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주초에 기고한 제19회 연재 ‘허준 묘소를 찾기까지를 소회(所懷)하다’에 이어, 이제는 이후 이야기의 일부를 간략하게 글로 남긴다.

6. 허준 묘 취재에 얽힌 이야기

1975년부터 나는 우리 민족의 인물사 연구와 자료 수집에 집중하였다. 과학 입국으로서 미래의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섰다. 이런 시기에 허준의 간찰을 입수하였고 여러 문헌과 자료를 검토한 결과 나는 허준이란 인물에 매료되었다.

1983년경에 나는 당시 KBS 보도본부 문화부의 이동식 기자에게 “내가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고 있는데, 찾는다면 이동식 기자에게 특종을 주겠다”라고 공언하였다. 이동식 기자는 나를 취재한 바 있는 당시 언론의 대표적인 문화재 전문기자였다.

1991년 당시 내가 김병집 회장에게 9월 27일 현장에 들어가자고 한 것은 허준의 달이 지나가기 전에 허준 묘소를 찾아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9월 말에 강력한 태풍 ‘미레이유(Mireille)’가 한반도를 급습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그 폭풍이 아직 중부지방에 다다르지 않은 27일이 들어가 찾지 않으면 9월은 다 지나간다.

27일에 나는 김병집⸱정재환 씨와 민통선 안을 헤맸다. 그리고 오후 3~4시경에 리비교를 건너 일반 지대로 오자마자 공중전화를 찾았다. 나는 이동식 기자에게 전화하여 “오늘 민통선 안에서 허준 묘를 찾았어요. 태풍이 지나가면 함께 현장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의 정재숙(후에 문화재청장 역임) 기자에게도 전화하였다. 허준 묘를 찾았으니 30일 같이 들어가자고 제언하였다. 정재숙 기자도 들어가겠다고 한다.

또한 ‘허씨대종회’의 허장열 씨와 ‘허준선생기념사업회’를 준비 중인 한의사 문종화⸱한대희 두 분에게도 전화하였다. 이제 나는 무엇보다도 합법적인 민통선 출입이 필요하였다. KBS와 문화재관리국의 영향력은 컸다.

그런데 갑자기 한의사 문종화 씨가 제동을 걸어왔다. “중앙일보 취재는 국방부에서 반대한다”라는 것이다. 나는 문종화 씨가 국방부를 빗대어 중앙일보 취재를 반대한 것으로 직감하였다. 난감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사실을 정재숙 기자에게 전하였다. “국방부에서는 중앙일보의 취재를 불허한답니다.” 그러자 정 기자는 “그러면 들어갔다 나오면 몇 시쯤 됩니까?”, “나오면 오후 1시가 넘을 겁니다.”, “나오는 대로 확실한지 전화해 줄 수 있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28, 29일, 한반도에 1991년에 불어온 가장 강력한 태풍 미레이유는 한반도를 통과하였다. 태풍이 물러가 잠잠한 30일, 이동식 기자는 한상덕 기자와 카메라 팀을 내보냈고, 이렇게 해서 KBS 9시 뉴스에 허준 묘 발견은 보도되었다.

30일 KBS 문화부의 취재 녹화를 마치고, 리비교를 건너 나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공중전화로 달려가 약속한 대로 정재숙 기자에게 전화하였다. “허준 묘가 맞습니다. 비석이 나왔습니다.” 수화기(受話器) 너머에서는 정재숙 기자의 통쾌하고 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자 중앙일보에 이 선생의 인터뷰 기사로 이미 보도했습니다.”

이리하여 30일 저녁 9시 KBS 뉴스에 나오기 전에 오전 11시에 기사가 마감되는 석간신문 중앙일보에 제일 먼저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중앙일보 정재숙 기자는 상당히 용감한 언론인이다. 문화에 이토록 열성이었으니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것이다.

7. 기념사업회 문종화 회장의 무리수와 소설가 이은성

1991년 9월 30일, 당시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직원 2인은 현장에서 비석이 나오면 탁본을 뜨려고 먹물과 종이를 가지고 왔다. 그들도 KBS의 이동식 기자나 중앙일보의 정재숙 기자에 이어 허준 묘소의 발견하였다는 나의 말을 신뢰한 것이다.

