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개화기의 조선과 대한제국에 진출한 서구(西歐)의 인물들은 크게 다섯 부류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 부류는 개신교 계열과 천주교 계열의 선교사이고. 둘째 부류는 우리나라에 주재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이며, 셋째 부류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상인이나 기술자이고, 넷째 부류가 언론인이며, 다섯째 부류가 군인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서구인의 대부분은 그들의 가족일 것이다.

지난 회에서 다룬 알렌은 선교사이자 의사였으며, 차츰 외교관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왕비의 총애를 입은 알렌은 우리나라를 존중하거나 사랑한 인물이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추구한 직업 외교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알렌은 1884년에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지만, 한국의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교회사(敎會史) 사가(史家)들은 그를 선교사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교회사 사가들은 1885년 4월 5일 날 조선에 들어 온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를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운산금광 때문에 조선과 대한제국에서의 알렌이 추구한 미국의 이익 활동을 은폐시키고 싶은 욕구가 기독교 사가들에게는 잠재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9.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스크랜턴, 게일, 그리고 헐버트

조선에 들어온 많은 선교사 가운데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1916)나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우리나라 근-현대 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연세대학교를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웠다.

특히 언더우드의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타자기 생산 기업을 세운 인물인데, 그는 1917년 거액을 연희전문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신촌에 드넓은 교지(20만평)를 매입하여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모체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언더우드와 게일(Gale, James Scarth. 1863~1937) 등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그들은 정치적인 일에 연루되지 않고 선교와 목회에 치중하였다.

특히 언더우드 집안의 사대(四代)는 1885년 이래 지난 130여 년간 대를 물리며 우리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진실로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람한 사람들이다. 즉 ①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이래, 그의 아들 ②호러스 호톤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Horton. 원한경, 1890~1951), 그의 손자인 ③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Underwood Jr., Horace Grant. 원일한, 1917~2004), 증손자인 ④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Underwood Jr., Horace Horton. 원한광, 1943~ )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공헌한 미국인은 조선의 불행을 자신의 돈벌이에 이용한, 실패한 직업적인 로비스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박사가 아니라 선교사이자 교육자인 이들 언더우드 가문의 사대에 걸친 인물들이다. 진실로 그들은 존중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최근에 헐버트 박사를 추모한다는 일각에서는 언더우드와 게일의 역사적 공적까지 상당수 가로채어져 증폭 홍보하고 있다. 매우 한심한 노릇이다.

10. 이준 열사의 ‘한미공수동맹’ 기도(企圖)와 대한제국 황제의 친미 짝사랑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유학자이지만, 초기에 개신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의 개종 시기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895년경 법관양성소 재학 시절에, 인근의 정동교회(감리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01년 스크랜턴이 설립한 상동교회와 게일의 연동교회(장로교)를 기반으로 활동을 한다. 이준 열사의 상동교회 활동은 을사늑약을 반대한 항일운동으로, 연동교회 활동은 국민교육회의 교육운동으로 집약된다. 이준 열사가 헤이그로 떠나기 전 그는 친 서방주의자였는데, 특히 친미 성향이 강했다.

1905년 9월 19일,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재임 기간 1901~1909년)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는 증기선 만추리아호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다. 당시 고종황제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라면 공주”라고 생각하고 엘리스를 공주로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당시 황실 악단이 미국 군가를 연주하면서 열렬히 환영했고, 엘리스는 화려한 황실 가마를 타고 입궁해 덕수궁 안에 있던 대한제국 최고급 숙소 돈덕전에 묵었다.

당시 고종황제가 엘리스를 환대한 것은 절박한 상황 때문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방파제인 러시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한제국은 미국이 일본의 침략을 막아줄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판단은 당시 계몽운동가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이준 열사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의 방한을 기회로 이용하여 이들을 접촉하여 ‘한미공수동맹’을 제창(提唱)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만날 수 없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은 “타국의 위협에 서로 힘을 합쳐 대응한다”라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바 있다. 따라서 고종황제는 미국이 일본을 견제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이유로 고종황제는 제물포에서 특별열차로 엘리스를 서울로 오게 했고, 황실 가마를 제공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최고의 예우를 갖춘 환대하였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통틀어 여성을 국빈으로 맞은 최초 최고 최대의 예우였다.

