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황사장이 신돌석씨에게 말을 놓은 것은 지지난 달이었다. 그 전에도 슬쩍슬쩍 놓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지 다시 올리곤 하다가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완전히 놓게 되었고, 그 뒤로는 다시 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신돌석씨보다 무려 여덟 살이나 많은 50년생 호랑이띠였다. 그런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자기보다 많은 줄은 알았지만 끽해야 두세 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사장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면도사 하나 데리고 운영하는 이발소 주인이었다. 황사장은 신돌석씨를 비롯한 손님들을 대부분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면 그 이발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사장인 셈이었다. 어린 시절 라디오 드라마 중에 ’몽땅 내 사랑‘이란 것이 있었다. 지금은 라디오에서 드라마를 거의 하지 않지만 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라디오 드라마가 꽤 인기가 있었다.

신돌석씨는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그 드라마를 듣는 것을 옆에서 들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다. 드라마의 주제곡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가수 현미 선생이 불렀다.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이렇게 시작이 된다. 1960년대에 경제개발이 시작되고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 많이 늘어나면서 사장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세태를 풍자한 듯하다.

이어지는 내용에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이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라는 내용이 있다. 처음에는 ‘사원’이 아니라 ‘식모’였다. 이것 역시 당시 세태를 반영한 듯하다. 농촌에서 도시로, 특히 서울로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면서, 특히 여자들 그 중에서도 젊거나 어린 여자들이 많이 올라오면서 이른바 식모라는 가정부, 요즘 표현으로는 가사도우미가 엄청나게 많았었다. 웬만큼 산다고 하는 집에서는 식모를 두고 살았다.

신돌석씨가 당시 주변에서 아는 경우는 대부분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에게 서울 올라간 딸을 맡기면서 식모를 하게 하였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식모를 두고 사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구하려고 시골의 지인들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네 외할머니댁도 함께 살던 가정부가 시집을 갈 때까지 계속 있었다. 그런 사람이 연이어 둘이나 되었다. 아마 20년은 될 것 같다. 교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정심이 누나도 고모네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에게는 대부분 밥 먹여 주고 재워주기만 하면서 용돈 정도 주었다. 요즘 말로 하면 열정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식모보다 더 흔한 것이 바로 사장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여론이 별로 안 좋았는지 사원으로 바꾸었다. 아무튼 그 정도로 사장이 흔해졌다는 것이었는데 진짜 사장은 별로 없었다. 사장이 되어 보자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었다. 경제개발과 함께 고도성장이 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사업이란 걸 하면서 사장이라고 하고 다녔다.

황사장은 어쨌든 자기가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면도사를 고용하고 있으므로 사장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기 노동으로 벌어먹고 살고 있으므로 노동자라고 볼 수도 있었다. 사장이면서 노동자, 이런 사람을 경제학에서는 소생산자라고 불렀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자영업자였다. 지금 황사장네 이발소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 진짜 사장도 있었다. 그리고 자영업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모두 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사장 행세를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사장님이라는 것이 중년 혹은 노년 남자를 부르는 데 편한 호칭이 되었다. 그들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러도 나는 사장 아니오 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장이 아닌데 그 말만 듣고 스스로 사장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서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편하니까 그러는 것이었다. 이제는 아저씨나 할아버지라는 말보다 사장님이 더 편하고, 상대에게 예의를 갖춘 호칭이 된 것이다.

신돌석씨가 황사장과 형 동생 하게 된 것은 이발을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린 시절 자란 곳이 비슷해서 소주 한 잔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황사장은 이발을 하면서 손님에게 이런 저런 말을 붙였다. 고향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래야 자신도 무료하지 않을 것이고, 손님도 심심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손님 중에는 단골이 많아서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성가시게 여기기도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도 이제 이 이발소의 단골이라면 단골이었다. 처음 온 것은 5년이 넘은 것 같고, 계속 오게 된 것도 3년이 넘은 것 같다. 하지만 한동안 황사장의 이야기가 귀찮게 여겨졌다. 그냥 조용히 이발하고 일어났으면 했는데 자꾸 말을 붙였다. 이 이발소는 신돌석씨네 동네는 아니었다. 걸어서 30분 가까이 와야 하는 곳이었다. 버스를 타도 걷는 것까지 10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도 굳이 이 이발소를 찾아오는 것은 코로나와 관계가 있었다.

