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가 연구하거나 자료를 수집한 전문 분야는 연구한 사람이 별로 없다. 물론 같은 학문을 연구한 분이 있기는 하지만 삼천포로 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식민지 사관을 극복한답시고 황당 사관으로 흐른 이유립과 황상기 류의 일부 자칭 민족사학자들이 그렇다. 그런 현상을 나는 여기 통일뉴스에 『국혼의 재발견』을 33회 + 호외 1회 등, 모두 34회를 연재하며 다루었다.

이러한 나의 연구는 서지학적 검토를 거친 자료수집에서 시작되었다. 서지학은 국학(國學, 韓國學)의 기본학이자 기반학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동안 내가 자료를 수집하고 탐색 및 연구해온 한 분야를 밝히고자 한다.

1. 보학 연구에 뜻을 두다

‘신 잡동산이’ 제23회 연재에서 “이준 열사 자손고(子孫考)”를 연재하며 “나는 보학(譜學) 전문가”라고 언급하였더니, 좀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이제 그에 관하여 쓰고자 한다.

1950년대에 출생한 대부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5살 때부터 조부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 온 소리가 있다. “너는 광주(廣州)이씨 죄의정공파 OO대손이다. 부친 함자(銜字)는 O자O자이고, 조부 함자는 O자O자이며, 증조부 함자는 O자O자이다.”, “너의 고향은 경기도 포천군 OO면 OO리이고, 거기에는 누대(累代)가 모셔진 선산(先山)이 있다. 이를 잊지 말아야 어떠한 파국의 난세가 와도 너는 조상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라는 등등‥‥‥.

그러나 내가 보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대 초반이다. 당시 내가 배운 문중 보학은 사색당파에 따라 차이가 컷고, 대체로 현달(顯達)한 양반 가문의 계보를 따지는 봉건적인 학문이었다.

차츰 나는 문중 보학을 넘어선 현대의 문화사적인 보학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연구에는 각 문중의 초간보와 재간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 종친회를 통하여 초간보와 재간보에 접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나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의 보학 연구를 평생의 과업으로 미루어 놓고, 고족보를 본격적으로 수집해야 했다. 1982년경의 일이다.

2. 나의 족보학 수집과 연구 초기

나는 1982년 5월 21일에 창립한 ‘한국고서동우회’(회장 안춘근)의 첫 간사를 하는 등, 고서동우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 모임은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에 소재한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사장 여승구) 사옥의 3층 사장실을 연락처로 쓰고 있었는데, 이 모임은 우리나라에서 현대 애서운동의 시작이었다.

『한국고서동우회보』 제2호, 「족보와 계보의 서지학적 소초(상), 1985년 5월 25일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한국고서동우회보』 제2호, 「족보와 계보의 서지학적 소초(상), 1985년 5월 25일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1985년 5월에 발행한 우리 『한국고서동우회보』 제2호 에 나는 「족보와 계보의 서지학적 소초(상)」(pp.64~70)를 발표하였다. 아마 이 글이 내가 족보학에 관하여 쓴 첫 글로 기억된다. (이 글의 (하)는 1986년에 발행한 제3호에 기고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제3호를 나의 서고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고족보 수집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1985년에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의 서린동 사옥에서 나의 고족보 수집품 100여 점을 가지고 고족보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전시품 목록은 당시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에서 발행한 『고서통신(古書通信)』 몇 호인가에 수록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고서동우회 월보』 제6호, 「위보⸱탁보 소론초(僞譜⸱濁譜 小論抄)」, 1985년 11월 30일. [사진 제공 – 이양재]
『한국고서동우회 월보』 제6호, 「위보⸱탁보 소론초(僞譜⸱濁譜 小論抄)」, 1985년 11월 30일.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리고 나는 그해 11월 30일(토) 오후 4시 30분에 개최된 ‘한국고서동우회’의 제8회 고서간담회에서 「위보⸱탁보 소론초(僞譜⸱濁譜 小論抄)」를 발표하였다. (참조 : 『한국고서동우회 월보』 제6호, 1985년 11월 30일)

나는 이 고족보 전시회를 통하여 고족보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더 많은 고족보를 수집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으나, 상황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대구에 있는 모 대학교 도서관에서 아차 싶었는지, 고족보 수집의 경쟁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전시품을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의 수집품으로 오해하고 그쪽으로 일부 고족보가 매물로 들어가는 거꾸로 된 현상이 나타났다. 경쟁자가 생겨난 상황에서 나의 고족보 수집은 장기적으로 나가야 했다.

나는 고족보 수집 부진의 탈출구를 거래처 확대에서 찾았다. 제1차 전시회 이전의 거래처는 주로 서울의 인사동과 청계천8가, 그리고 서울 지역을 오가는 지방의 거간상 정도였다. 이러던 것을 대구, 부산, 대전, 전주, 광주 등 전국의 고서점과 골동품상, 거간상과의 거래로 확대한 것이다. 약 10여 년 이상을 그렇게 수집하였고, 2000년대 들어와서는 고서나 골동품 경매를 주로 활용하였다.