[한성주재일본공사가 동경의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 제191호] 보고서, 1905년 9월 25일 자. [사진 제공 – 이양재]
[한성주재일본공사가 동경의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 제191호] 보고서, 1905년 9월 25일 자. [사진 제공 – 이양재]

심지어, 1905년 9월 25일 자 한성주재일본공사가 동경의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기밀 제191호 보고서 [宮中ノ內容及其整理ニ關スル意見上申(궁중 내용 및 그 정리에 관한 의견 上申)]에 의하면 “(중략) 황제를 비롯한 일파의 정치가는(소위 미국파) 이번 일·러 전권위원의 회합이 미국의 중재에 기인하여 미국을 믿고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혼미한 생각을 하고 때마침 이번 루스벨트 양(孃)의 내한을 기화로 하여 국빈의 예우로서 전력을 다해 맞이하여 그 환심을 얻기에 급급한 상태인 동시에 동 일행은 궁중의 선물 같은 것이 대단히 고액에 이르고 그 중 순비(淳妃) 때문에 민간의 자산가로부터 3만 원(圓) 이상의 부채를 내고자 하고 그 태반은 차입한 흔적이 있음.(중략)”이라고까지 보고하고 있다.

즉. 당시 고종황제는 민간에서 돈을 빌려서까지 막대한 경비를 들여 엘리스를 위해 궁중에서 초청 연회를 베풀고 명성황후 능인 홍릉에서도 연회를 베풀게 한 것이다. 황제의 그 의도는 일본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죽음을 엘리스가 알게 해서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Le Petit Parisien], 1905년 10월 8일 자,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표지 그림이 고종황제가 보낸 궁중 가마를 타고 수표교 위를 지나가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를 그린 것이다. 호위(護衛)가 원수급으로 매우 삼엄하다.
[Le Petit Parisien], 1905년 10월 8일 자, 필자 소장품. [사진 제공 – 이양재]  표지 그림이 고종황제가 보낸 궁중 가마를 타고 수표교 위를 지나가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를 그린 것이다. 호위(護衛)가 원수급으로 매우 삼엄하다.

그러나 그날 엘리스는 승마복을 입은 채 말을 타고 홍릉에 등장했다. 다른 나라 왕비가 묻힌 곳을 연회복도 아닌 승마복을 입고 나타났다는 것은 엄청나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또한 엘리스는 홍릉의 석마(石馬)와 석양(石羊)에 올라타고 장난을 치며 황실을 욕보였고, 남자친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를 쳤다. 엘리스 루스벨트의 대한제국 방문은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엥’(Le Petit Parisien., 1905년 10월 8일)에 보도되었다.

엘리스가 이처럼 대한제국 황실을 깔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엘리스 순방단이 일본을 먼저 방문했고, 일본 방문 당시의 수상이었던 가쓰라 타로와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밀약을 알고 있는 엘리스 일행은 고종황제에게 냉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대한제국을 깔보며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다.

결국 엘리스 일행이 떠난 후 일본은 고종 황제를 압박해서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는다. 그런데도 이준 열사 등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까지 미국의 선(善)한 의지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헐버트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중인 헤이그에 스쳐 지나가며 대한제국의 특사를 아무도 만나지도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면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므로 당시 이준 열사를 위시한 헤이그 세 특사는 미국인 헐버트를 믿을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고, 그 한탄 끝에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자정순국(自靖殉國)하였다. 이준 열사의 최대 실수는 미국과 러시아, 네덜란드 등 서구열강의 침략 의지를 간과하고 선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11. 미국과 영국의 프리메이슨

필자는 <통일뉴스>에 ‘[연재]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을 연재하면서 그 2회에 “프리메이슨단과 『한국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열 지파』”를 기고한 바 있다.

그 기고에서 “1901년부터 1909년까지의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인데 그는 프리메이슨단 단원(團員, 회원, Freemason)이며, 1909부터 1913까지의 미국 대통령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태프트’이고, 그 역시 프리메이슨이다. 즉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와 근대해산, 1910년 국권피탈의 시기의 미국 대통령은 모두 미국의 프리메이슨이었다.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과 프리메이슨단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프리메이슨단의 일본 내 재산을 압류하며 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런데도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망한 이후 일본 점령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의 프리메이슨단 그랜드 롯지를 부활시켜 활성화하며,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일본을 다시금 동북아 방어 및 진출의 거점으로 삼는다. 트루먼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의 미국 대통령이었는데 그가 대통령을 하던 1945년 한반도는 분할되고, 1948년에는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수립되며,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물론 ‘해리 트루먼’과 원자폭탄의 만주(滿洲) 사용을 두고 그와 맞섰던 더글러스 맥아더는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 이를 보면 프리메이슨이 미국 대통령일 때는 일본 중심의 동북아 정책을 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우리 민족은 근현대사에서 프리메이슨의 밥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사실 대한제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미국공사 알렌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철수하자, 그의 활동 공백을 메꾸기 위하여 1907년에 발기하고 1908년에 ‘한양롯지 1048’을 창설한 것이다. 1884년 조선에 처음 상륙한 개신교 선교사 알렌은 프리메이슨으로 유추되는데, 1885년 4월 5일 상륙한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은 1908년에 한양롯지 1048을 창설하는 주역이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선교사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프리메이슨이었고, 조선의 기독교는 미국 프리메이슨의 지휘하에 진출한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청교도의 주축은 프리메이슨인데, 그들의 기독교적인 강령(綱領)은 유태인의 선민의식과 백인우월주의의 인정, 그리고 미국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념 등등이다. 이것은 현재까지 한국 개신교에 그대로 남아있다.

