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낮에는 신발공장에서 밑창을 본드로 붙이는 일을 했다. 마포나루가 있는 한강둑 바로 아래 있는 집이었는데 여러 가구가 세들어 살았고 그 중 하나인 창고를 개조해서 공장으로 썼다. 사장과 공장장만이 성인 남자고 아주머니 둘과 남자 아이 둘이 있었다. 남자 아이는 황사장과 열 다섯 살짜리 소년이었다. 황사장은 그때 열두 살이었다. 그러므로 형뻘이었지만 대충 어영부영 반말하며 지냈다.

처음에 그 공장에 갔을 때 본드 냄새가 진동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 공장에서는 신발 밑창 붙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온갖 화학 물질로 만드는 제품의 부품을 다 만들었다. 가기 싫었지만 어렵게 사는 형의 형편을 생각하면 그냥 집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뛰쳐나가고 싶은 걸 참고 몇 달이 지난 뒤 이듬해 2월이 되었을 때 조카가 국민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황사장도 학교에 가고 싶었다.

황사장은 서울 올라오고 얼마 안 돼서 학교 갈 나이가 되었지만 형이 보내줄 생각을 하지 않았고, 황사장 본인도 별로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변두리라 해도 서울이라 그런지 대부분 학교에 들어갔다. 고향에서는 학교 안 다니는 형 누나들이 많았었다. 아니 더 많았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가도 몇 년씩 지나서야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 올라오니 제 나이에 대부분 학교에 들어갔다. 2부제나 3부제여서 오전에도 오후에도 함께 놀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나이의 애들이 4학년이 된 열한 살쯤 되었을 때 2부제는 없어지고 애들이 도시락을 싸가자 오후 늦게까지 같이 놀 애들이 없었다. 이때부터 황사장은 외로움이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학년 때와 달리 고학년이 되면서는 학교 다니는 애들과 이야깃거리도 달라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모들이 학교 안 다니는 애랑 놀지 말라고 압력을 넣어서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황사장은 이때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루저가 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공장을 다니게 되었고 조카가 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자 학교 가고 싶은 생각이 마구 밀려든 것이었다. 형수는 그냥 눈치만 보고 한숨을 쉬었는데 형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더란다. 야 이 눔아 이제 와서 무슨 공부여 착실히 일해서 돈 모을 생각이나 혀 이 말을 듣자 분한 마음이 들었다. 1년 가까이 일했지만 과자 사먹을 돈 이외에는 받은 적이 없었다. 그 돈이 사장 주머니에 있는지 아니면 형한테 갔는지 황사장은 알지 못했다.

돈도 못 받는데 무슨 돈을 모으라는 것이냐? 황사장은 차마 그런 말을 형한테 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학교 가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마침내 형이 황사장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나가 뒈지라는 심한 말까지 하였다. 아버지에 가까운 형이었지만 그 당시 다른 형들과는 달리 때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 날은 무엇 때문인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황사장을 마구 팼다. 황사장은 계속 맞기만 했다. 그러다가 형이 밖으로 나갔다.

형이 나갔다 들어온 것은 두세 시간 지난 뒤였다. 황사장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아마 형은 나가서 술을 마시고 온 것 같았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형이 갑자기 달려들어서 황사장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황사장은 그렇게 맞아도 울지 않고 있었는데 형이 울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형제는 한참 동안을 끌어 안고 울었다. 형수와 조카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며칠이 지난 뒤 형이 공민학교에 가라고 했다. 입학 절차를 형과 형수가 밟아 주었다. 황사장은 너무 기뻤다. 비록 공민학교지만 이제 학교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공민학교는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 운영하는 것이었다. 저녁 5시부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공립 야학인 셈이었다. 학생들도 다 나이가 많았다. 정규 과정에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그랬다. 마흔 살, 쉰 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공민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공장이 문제였다. 황사장이 다니던 공장은 6시에 끝나고, 10시까지 야근을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공민학교를 다니려면 4시 반에는 퇴근해야 했다. 일단 사장이 동의를 해주었는데 퇴근할 때마다 괜히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벗어나 학교를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이겨낼 수 있었다. 사장과 공장장도 처음에는 편하게 가라고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부러워하면서도 공부 잘 하고 오라고 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장과 공장장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일거리가 몰릴 때면 더욱 그랬다. 더욱 문제가 된 것은 학교에서 1시간 더 일찍 오라고 한 것이었다. 사실 공민학교에 가서 배우는 게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데 한글과 산수 기본적인 것만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시켰다. 저학년 교실 청소를 하라고 하는가 하면 건물 뒤에 잡풀 들이 나는 것을 뽑으라는 일도 시켰다.