그날 그들은 묘소가 발견된 이후 처음으로 두 점의 탁본을 떴고 그 한 점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날 비신(碑身)에서 떨어져 나온 다섯 개의 조각은 문종화가 보관하겠다고 임의로 가져갔다. 그러나 탁본에는 그 부분도 그대로 담겨있는데, 문종화와 허준선생기념사업회는 그 비문 조각을 찾아서 파주시에 반환할 의무가 있다.

30일 허준 묘소를 찾기 위하여 임진강 리비교를 건너는 날, 문종화 씨는 느닷없이 자신의 친척으로 지리학자라는 모 씨와 지인을 몇 사람 데리고 왔다. 취재진은 거절하더니 웬일인가 싶었는데, 문종화 씨는 1992년 5월 23일 허준선생기념사업회 창립총회를 하면서 5~6명에게 제1회 허준의학상을 수여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 9월 30일 이전에 허준 묘를 찾아 나선 사람은 나 한 사람이었으나, 제1회 허준의학상에는 지리학자라는 모 씨와 허준이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고 조작한 서울시사편찬위원회의 강훈덕씨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스운 노릇이었다.

내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1년에 9월 27일 날 허준의 폐허가 된 묘소를 경기도 민통선 건너 파주에서 찾아내기까지 이 사업을 그나마 협조한 사람은 장단지주회장 김병집 씨와 인근 임야의 지주 정재환 씨 두 분 뿐이다.

만약 정재숙 기자가 9월 30일 자 중앙일보에 허준 묘 발견 기사를 쓰지 않았다면, 그리고 KBS가 발견 현장을 취재하지 않았다면 나의 헌신적 노력은 잊혀질 뻔했다. 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문종화 씨는 나를 기념사업회 부회장으로 선임하였으나, 그는 지속해서 허준 묘 찾은 것을 자신과 주변인들의 노력으로 선전하여 나갔다.

또한 내가 기념사업회 발기 때부터 “허준을 한의사가 아니라 과학자로 기려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이, 허준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특화하려는 그들의 의도에 제동을 건 것이 되므로 나를 배척하였고, 결국 나는 기념사업회와 결별하였다.

문화재관리국이나 경기도에서는 문종화 씨의 이러한 무리수를 둔 사실을 알았는지, 허준 묘 설명문에 ‘재미 고문서연구가 이양재 등’이 발견한 것으로 내 이름을 먼저 기록해 밝혀 놓았다.

지난 제19회 연재에서 언급하였듯이 내가 1988년 5월 26일자로 미국으로 출국 이민한 것은 허준 선생의 후손과 연락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였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고, 귀국하였을 때는 이미 미국 영주권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1991년 묘소를 찾은 이후 한국을 포함하여 플로리다와 LA, 북경 등등 국내외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15년간 제주시에 정착하고 있다.

나는 나의 부모 형제와는 달리 한국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단군의 자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허준을 홍익인간의 구현자로서 보고, 그를 우리 시대를 위한 역사 인물로 찾았고, 이제 제대로 된 그의 선양을 주창한다.

허준 신드롬이 생겨난 것은 이은성이란 방송작가이자 소설가가 지은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동의보감』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데 있다. 그러나 내가 허준을 주목한 것은 소설가 이은성보다 앞섰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여러 애서가가 발기하여 1990년 2월 24일 창립한 ‘한국애서가클럽’의 제2회 월례 발표회(1990년) ‘『동의보감』과 이은성’에서 소설가 이은성의 친구 이진섭(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씨가 『소설 동의보감』을 창비에서 출판하게 된 내력과 그에 대한 회고를 토로하게 한 바 있다.

『소설 동의보감』의 줄거리를 두고 저자와 이진섭씨는 상당한 막후 토론이 있었다. 이 일은 허준 묘를 찾아내기 1년 전의 일로서 내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한국애서가클럽’의 총무이사로 있던 때의 일이다.

8. 허준 사업을 둘러싼 문제점

『동의보감』 침구편, 1613년 초판본, 을해자체훈련도감목활자.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의보감』 침구편, 1613년 초판본, 을해자체훈련도감목활자.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2000년에 창립한 ‘한국고전문화진흥회’의 제1회 학술발표회는 필자가 “동의보감과 허준”을 주제로 하였다. 1991년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아낸 지 9년이 지난 후이다. 이 학술발표회에서 9년여간 틈틈이 탐색하여 온 허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달이 지난 가을에 파주문화원에서 “[파주문화] 제14호를 내야 하는데, 허준 선생에 관한 글을 써 줄 수 있습니까?”하는 연락을 받고, 나는 제1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것을 보내주었다. [파주문화] 제14호는 2000년 12월 30일자로 발행되었고, 그 책의 42쪽에서 61쪽까지 『<東醫寶鑑>과 龜巖 許浚』으로 게재되었다.