12. 맺음말 ; 미국과의 동맹은 변화되어야 한다

미국과 조선의 접촉 첫 번째 시기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이에 이은 신미양요의 시기로서, 미국의 침략과 조선의 방어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외교관계의 수립에 이은 기독교의 전래를 기회 삼아 운산금광이나 정부 허가권 사업의 특혜를 요구한 것이다. 만약 조선이 운산금광을 미국에 내주지 않고 직접 개발 운영하였다면 대한제국시 일본에 막대한 국채를 지게 되었을까? 고종이 왕실만의 이익에 매달려 대한제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니 관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나라를 일본에 넘겨 팔아 버린 것이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정부가 잘못한 것을 민간에 해결하려 자발적으로 나선 민중의 자발적 운동이다.

세 번째 시기는 을사늑약 이후에서부터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기까지의 조선에서의 일본의 점령을 인정한 한성(경성)주재 미국영사관이 있던 시기이고,

네 번째 시기는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 이후 1949년 6월 30일(미군 철수 완료일)까지의 시기이며,

다섯 번째 시기는 1950년 한국전쟁 참전이후 현재까지의 시기이다. 미국은 우리 근대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기면서 일본의 조선 강점을 가장 먼저 인정한, 조선을 가장 먼저 배신한 서구 국가이며, 결국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운영하고 우리 민족을 학살하도록 불행에 밀어 넣은 국가이다.

현재의 한국인들은 미국에 대한 많은 환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 맨 앞에 개신교 교단이 있으며, 미국 유학파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도 일본과 미국이 하는 행동을 보면 1905년에 비밀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유효한 것 같다.

필자는 언더우드 가문 사대(四代)를 제외한 미국의 어떠한 인물도 한국의 독립과 번영을 도운 인물로 인정할 수가 없다. 헐버트는 언더우드에 비하면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는 대한제국에서 막대한 로비자금만을 챙긴 실패할 것이 뻔했던 직업적 로비스트이다. 고종황제의 친서를 서구 열강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전달하지를 못했다. 그러면서도 친미주의자 이승만에 의하여 건국 공로 훈장을 받았다.

진실로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미국인이 있다면 그는 언더우드 가문의 사대에 걸친 인물들이다. 언더우드 가문의 사대는 근대사는 물론이고 현대사에서도 항시 우리나라와 우리 민중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언더우드 가문 사대가 한국인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는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대한제국에서는 대한제국의 편에 선 것처럼 말하고, 서구에서는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대단한 권한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 입술 서비스에 능한 인물에 불과하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 목사의 행적을 주목하고 연구하면 침소봉대된 헐버트 박사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질 것이다.

미국 도착 후 보빙사 일행, 1883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
미국 도착 후 보빙사 일행, 1883년. [사진 제공 – 이양재]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

필자는 친미주의자이다. 그러므로 지금 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이 1883년 미국에 파견하였던 첫 번째 보빙사 일행들부터 친미적 사고에 물들어 왔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당시의 계몽가들은 친미의존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이익을 위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김으로써 끝내 대한제국을 배신하였다.

한국에서 반미가 확산한 것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진압 이후이다. 광주민주화운동 학살진압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짐으로써 제주 4.3과 한국전쟁시의 여러 학살사건이 한국의 여러 사학자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현재 한국의 사학계와 민족주의자들은 지금 반미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불평등 한미소파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의 개정과 국가 간의 평등을 이야기한다. 미국은 한국을 동맹이라 이야기하면서 일본 밑에 두고 있다. 그리고 알렌이 대한제국시기에 하였던 경제 및 산업 특혜를 강요하고 있다.

동맹은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미국과 한국의 동맹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 변화의 요구를 반미로 몰아붙이는 것은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동북아에서 반미의 뿌리는 일본에 있다. 미국을 미국(米國)이라 한 것은 일본이며, 한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부터 마국을 미국(美國)이라 표기하였다. 미국이 한국 민중을 외면하고 적대시하면 미국 스스로가 반미를 키우는 것이 된다. 미국의 두 개의 한반도 정책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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