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인물사 연구를 위하여 1975년부터 현재까지 48년간 역사서와 함께 여러 성씨의 초간보 및 재간보, 보학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필자는 자료 수집 초기에 봉건시대의 재래식 보학(譜學)을 배운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보학은 조선초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학의 확산은 조선 영조조 이후 각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하는 시기에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과거에 보학이라면 흔히 문중보학(門中譜學)이라 불러왔다. 문중에서 주장하는 것을 되풀이하여 소개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문중의 보학은 상충하는 점이 있었다. 사색당파에 따라서도 차이가 컸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우리나라 보학의 문화사적(文化史的)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다, 필자는 그 재래식 보학을 문화사적인 현대 보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광주이씨회보(廣州李氏會報)』 제384호(2023년 1월)부터 제389호(2023년 7월)까지 6회에 걸쳐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고족보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제391호(9월호) 회보에는 제7회로 ‘한국의 이색(異色) 계보(系譜) 이야기’를 기고한다. 그 도입부에서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한글 가승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신 잡동산이에서는 우리 문중의 제391호 회보에 기고한 한글 가승을 일부 수정하여 소개한다.

광주이씨(廣州李氏) 가문 등의 한글 가승

한글은 중요하다, 한글의 원형인 『훈민정음』은 조선 세종이 1443년에 창제하였지만, 이 문자는 현대에 우리 민족을 규정하는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1446년 9월에 반포한 이래, 그 직후 1447년에는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1449년에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으며, 그리고 1459년에는 이 두 책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였다. 이 3종의 책은 한글로 지어진 첫 작품이다. 이후 1461년에는 불경을 번역하여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언해를 간행하였다.

이렇듯 조선전기에 한글 사용은 주로 국가나 왕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족보는 모두 한문 전용이었고, 근래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족보나 대동보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부터 몇몇 양반가에서는 어린 자녀나 출가하는 딸을 위한 한글 가승을 작성하였다.

1, 가승(家乘)

조선시대에 족보는 한 집안의 가장, 즉 맏아들이 모셨다. 그리고 이외에는 직계 선조를 적은 가승을 모셨다. ‘출가하는 딸을 위한 가승’이란 부계나 모계의 직계(直系) 계보를 말한다. 조모나 외증조모의 직계를 포함한 것도 드물게 있다.

가승(家乘)은 대체로 한 집안의 직계 위주로 적어 놓은 계보를 말한다. 직계 선조만 적은 것도 있고, 직계 선조의 형제 정도까지도 적은 것이 있으며, 가까운 일파(一派)를 수록한 계보를 가승이라 한 것도 있다.

대부분의 반가(班家)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부계와 모계의 직계를 적어서 보냈다. 이러한 필사본으로 작성된 가승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한글 가승이고 하나는 한문 가승이다.

조선시대는 대체로 한문을 숭상하는 시대였으므로 한문 가승이 주를 이루었고, 먼 길을 떠나는 남성의 경우 품 안에 한문 가승을 소지한 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집안의 계보를 가르치기 위하여 가승을 적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2. 한글 가승(家乘)

조선시대의 일부 양반가에서는 여성에게도 한문 교육을 했지만, 대부분 여성에게는 주로 언문(諺文, 한글) 교육을 했기에 한글 가승이 그 유물로 남아 전하고 있다.

필자에게도 여러 점의 수진본(袖珍本) 크기의 한글 가승과 한문 가승이 수집되어 있다. 아래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한글 가승 다섯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계], 1693년 이후(17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1책. 9×14.8cm. 緋緞表紙 四針線裝. 관직과 휘(諱) 사이를 띄어쓰고 있다. 한자에 한글 음토(音吐)를 달았는데, 이는 한글 가승의 원초적(原初的) 모습이다. 이 가승은 이용징(李龍徵, 1650~1726)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계], 1693년 이후(17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1책. 9×14.8cm. 緋緞表紙 四針線裝. 관직과 휘(諱) 사이를 띄어쓰고 있다. 한자에 한글 음토(音吐)를 달았는데, 이는 한글 가승의 원초적(原初的) 모습이다. 이 가승은 이용징(李龍徵, 1650~1726)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①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계], 1693년 이후(17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1책. 9×14.8cm. 緋緞表紙 四針線裝.

