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대한제국을 염탐하다

임진왜란 직전에 왜(倭)는 많은 밀정을 조선에 잠입시켜 조선팔도를 조사하고 지도까지 그려갔다. 조선 침략에 앞서 사전준비를 한 것이다.

이러한 정탐 행위는 조선후기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1875년 9월 20일 발생한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 정부의 동태를 살피다가 조선 수비대에 발각되어 전투를 벌인 사건으로, 이 사건은 근대 일본이 조선을 정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후 일본은 강화도조약(1876년)과 갑신정변(1884년)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며, 청일전쟁(1894년)과 노일전쟁(1904~5년)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대한제국에 대한 점령 야욕을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비밀 협약을 맺음으로써 공인받았다.

그리고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다.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어떠한 이해를 하고 있었는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대한제국 시기 일본에서는 조선과 관련한 여러 책이 나왔다. 그 가운데 몇 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많은 참고가 되는 책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선(一線)의 일제 헌병대가 만들어 병사들에게 조선의 이해를 돕도록한 한 책이 있다. 바로 [한국사회략설]이다.

2. [한국사회략설]

[한국사회략설] 표지, 1910년 6월,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발행, 1책.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하기 위하여 일제 헌병대가 만든 책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한국사회략설] 표지, 1910년 6월,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발행, 1책.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하기 위하여 일제 헌병대가 만든 책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는 2011년 3월에 [한국사회략설(韓國社會略說)]이란 책을 경매에서 구입하였다. 이 책은 1910년(明治43) 6월,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韓國駐箚憲兵隊司令部)’가 편저한 한반도 침략의 지침서로서 책의 크기는 23.7×15.7cm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책은 조선통감부 산하의 일반 행정당국이 아니고 대한제국에 주재하는 일본의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韓國駐箚憲兵隊司令部)’에서 저술한 책이란 점이다.

이 책 서두의 범례(凡例)를 살펴보면, 이 책은 조선 고래(古來)의 사회조직 및 풍속 습관 등을 망라하여 헌병직무를 돕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헌병대사령부에 근무하는 조선인 장교가 제공한 자료에 의거하여 다소 증보한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아 일반 조선인에 대한 개도적(開導的)인 교양 도서라기보다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군부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행정참고서용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조선 강점 후인 1912년에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에서는 [조선사회고(朝鮮社會考)]라는 제목으로 증보판을 발행한다.

그런데 이 책의 28장 뒷면에는 1909년 1월 15일 중광(重光)한 단군교를 주목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의 발행 시점 1910년 6월이면, 단군교가 조직된 지 1년이 좀 넘는 시점인데, 이는 당시에 이미 일본 헌병대에서는 단군교를 주시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3.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李址鎔, 1870~?)과 일본공사 하야 때(林權助)에 의해 조인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는 사실상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이다. 이 협약 제4조에 의해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주병권(駐兵權)⸱용병권(用兵權)은 물론, 군략상 필요한 지점에서의 점령⸱수용권(收用權)까지를 확보하였다. 협약의 유효성과 적법성에 문제가 있지만, 일제는 이 의정서에 따라 일제 침략군을 한반도 주둔시켰다.

협약 제4조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의 안녕 또는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제국정부는 우(右)의 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십분 편의를 제공할 것임. 일본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收用)할 수 있음.”

이 제4조를 근거로 해서 일본참모본부는 1904년 3월 10일 주차군사령부 및 예속부대의 편성을 명령하였고, 사령부 및 보병 6개 대대반 등을 예속부대로 한 한국주차군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한일의정서는 경성 일원과 대궐을 무력으로 포위한 상태에서 국왕 및 중신을 위박(威迫)하여 체결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주차군은 국제법상 어떠한 합법적 주둔근거도 발견되지 않는, 즉 침략군이다. 이 침략군 편제에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가 있었다.

그들, 즉 주차헌병은 치안경찰이 주된 직무였으나, 헌병 본래의 직분인 군사경찰을 겸하고 관장하였다. 그러므로 점령지의 치안경찰 업무를 위하여 침략군에게 대한제국의 일상을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그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1910년에 [한국사회략설]을 만든 것이다.

4. 단군교를 주목한다

[한국사회략설] 장28 뒷면, 단군교를 주목하고 있다. 1910년 6월,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발행, 1책. [사진 제공 – 이양재]
[한국사회략설] 장28 뒷면, 단군교를 주목하고 있다. 1910년 6월,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 발행, 1책.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책에는 1910년 6월 이전에 대한제국에 있던 여러 종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등‥‥‥,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책의 28장 뒷면에는 1909년 1월 15일 중광(重光)한 새로 조직된 ‘단군교(檀君敎)’를 주목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당시는 중광한지 1년 4개월이 조금 넘는데, 그러한 신생 단군교를 일제 헌병대가 주목한 것은 “단군교의 목적을 간파하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1910년 6월 당시, 단군교는 서울에 2,748명, 지방에 1만 8,791명의 교인을 확보하였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병하자 ‘대종교(大倧敎)’로 이름을 바꾼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나철(羅喆, 1863~1916)은 1914년 5월 백두산 북쪽 산밑에 있는 청파호(靑坡湖) 근방으로 총본사를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 확장에 주력하여 30만 명의 교인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대종교를 비롯한 민족종교의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여 탄압을 노골화하였고, 교단의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나철은 1916년 8월 15일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자결하였으며, 나철의 자결은 흔들리던 대종교 교인들의 독립 의지를 굳건히 한다.

5. 독립운동의 근거지 대종교

나철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된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은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긴 뒤 제2회 교의회(敎議會)를 소집하여 홍범규칙(弘範規則)을 공포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썼다.

또한 대종교가 주축이 되어 1919년 2월 독립운동지도자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작성해 발표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1920년 10월, 대부분의 대종교인으로 조직된 독립군은 백포종사(白圃宗師) 서일(徐一)의 지휘 아래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 등의 통솔을 받아 화룡현의 청산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1년 경신대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교도를 무차별 학살하였다.

당시 김교헌도 통분 끝에 병이 나서 1923년 단애종사(檀崖宗師) 윤세복(尹世復)에게 교통을 전수하고 사망하였다. 그 뒤 윤세복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귀국할 때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특히 1942년 11월 19일 윤세복 외 25명의 간부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구성’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윤세복은 무기형을 받았고, 10명의 간부 권상익(權相益)⸱이정(李楨)⸱안희제(安熙濟)⸱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銕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이재유(李在囿)는 고문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옥사하였다.

나철이 순국한지 꼭 29주년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고, 1946년 2월 환국하여 서울에 설치되었다. 미군정 때 대종교는 유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과 함께 5대 종단의 일원으로 등록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박사의 노력으로 천주교를 포함한 6대 종교 가운데 제1호 종단으로 등록하였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였다.

6. 맺음말

이름이 남아 전하는 대종교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매우 소수이다. 그러나 대종교보다 치열한 무장 독립투쟁을 한 종교는 없고, 그들보다 더 많은 순국자를 배출한 교단도 없다. 그 출발점에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이념 홍익인간은 단군 사화(史話)에 나오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대종교의 사회철학이다.

대종교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즉 일제에 가장 위협적인 민족 세력으로 확대될 것임을 일제는 대종교의 출범과 더불어 인지하였던 것 같다. 한국주차헌병대사령부에서 편저한 [한국사회략설]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대종교를 보호 육성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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