈 유자녀나 그 후손들을 우선하여 보호 육성하니 남한의 국가보훈부 같은 국가 기구나 광복회 같은 관변 단체가 필요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주의자들이 홍범도 장군의 동장을 철거하려는 정황을 보는 심정은 매우 곤혹스럽다. 독립유공자 보훈 정책은 한국이 북한에 뒤진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는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과거의 원호처(1962년)와 국가보훈처(1984)에 친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지금의 국가보훈부는 더욱더 심해진 것 같다.

그것이 국가보훈부의 극우적 원호 행정으로 나타난다.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는 1961년 7월 5일 자로 보건사회부 원호국(1955년 2월 17일 설치)을 확대 조직하여 출범한 군사원호청(軍事援護廳, 1961년 7월 5일 신설)을 1962년 4월 16일 해산하고 같은 날 재출범한 조직이다.

군사원호청은 상이군인에 대한 치료와 원호, 전사자 유족의 원호, 군인연금의 기금 관리와 지급 등 군사 원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국가 기관이었고, 「독립유공자예우에관한법률」이 1994년 12월 31일 자로 제정되어 1995년 1월 1일 자에서야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 대한 예우는 미진한 상태이니,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군사원호청 및 원호처의 본래 업무는 기존의 국가보훈부에서 하고,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위한 예우는 민족독립보훈부를 신설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하도록 맡기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홍범도 장군 동상 이전 같은 불합리한 문제로 인하여 국가보훈부 내부에서 논란이 일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김만일의 헌마 공헌을 돌이켜 보며, 그의 자손들에 대한 조선왕조의 예우는 지금 국가 보훈 정책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적부를 소개하다가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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