한자를 먼저 쓰고 그 밑에 한글 토를 달았다. 중요한 것은 본문과 휘(諱)자 사이를 띄어서 쓰는 초보적인 한글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 점과 ‘李’의 한글 표기를 ‘이’가 아닌 ‘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승은 둔촌(遁村) 선조(先祖)가 십일대(十一代)로, 동고(東皐) 준경(浚慶, 1499~1572) 선조가 오대조(五代祖)로 되어 있으며, 조(祖) 필무(必茂)까지 기록되어 있다. 가승에 필무의 관직은 사헌부 장령으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 의하면, 이필무(李必茂, 1628.09.14.~1693.12.14.)는 1693년(숙종 19년) 9월 24일과 10월 23일 사헌부 장령에 제수된 것으로 나온다. 즉, 이 가승은 이필무의 관직으로 보아 1693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광쥬니시셰계’ 부분의 바로 뒤에 ‘나주나씨셰계’가 나오는데. 이필무의 아들 이용징(李龍徵, 1650~1726)의 배위(配位)가 나주나씨이다. 즉 이용징이 자녀를 위하여 이 가승을 작성한 것인데. 그의 졸년월일이 1726년 10월 30일인 것을 보면, 이 가승을 만든 연대를 늦추어 잡아도 숙종 후기가 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가승은 1693년 이후 3~4년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본다.

이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가 어느 연대에 작성되었다고 보든. 이 가승은 국한문 혼용한 가승으로는 최고 연대로 올라가는 가승이다. 한문 전용의 시대에 광주이씨가문의 한 인물이 국한문 가승을 선구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이용징은 4남 2녀가 있다.)
 

[풍산홍시셰계], 1778년경, 궁체 필사본, 수진본, 1첩, 21×8.5cm. 절첩본. 현재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필자 구장본).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 가승은 홍낙춘(洪樂春)의 손자를 위하여 작성한 한글 세계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한글 정서체(正書體), 즉 궁체(宮體)로 쓰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풍산홍시셰계], 1778년경, 궁체 필사본, 수진본, 1첩, 21×8.5cm. 절첩본. 현재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필자 구장본).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 가승은 홍낙춘(洪樂春)의 손자를 위하여 작성한 한글 세계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한글 정서체(正書體), 즉 궁체(宮體)로 쓰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② [풍산홍시셰계], 1778년경, 궁체 필사본, 수진본, 1첩, 21×8.5cm. 절첩본. 현재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필자 구장본).

이 가승은 마지막 대(代)가 “조고휘ᄂᆞᆫ낙츈”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홍낙춘(洪樂春)의 손자를 위하여 작성한 한글 세계로 보인다. 홍낙춘은 홍국영(洪國榮, 1748~1781) 부친이자, 정조의 첫 번째 후궁으로 간택(1778년)된 원빈홍씨(元嬪洪氏, 1766~1779)의 부친이다. 이 가승은 원빈홍씨를 위하여, 특히 원빈홍씨가 출산하면 그 자식에게 외가를 교육하기 위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승도 ‘李’자를 ‘니’로 표기하고 있다. 이 가승은 필자가 소장하다가 초보적인 한글 띄어쓰기가 되어 있기에, 2021년에 국립한글박물관으로 양여하였다. 이 가승의 띄어쓰기는 1693년 이후 17세기 말 필사본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계] 보다 진일보(進一步)한 초보적 띄어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어학회가 확정한 한글 띄어쓰기의 원류는 이들 가승류 고문헌에 있다.
 

[광쥬이씨셰계], 1780년 이후 1800년 이전 18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3첩. 6×10.1cm. 절첩본.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 가승은 이정신(李廷藎, 1730~1810)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광쥬이씨셰계], 1780년 이후 1800년 이전 18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3첩. 6×10.1cm. 절첩본. 띄어쓰기의 초보적 형태를 보여준다. 이 가승은 이정신(李廷藎, 1730~1810)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③ [광쥬이씨셰계], 1780년 이후 1800년 이전 18세기 말 필사본, 수진본 3첩. 6×10.1cm. 절첩본.

이 가승은 한글 전용이다. 휘자(諱字)를 적으면서도 한글을 먼저 적었다. 이 수진본은 3책인데, 초권이 한글 가승이고, 이권과 삼권은 한글 제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이 가승에서는 ‘李’자의 한글 표기를 ‘이’로 하고 있다. 이 가승은 극돈(克墩, 1435~1503) 선조의 8세손 한동(漢東, 1689~1753) 선조까지 적고 있고, 한동 선조의 아들 좌형(佐衡, 1714~1764)과 손자 정신(廷藎, 1730~1810) 증손자 상학(象鶴, 1780~1837)은 이름만을 적고 있다. 상학의 아들 지항(芝恒, 1801~1867)이 없는 것을 보아, 이 가승은 1800년 이전 정조조에 정신(廷藎)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위의 17세기 말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와 본 18세기 말 [광쥬이씨셰계]의 작성은 80~10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 ‘李’의 한글 표기가 ‘니’에서 ‘이’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다른 가문의 한글 가승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니’로 적고 있어 ‘李’의 보편적 표기는 ‘니’인 것으로 보인다.