신돌석씨는 직장 부근의 사우나에서 이발을 했었다. 언제부턴가 어느 이발소에 가느냐가 고민이 되었다. 아마 2000년대 이후에 생긴 일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인지도 몰랐다. 이발소라는 곳이 가기가 겁이 났다. 동네 부근이든 직장 부근이든 이발소는 거의 퇴폐 이발소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장원 혹은 새로운 형태의 이용업 체인점을 찾았는데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그런 데서 이발하면 영 보기 안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우나에 가게 되었다. 신돌석씨 동네에는 사우나가 없고 버스를 타고 나가야 사우나를 찾을 수 있었다. 직장 다닐 때는 일요일에나 갈 수 있었다. 그 사우나의 이발사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다. 척 보기에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이발사 자격증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격증을 받은 때가 60년대였다. 그러니 나이가 80이 다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나이 들면 노련해서 좋긴 하지만 또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발소를 찾게 되었다. 신돌석씨가 사는 동네에서 걸어서 30분 이내가 되는 곳을 찾았다. 신돌석씨 동네에 이발소가 둘이 있기는 했는데 직장 부근으로 다니느라 그냥 안 간 사이에 하나는 망해서 문을 닫았다. 또 하나가 있어서 가 봤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 영 싸가지가 없었다. 황사장처럼 이야기를 많이 시켜도 귀찮지만 이 사람처럼 퉁명스러워도 갈 마음이 안 생겼다. 그래서 동네를 벗어나서 다시 찾다가 알게 된 곳이 황사장네였다.

한번 가보고 괜찮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사우나가 편하다는 생각에 다시 사우나로 가게 되었는데 그만 코로나가 유행이 되었다. 코로나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사우나에 가기가 부담스러웠다. 물론 이발소도 걱정스러운 곳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스크만 잘 쓰고 있으면 위험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사우나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서 한 번 와 봤던 황사장네 이발소를 다시 찾게 되었고, 결국 단골이 되어 버렸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꼴로 이발하러 왔는데 황사장은 그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몇 달 전에 자기가 원래 충청도 사람인데 일곱 살 때 서울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충주 목계 나루에서 배 타고 마포나루에 내렸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마포대교가 없었다. 마포대교는 원래 이름이 서울대교였다.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4학년때인가 지어졌다. 그 전에는 배가 나루터에 들어오곤 했다. 모래사장도 넓게 펼쳐져 있었다.

마포나루라고 하니 귀가 번쩍 띄었다. 신돌석씨는 망태산에 살았지만 종종 나루터까지 내려오곤 했었다. 나루터에서 뭍으로 나오면 그 유명한 마포종점이 있었다. 은방울 자매가 부른 노래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광복절이 되면 신돌석씨 동네 사람들은 마포종점으로 꽃전차 보러 가곤 했었다. 전차에 꽃을 뒤집어씌우고 광복절을 경축하곤 했었다. 그 전차가 없어진 것이 마포대교 생긴 것과 시기가 거의 비슷할 것 같다.