솔직히 황사장은 공부에 그리 관심이 없었고 또래 친구들 만나는 게 좋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게 없어도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 신관이란 걸 신축하면서 공민학교 학생들을 1시간 일찍 나오라고 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잡일을 시킬 것이 너무도 분명했다. 사장과 공장장은 안 된다고 했다. 형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는데 황사장이 공민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하지 않자 결국 다른 공장으로 옮기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가방공장이었다. 거기에는 황사장 또래도 여럿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두 살 차이를 칼 같이 지키지는 않았다. 대충 서너 살까지는 친구로 지냈다. 공민학교 학생도 거기서 만났다. 3시 50분에 퇴근하기로 하고 거기 취직했다. 봉급은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아마 형한테 주는 것 같았다. 공민학교까지 보내주는 마당에 돈 이야기를 꺼내기는 그랬다. 그저 학교만 다니게 해주면 된다는 식으로 일했다.

3시 50분에 끝나면 막 뛰어서 학교로 가야 했다. 5시까지 갈 때는 초등학교 애들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1시간 앞당기자 아직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5-6학년 애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좀 창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헐레벌떡 가서 공사장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좀 기가 막혔다. 학생들의 불만도 점점 늘어났고, 그만두는 학생이 많이 생겼다. 가방공장에 같이 다니는 애도 그만두었다.

가방공장에서는 시다 일을 했는데 걸핏하면 주먹이 날아왔다. 심지어는 재단사나 미싱사가 일하다가 가위를 집어던지는 일도 있었다. 공민학교에 같이 다니던 애가 학교를 그만두더니 공장마저 그만두었다. 황사장은 3시 50분에 퇴근을 했는데 할 때마다 말을 들었다. 니가 무슨 공부를 하려고 하느냐는 비아냥도 숱하게 들었다. 학교 가기 직전에 많은 일감을 주어서 일어날 때 눈치가 보이게 만들었다. 결국 가방공장도 그만둬야 할 판이었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나오다 공민학교를 같이 다니던 애를 만났다. 같이 놀자고 해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담배도 같이 피우고 술도 마셨다. 물론 형과 형수의 눈치가 있어서 조금만 하였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냄새가 안 나도록 대단히 신경을 썼다. 그 애와 어울리면서 학교는 잘 안 나가게 되었다. 그 애는 구로동으로 가서 공장에 다닌다고 하였다. 자기와 같이 가자고 하였다. 형한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 애가 백화점에 가자고 하였다. 난생처음으로 화신 백화점이란 데를 가보았다. 거기서 장난삼아 몇 번 물건을 훔쳤다. 몇 차례 하다가 그만 잡히고 말았다. 경찰서로 끌려갔다. 절도가 분명했지만 어린 애들이 손수건 같은 것 몇 번 훔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법은 냉정했다. 아니 법이 냉정한 것보다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의 현실이 각박한 것이었다. 형사들의 몽둥이질이 쏟아졌다. 훔친 것들을 불라고 하였다.

황사장은 그때 만 12세였는데, 호적상으로 10세였다. 그러므로 형사미성년자였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했다. 형사들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몽둥이를 몇 번 들고 사정없이 후려치자 그만 있는 것 없는 것 다 이야기했다. 결과는 상습절도가 되고 말았다. 황사장은 형이나 형수가 알까 봐 끝까지 보호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형사들은 황사장은 풀어주고 친구는 구속시켰다. 알고 보니 그 애는 만 14세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절도범 일제 검거 기간이었다. 경찰에게는 실적이 필요했다. 그들은 황사장의 보호자가 누구이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황사장은 잡아넣을 수도 없었고, 그러니 실적이 되지도 않는다. 대신에 술술 불어 주어서 친구를 잡아넣을 수 있었다. 친구는 황사장이 불기 전까지 그날 현장에 있었던 일 이외에는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되지게 터지고 황사장의 진술을 듣고서 실토를 했나 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구치소에 있었을 때 옆방에 콜라 두 병 훔쳐서 들어온 애가 있었다. 성인들이 독방으로 쓰는 방이 있는 사동에서 한 평짜리 작은 독방에 소년수 다섯 명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라고 했는데 친구들과 콜라를 훔치다가 주인한테 걸렸다. 주인은 부모만 확인하고 그냥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형사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붙잡아 갔다. 다른 절도 사건으로 걸린 애가 다른 죄를 불라고 두들겨 패자 그만 이 애 일을 불고 만 것이었다.

