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에서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가 국가나 왕조 혹은 정권 계승을 두고 나타나는 정통론 문제다. 이것은 기존의 국가가 가졌던 정당성을 어느 국가가 계승 또는 유지하는지에 대한 집단의 정당성 문제와 직결된다.

정통론은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공자의 『춘추(春秋)』에 등장하는 ‘대일통(大日統)’이라는 말이 그 핵심이다. ‘대일통’이란 한 시대에 두 개 이상의 왕조가 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직 천하에는 하나의 정통만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특히 남송시대에 와서 주자(朱子)의 성리학과 맞물리며 한족(漢族) 중심의 역사인식으로 더욱 견고해졌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은 유교 도덕의 표준을 실증하는 주자학파의 기본적인 교과서로서,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역사인식에도 그대로 이식되었다.

우리 역사 속에서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도 성리학적 정통론에 기반한 역사인식이다.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부르는 이 이론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하였다. 한마디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삼한(그 중에서도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당시 성리학적 역사인식 속에서의 단군은 형식적·혈연적 시조로 치부되었다. 기자야말로 주무왕의 봉(封)함을 받았기에 조선의 진정한 정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 기자왕조를 무너뜨린 위만은 당연히 찬탈자이자 이단아가 된다. 그러므로 기씨조선의 마지막 기준왕(箕準王)이 쫓겨 삼한으로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에 마한정통론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삼한정통론의 맹아는 17세기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에서 찾을 수 있다. 『동국통감제강』은 『동국통감』의 고대사 부분을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에 깔려있는 강목법(綱目法)에 따라 고쳐 쓴 것이다. 홍여하는 그 시대 구분을 조선·삼국·신라의 크게 세 시기로 나누고, 조선 부분을 다시 기자와 마한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단군과 위만조선은 기자 밑에 부기(附記)하고, 진한과 변한은 마한 밑에 부기하였다. 기자를 정통으로 본 삼한정통론의 전형적 인식이다.

이것을 보다 노골화시킨 인물이 이익(李瀷)이다. 그는 「삼한정통론」이라는 글 속에서 위만이 나라를 합당하게 계승하지 않고 찬탈하였으므로 정당한 계승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통은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 삼한(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논리는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편 이런 전통적 시각과는 다른 안목이 근대에 들어 고개를 들었다. 부여(扶餘)를 정통으로 보려는 역사인식이다. 구태여 명명하자면 ‘부여정통론’이다. 부여정통론이란 우리 고대사의 흐름이 단군조선에서 ‘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계통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부여정통론이란 말은 학술용어가 아님을 전제해 둔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대종교 중광(重光)의 계기를 만들어준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1904년)에 이미 언급되고 있다. 즉 “본교(本敎)의 한줄기 광명이 대황조님을 숭봉하는 본류 중 한 지파의 혈통을 이은 후손인 부여 집안에 귀하게 전해져 고구려가 새로 일어날 때…”라는 구절에서 암시받을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는 『독사신론(讀史新論)』(1908년)에서 부여족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북방 기마민족이 한민족의 주족(主族)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또한 중국을 연원으로 하는 기자조선이 우리의 고조선이 아니라는 견해도 펼쳤다. 그리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1931년)에 와서는 기존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부정하고, 단군의 전통이 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되는 것이 고대사의 흐름이라고 단정하였다.

1911년 대종교의 ‘단조사고편찬위원회’에서 엮은 『단조사고(檀祖事攷)』「배달족원류단군혈통(倍達族源流檀君血統)」에서는 더욱 분명해진다. ‘배달→북부여→동부여→고구려→발해→여진→금→청‘과 ‘배달→북부여→선비→거란→요→발해→여진→금→청‘, 그리고 ’배달→북부여→백제→고려→조선‘의 흐름으로 파악하여, 우리 남북조(南北朝) 원류로서의 부여를 부각시키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기자에 대한 인식이다. 성리학적 역사인식에서 삼한정통론의 준거가 되는 기자가 「배달족원류단군혈통」에서는 주변인으로 취급되고 있다. 기자가 완전한 배달족이 아닌 반배달족(半倍達族)으로 인식되고 있음이 그것이다. 기자와 삼한(마한)을 적통선(嫡統線)으로 하는 삼한정통론과는 천양지차다.