황사장 말에 나도 망태산 살아서 마포나루를 좀 안다고 했더니 하던 가위질도 멈추고는 떠들기 시작했다. 괜히 아는 척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고향 사람 비슷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형님 식구 따라서 마포나루에 내리니 새우젓 장사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신돌석씨도 새우젓 장사들이 늘어서 있던 기억이 난다. 나루터에도 그랬지만 전차 종점이 있는 곳에 새우젓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황사장은 신돌석씨한테 고향 사람이나 매한가지이니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안 할 이유가 없어서 그러자고 했는데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누가 먼저 하자고 하지를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황사장은 손님한테 자기가 먼저 그러기가 뭐해서 한번 말 꺼내고 기다렸다고 한다. 신돌석씨도 지나가는 말로 한 건데 그걸 곧이곧대로 듣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냥 있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러다가 지지난 달에는 월요일 저녁때쯤 이발을 하러 갔다. 손님 한 명이 이발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간 뒤 신돌석씨 머리를 이발했다. 월요일에는 면도사가 나오지 않았다. 이발소 전체는 화요일에 쉰다고 하였다. 마침 잘 됐다고 하면서 손님도 안 오는데 일찍 문 닫고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황사장이 제안했다. 신돌석씨는 그때 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이렇게 된 마당에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그냥 약속을 취소하고 술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이발소 부근에 있는 순대국집이었다. 술국에 모듬순대를 시켰다. 황사장은 깡마른 체구답게 안주를 잘 먹지 않았다. 대신 70이 넘은 나이에도 술은 여전히 센 것 같았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서로 나이를 트게 되었다. 황사장과 신돌석씨 둘 다 누가 위고 아래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가 여덟 살이나 나리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 신돌석씨도 그랬지만 황사장도 그랬던 모양이다.

황사장이 마포에 온 것은 그 유명한 ‘마포 사는 황부자’를 찾으러 왔다고 한다. 먼 친척이라고 했다. 황사장이 서울 왔을 때가 일곱 살이라고 했으니 그 영화가 상영되기도 전일 텐데 그러면 실제로 황부자가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서 물어보니 자기 형님이 우리와 먼 친척이니 그 사람 만나서 도움 좀 받자고 했단다. 그런데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황부자는 지독한 자린고비였고, 형님이 몇 차례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왜 형님 이야기를 자꾸 할까? 바로 물어보기가 그래서 돌려서 이야기했다. 형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모양이지요? 이렇게 말했더니 그는 거의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거의 형님과 형수님이 아버지, 어머니 대신으로 자기를 키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한참 동안 가만 있다가 어머니, 아버지는 자기가 기억도 하지 못할 때 사라졌다고 한다.

사라졌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죽은 것도 아니고 왜 사라졌다고 하는 것일까? 자기 고향이 충주 교외인데 6.25전쟁이 난 뒤 아버지가 인민군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한 것인지 강압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시 국군이 들어왔을 때 아버지, 어머니는 인민군을 따라서 사라졌단다. 어디선가 죽었을 수도 있고, 북으로 갔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한참 뒤에 다른 지역에서 누군가 보았다는 말도 있다.

황사장은 자기가 50년생인데 호적으로는 52년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2년 동안 호적에 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전쟁이 나던 해 태어났는데 당시 핏덩이였던 자기를 키운 사람이 숙모이고, 호적도 숙부 밑으로 올려졌다. 이어받아서 자식처럼 키운 사람이 바로 형수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자기는 고아로 자란 셈이라고 하였다. 물론 거두어 줄 숙모가 있었고, 키워 준 형수가 있으니 천애고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이발할 때는 유쾌하던 사람이 침울해졌다. 둘이는 한참동안 술만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그가 문득 물었다. 혹시 기와공장 아냐고 했다. 신돌석씨도 생각이 났다. 마포나루에서 내려와 오른쪽 부분으로 들어가면 공터가 있었다. 거기서 축구도 하고, 야구도 했다. 거기를 기와공장이라고 불렀다. 신돌석씨는 아주 가끔 놀러간 적이 있었다. 황사장 말로는 거기가 ‘마포 사는 황부자’를 촬영했던 곳이란다.

그래서 끝내 황부자는 못 만났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한다. 그 뒤로 자기가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대하소설을 써도 넘쳐날 거라고 했다. 하긴 이 땅에 민초들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먄 황사장처럼 어린 시절에 부모 잃고 형 밑에서 자랐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호적도 늦고 형도 어려워서 황사장에게 공부를 가르칠 수 없었다. 그가 어린 시절 자란 곳이 기와공장 한 귀퉁이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거기서 형 내외와 조카들과 살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촌수는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부터 신발 만드는 공장에서 밑창에 본드 발라서 붙이는 일을 하러 다녔고, 조카들은 학교를 다녔다. 조카지만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다. 입는 옷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달랐다. 다들 어려운 시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지 알고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공장을 다니면서 다니기 시작한 곳이 공민학교였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학교에 함께 있던 곳이었다.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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