 

[셩산니시셰계], 1805년 이후 19세기 초 필사본, 수진본, 1첩. 7.6×16cm. 절첩본. 이 가승은 이약원(李若源, 1766~?)이 작성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셩산니시셰계], 1805년 이후 19세기 초 필사본, 수진본, 1첩. 7.6×16cm. 절첩본. 이 가승은 이약원(李若源, 1766~?)이 작성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④ [셩산니시셰계], 1805년 이후 19세기 초 필사본, 수진본, 1첩. 7.6×16cm. 절첩본.

부(父) 약원(若源)이 끝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이약원(李若源, 1766~?)의 자녀를 위하여 만든 순 한글 가승이다. 휘자 옆에 한자로 토를 달았는데, 끝에 나오는 성주이씨 약원이 진사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방목을 조사하여 보면 이약원이 1805년(을축) 증광시에 진사 3등 56위로 입격한 기록이 나온다.

즉 이 [셩산니시셰계]는 1805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다. 18세기 말 [광쥬이씨셰계]에 ‘李’를 ‘이’로 표기하고 있는데, 1805년 이후 19세기 초의 [셩산니시셰계]에서는 ‘니’로 표기하고 있다.

 

[풍산김씨셰계], 1848년 1월, 정서체 한글 필사본, 1책(62장), 17×26.9cm. 5침 선장본, 이 가승은 김중휴(金重休, 1797~?)가 삼남 우흠에게 필사하게 시킨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풍산김씨셰계], 1848년 1월, 정서체 한글 필사본, 1책(62장), 17×26.9cm. 5침 선장본, 이 가승은 김중휴(金重休, 1797~?)가 삼남 우흠에게 필사하게 시킨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⑤ [풍산김씨셰계], 1848년 1월, 정서체 한글 필사본, 1책(62장), 17×26.9cm. 5침 선장본.

이 세계의 끝부분에 23세 중휴(重休)가 나온다. 풍산김씨 김중휴는 “진사시 삼등에 등하시다”라고 적고 있다. 사마방목에 의하면 풍산김씨 김중휴(金重休, 1797~?)는 1837년 정유년 식년시에 진사 3등 15위로 입격하였다.

이 가승의 맨 끝에 “무신 졍월 쵸슌에 부ᄂᆞᆫ(는) 샤제 샴쟈 우흠으로 가첩을 등출하여 급 니실하니”라고 하고 있어 이 가승은 1848년(무신) 1월에 필사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책을 필사한 우흠은 김중휴의 삼자(三字)이다. 그런데 1848년 [풍산김씨셰계]에 배위(配位)로 등장하는 광주이씨라든가 진성이씨를 모두 ‘니’씨로 적고 있는 것을 보면, ‘李’를 ‘니’로 적는 것은 조선후기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 한글본 [풍산김씨셰계]는 62장으로 되어 있어 한글 가승으로는 상당히 방대하다.

3. 맺음말 ; 한글 가승의 중요성

조선중기에 허균(許筠, 1569~1618)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었다. 당시 한글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후 80여 년이 지난 1693년 이후에 이용징 집안에서는 [廣광州쥬李니氏시世셰系계]를 작성하였다. 1693년은 숙종 19년으로 조선중기이다. 당시는 남존여비가 뿌리를 내리던 봉건사회였고, 족보 편찬에서 선자후서(先子後壻)의 원칙이 굳어가던 시기였다. 또한 당시에는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1897년 이봉운(李鳳雲)이 저술한 대한제국의 교과서 [국문정리]는 순 한글로 저술된 책(목판본, 14장)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제외한 대한제국 교과서는 모두 국한문 혼용이다. 우리나라에서 한글 전용이 시작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선중기에 한글 가승이 출현하며, 정조조(正祖朝)의 한글 가승에서는 띄어쓰기의 시원 형태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요즘도 간혹 한글 가승이 고서점이나 골동점에 유통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른 채 버려지는 현상이 있다.

한글 가승은 한글이 양반가에서 유용하여 쓰였음을 의미한다. 한글 가승은 한글 간찰보다도 희소하다. 한글 간찰은 여성이 쓴 것이 많은 데 비하여 한글 가승은 대개 남성이 쓴 것으로 판단된다. 남아있는 한글 가승에 문화재적 가치를 이제라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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