이것도 일제 단속 기간이란 때 생긴 일이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너무나 놀라서 경찰서로 달려갔지만 엄연히 절도범이니 풀어줄 수 없다고 했단다. 가게 주인한테 가서 콜라값까지 주면서 경찰에 가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좀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주인도 황당하다는 생각에 같이 경찰서에 가 주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구속을 시켜 버렸다. 일제 단속 기간의 실적 때문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구속이 되고 유치장을 거쳐서 구치소까지 왔다. 콜라 두 병에 구속이란 건 정말 너무 심했다. 물론 며칠 구치소에 있다가 소년원으로 보내졌고, 아마 거기서 바로 풀려났을 것이다. 부모가 적극적으로 풀려나게 하려고 하는 경우이니 그리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일생에 잊지 못할 엄청난 정신적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교정도 아니고 일벌백계도 아니었다. 오로지 실적을 위해 한 아이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왔다. 형이 어디 갔었냐고 다그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사장이 입을 굳게 다물자 형도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공민학교도 그만두었고 가방공장도 더 다닐 수가 없었다. 한 달 정도 집에서 빈둥빈둥하다가 집 앞에 있는 기와공장에 나가게 되었다. 거기서도 능숙하게 기와를 만드는 어른의 시다 일을 하였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는데 어린 애가 자기밖에 없어서 따분했다. 일하는 어른들 심부름만 하는 것도 지겨웠다.

둘째 조카도 학교에 들어가고 자기만 이런 생활을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일 끝나면 자꾸 떠돌아다녔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세 편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 있었다. 극장에 가거나 그 근처에 있는 애들과 놀았다. 공민학교 다니면서 알던 친구도 있었고, 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애들도 있었다. 중 고등학교 다니거나 그만둔 형들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불량한 애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니 황사장 자신이 불량배가 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무리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여자들과 어울리다 첫사랑이라고 할 애가 생겼다. 황사장보다 한 살이 많았다. 물론 호적이 아니라 원래 나이로 그랬다. 야간 상업고등학교에 막 들어간 애였다. 홍혜경이라고 하였다. 얼굴이 예쁘장하였다. 당시에는 드물게 얼굴이 자그마했다. 인기가 좋았다. 동네 형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황사장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혜경이도 황사장한테 마음이 끌리는 듯하였다. 둘이 따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혜경이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교사들 중에서 6학년 담임은 상당히 수입이 괜찮았다. 혜경이 말로는 아버지가 늘 푸념하기를 남의 자식들은 일류 중학교 들여보내면서 자기 자식들은 똥통 학교에만 보낸다고 했단다. 오빠가 둘이 있고, 남동생 하나가 있는데 한결같이 공부를 못한단다. 사실 아버지는 과외를 하느라 정신이 없고, 엄마는 무엇 때문인지 집에 박혀 있는 적이 없단다.

그러던 어느 날 혜경이 아빠와 오빠 둘이 왔다. 한 사람은 육군 하사관이었고, 또 한 사람은 고등학생이었다. 셋이서 혜경이를 끌고 갔다. 가면서 그 아빠가 한 말이 황사장 기억에 오래오래 남았다. 니 엄마가 춤바람 나서 기가 막힌데 너까지 학교도 못 다닌 놈하고 붙어서 논단 말이냐? 혜경이 엄마가 캬바레 다니면서 춤바람이 났던 모양이었다. 아빠가 과외로 돈을 많이 벌어 오니 엄마는 그 돈으로 캬바레를 드나들었던 모양이었다.

가정주부들의 춤바람이 당시에는 꽤 사회문제가 되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바빠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물론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돈은 많이 생기고 시간은 부족했다. 집에 돈은 많이 갖다 주면서 가정은 소홀히 하니 사는 게 허전한 여자들이 생겼다. 그것을 노리는 제비족, 캬바레 등이 생겼다. 그러면서 춤바람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의 남편들은 거의 다 바람을 피우고 딴집살림을 했다. 여자만 춤바람이 났다는 것도 사실 왜곡이었다.

혜경이는 집에 끌려가서 머리를 깎이고 한동안 집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한참 뒤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어떻게 사는지를 듣지 못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나왔을 때 2절에 나오는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라는 구절이 가슴에 사무쳤다. 그 노래만 나오면 술을 찾게 되었다. 언제라도 한번은 보고 싶다가도 둘 다 늙은 모습을 보면 무엇 하리 하는 생각을 하면 그냥 가슴에 묻어두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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