1914년 김교헌(金敎獻)이 저술한 『신단실기(神檀實記)』(석판본)와 『신단민사(神檀民史)』(프린트본) 그리고 『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1922년)에서도 부여 중심의 역사인식은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 『신단실기』「단군세기」부분에서는 배달나라[檀國] 다음으로 부여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부여라는 명칭의 유래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부여의 조상은 단군에서 나왔는데 북쪽으로 옮겨 가서 북부여국을 이루었다. 해(解)를 성(性)으로 삼았다. 단군이 둘째 아들에게 남은 땅을 봉(封)해주니, 이로 인하여 후세에서는 ‘부여(扶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식은 가치관과 대동소이하다. 중국의 성리학적 질서에서 보면 주무왕의 봉함을 받은 기자가 중심이나, 우리의 신교적(神敎的)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시조 단군이 주인공이 된다. 손님과 주인의 시각 차이다. 잘못된 인식이 자칫 왜곡된 역사로 치달을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삼한정통론은 중화사관의 얼개와 뗄 수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 반면 부여정통론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역사학 형성에 많은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특히 항일투쟁의 중요한 동력으로도 부여정통론이 작용하고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1922년 10월 정신(鄭信)을 비롯한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계열의 항일투사들은 현천묵(玄天默)을 중심으로 영안현(寧安縣) 대종교교당에 모여 군정서 재건을 위한 새로운 활동 계획을 모색하였다. 당시 참여한 중심인물들을 보면 현천묵·정신 외에도 이홍래(李鴻來)·현갑(玄甲)·김혁(金赫)·유정근(兪政根)·김좌진(金佐鎭)·이중실(李仲實)·민해양(閔海陽)·현준(玄俊)·이단(李檀)·허규(許奎)·최완(崔玩) 등 대종교지도급에 있는 항일투사들이 모두 동참하였다.

이 모임은 흩어진 독립진영의 재구축을 위해 대종교단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기 대종교 교주였던 김교헌(金敎獻) 역시 이 집회의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의식 고취를 위해 역사서 재편찬을 도모한다. 이 역사서가 1923년 상해에서 활자본으로 재출간된 『신단민사』다.

부여정통론과 연관하여 대종교의 소부계(蘇扶契)라는 조직도 흥미를 끈다. 이 조직은 1923년 영안현 대종교총본사 내에서 발기한 자치조직으로, 현천극(玄天極)을 비롯하여 나병수(羅秉洙)·허옥·김근우(金瑾禹)·이종수(李鍾琇)·김연원(金演元)·최충호(崔忠浩)·김영선(金榮璿)·민윤식(閔胤植)·권목(權穆)·이곤(李坤)·원무의(元武儀)·김영숙(金永肅) 등, 대종교 항일투사 13인이 발기한 것이다.

소부(蘇扶)란 부여(扶餘)와 동일한 이름으로, 부여정통론의 역사인식을 통해 부여민족의 중흥을 내세웠던 대종교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명칭이다. 소부계의 주요 목적은 대종교 교우 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교인 경조사의 상부상조와 대종교 발전에 협찬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항일투쟁이었다. 또한 각시교당에 조직케 하고 회의는 매년 어천절(御天節)과 개천절(開天節)에 개최하도록 하였다.

대종교계 항일단체인 신민부(新民府)의 결성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925년 1월, 북만주 지역의 대종교계 항일투사들이 목릉현(穆陵縣)에 모여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 후일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신민부다. 신민부는 대한군정서를 계승한 단체로서, 그 주요 구성원의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 신민부는 부여정통론의 역사인식을 토대로, 기본철학 역시 대종교의 중광이념과 맞닿아 있었으며 그 궁극적인 목적 역시 홍익인간의 실현이었다.

인간은 나를 자각할 때 진정한 의기가 생긴다. 그것이 우리로 뭉쳐질 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역사인식의 동력화다.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사를 재구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무력투쟁을 비롯한 총체적 저항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부여정통론이라는 역사인식이 그 동력분출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재음미해 볼 때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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