과학사학자 신동원 박사는 [조선사람 허준](2001년, 한겨레신문사 발행)을 저술하기 전에 필자를 찾아온 적이 있다. 신동원 박사는 허준에 대한 나의 이론을 지지하였다. 나는 신 박사에게 “내 이론이 옳다면, 나만의 것이 아니다. 당신 것으로 해야 학계의 정설이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강서구는 지속해서 가양동이 허준의 고향이며 유배지이고 사망지라고 헛소리 삼박자를 제창하여 왔다. 또한 경상남도 산청군과 밀양시에서는 [소설 동의보감]에 의거하여 허준에 대한 추모사업을 하고 있다.

어디서든 허준을 기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진실만은 인정하고 하여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추모사업의 근거가 된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은 완전 허구의 소설이다. 기막힌 사실은 이런 허구를 정확한 사료에 근거한 것으로 오인하고 허준을 연구한 사람도 있다.

한편, 최근 언젠가 국내 보도에 ‘북한의 문학가 현영철과 최흥록이 공저하여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사화 『동의보감』을 내놓았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2018년에 평양출판사에서 발행한 507쪽에 달하는 책이다. 그 책은 어떤 내용인지, 입수하려 했으나 아직 입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장편소설이 어떠한 내용이든 그 책을 통하여 북한에서도 허준 열기가 일어나기를 갈망한다. 허준은 한 부류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허준은 우리 민족이 배출한,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인류사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9. 허준 사업에 대하여

나는 정확한 기억의 재확인을 위하여 오늘 오후에 등기소에 가서 하포리 산128, 산129, 산130의 등기부등본을 떼었다. 산130번지는 묘소를 찾는데 도움을 준 정재환(1913년생) 씨의 소유였으나 현재는 그의 상속자 정석호(1943년생) 씨의 소유이다.

허준의 묘소가 있는 산129와 산128은 현재 국방부의 소유이다. 국방부는 1985년 11월 15일 정억(鄭億)으로부터 매입하였는데, 문제는 국방부에 매도한 정억이란 사람이다. 그는 국방부를 상대로 사기를 친 셈이다.

나는 허준의 묘소를 찾은 후에 그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후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겠다. 정억은 산129와 산128을 1981년 12월 14일 소유권보존등기를 하였는데, 그는 이 땅의 원소유자 허형욱(許亨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지난 회 연재에서 언급하였듯이 “파주의 민통선 지역은 재산 분쟁의 가능성으로 모든 기록에 접근하는 것은 차단되어 있었다”라는 것이다. 바로 산129번지와 산128번지가 그런 땅이다. 나는 파주시의 구 토지대장을 열람하고 싶다. 허준 선생 후손의 땅은 상당히 더 있을 것인데, 그것을 모두 확인하고 싶다. 파주시는 이를 허용해 달라.

허준을 기리고 선양하는 것으로서 파주시는 세계적인 명소가 될 수 있다. 어느 한 개인이 허준을 독점하려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한 번도 허준이라는 이름을 사적으로 이용하지 않았다. 나를 빼놓고 하는 모든 사업이 잘되기를 멀리서 침묵 속에 지켜보았다.

그러나 지금 보면 허준을 기리겠다는 모두가 사욕을 앞세우고 있다. 사욕을 앞세워도 제대로만 하면 좋다. 많은 사람이 허준의 이름을 헛되이 쓰고 있고, 그의 실체를 왜곡하고 있다. 허준 문화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생각해 보면 허준이 만든 문화는 없다.

그는 의학자이자 약학자이며 병리학자로서 위대한 과학자일 뿐이다. 다만 허준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단군 민족의 홍익인간이다.

10. 맺음말

오늘, 2023년 7월 20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파주시민회관 소강당에서 허준학술대회가 있다. 나는 2021년에 이어 오늘 다시금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파주시에서 제대로 된 허준 사업의 기틀을 잡기를 바랍니다. 진지하고 허심탄회하게 육하원칙(六何原則)에 따라 생각해 봅시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어떵게(How), 왜(Why) 할 것인가? 이러한 육하원칙에서 많은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 육하원칙에서 언제를 지금으로 채워야 합니다. 지금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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