3. 나의 족보에 대한 관점

내가 20대에 읽은 육당 최남선의 논고에는 우리나라는 “두 가지 족속이 있다. 하나는 유족보족(有族譜族)이요 다른 하나는 무족보족(無族譜族)이다”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20대 초반에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분노하였고 당혹스러웠다. 씨족 의식보다는 민족 정신을 앞세워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에도 족보가 필요할까? 내가 1985년 11월에 발표한 글 「위보⸱탁보 소론초(僞譜⸱濁譜 小論抄)」를 본다면 내가 현대의 족보 발행에 부정적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족보 발행에 부정적이지는 않다. 족보, 특히 탁보(濁譜)로 인하여 파생하는 몇몇 특수한 문제도 있지만, 족보의 선한 기능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본관(本貫)을 기억한다. 북에서는 족보를 봉건사회의 유물로 보고 발행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의 본관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도 자신이 전주김씨임을 회고한 바 있다. 족보를 무리하면서까지 억지로 계대를 맞추어 탁보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정상적인 족보의 편찬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2020년일 것이다. 나는 이준 열사의 유족대표 조근송 씨에게 남한에 있는 이준 열사의 외손들 모두의 계보를 수록 정리하고, 중국 조선족을 통해 북한의 자손들 모두를 확인하여 통일 가승(家乘)을 해방후 처음으로 출판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이준 열사 자손들의 가승을 중국에서 출판한다면 북의 자손들에게 보내도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조근송 씨는 진행할 의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더니 2022년 7월 14일 제115주기 추모제에 이준 열사의 가짜 자손 이정모의 아들 이〇〇이 나타나 직계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또 한바탕 소동이 벌여졌다. 나는 지난 23회 연재 “이준 열사 자손고(子孫考)”에서 이 소동을 보학의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광주이씨회보』 제385호 5면,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고족보 이야기 (2)」, 2023년 2월 1일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광주이씨회보』 제385호 5면,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고족보 이야기 (2)」, 2023년 2월 1일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1982년 이래 현재까지 40여 년간 수집한 고족보 수집품을 기반으로 하여 2022년 연말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하였다. 2023년 1월호 『광주이씨회보』 제384호부터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고족보 이야기」라는 제호(題號)로 7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다.

지난 7회 동안의 연재분은 200자 원고지로 300장 분량인데, 나는 이글에서 비로소 문화사적 관점에서 본 현대 보학 연구를 시도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수집한 고족보 및 자료를 서지학적으로 완벽히 정리하고, 더 나아가 각 문중이나 도서관에 소장된 고족보를 조사하여 종합 연구하는 과업이 이제 내게 남아있다.

4. 맺음말 ; 나의 우리 문화 연구

나는 학자가 아니라, 평생을 배워 가는 학생이기를 바랐다. 그것은 나의 연구가 사료 수집을 병행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의 학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를 학자라고 말한 것은 1980년대 말의 언론에서부터 시작하였고, 1994년에 애서가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면서 주변에서 나를 그렇게 특정하여 분류하였다.

1978년인가? 나는 한뫼 안호상 박사에게 “저는 사업을 하여 돈을 벌겠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안호상 박사는 웃으시며 “이 선생은 학문이나 하세요”라고 하신다. 아마도 내가 사업가 자질은 없다고 보셨던 것 같다. 한뫼 안호상 박사와 복초 최인 선생은 내게 “씨족의 문중사보다는 민족사를 앞 세워야 한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내가 ’국혼의 재발견‘ 제32회 연재에서 「민족사관과 문중 보학의 상충」을 쓴 것은 민족사를 앞세우고자 한 의도이다.

한편 1970년대 중후반 당시에 내게 전통적인 문중 보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분은 당시 우리나라 보학의 대가 김환덕(金煥德) 선생이다. 1991년 허준의 묘소를 찾아내게 된 것이라든가, 혜원 신윤복의 계보를 규명한 것, 이상좌(李上佐) 5대를 규명한 것 등은 내가 보학을 연구하면서 올린 성과이다.

한편, 1990년대 초반이다. 서지학자 남애 안춘근 박사에게 “저는 서지학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언젠가 필요하다면 어느 분의 학맥을 이은 것으로 해야 할까요?”라고 말씀드리니, 곧바로 “어~! 내 학맥을 이은 것으로 해” 서지학자 남애 안춘근 박사는 10년간 내게 고서와 사료의 실증적 감식안을 길러 주신 분이고, 의학사학자 일사 김두종 박사는 자신의 저서 『한국고인쇄기술사』를 통하여 내게 우리나라의 출판 인쇄 기술의 흐름을 깨닫게 하여 주신 분이다.

나에게 민족 정신과 사료를 보는 안목은 이렇게 10년 이상을 거쳐 오면서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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