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초기에 나온 고서를 고려시대의 고본으로 보이도록 변조하는 경우를 간혹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근래의 영인본(影印本)을 활용하여 엉뚱한 책을 위조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조선초기의 고서를 고려본으로 속이려 한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한 시도의 가장 흔한 수법이 고본의 늦은 서발문(序跋文)과 간기(刊記) 및 시주기(施主記)를 떼어내는 행위이다. 조선초기에 나온 고서에는 고려의 서발문과 간기가 있고, 그 뒤에 조선초기의 서발문과 간기 및 시주기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책은 대체로 고려본을 조선초에 복각하며 고려의 서발문에 간행시(조선초)에 쓴 복간본의 서발문과 간기 및 시주기를 넣은 것으로, 판식(板式)이나 서체(書體)는 고려의 것과 거의 같다. 심지어 조선초기에 만든 여러 판본은 고려의 판식을 따라 만들었으므로 고려판과 매우 흡사하다.


1405년 권근 발문본 [묘법연화경]

필자는 안동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박동섭씨를 잘 안다. 그는 고서에 대한 식견과 감각이 남달리 뛰어났다. 필자는 그에게서 고서 몇 책을 매입한 바 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고서 한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도 1983년경 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의 연락을 받고 종로구 낙원동으로 나갔다. 그는 서울에 오면 낙원동에 있는 장급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1. 간기가 없는 [묘법연화경] 권5~7과의 조우

[묘법연화경] 권제5~7의 권두(卷頭) 변상도, 변상도 판 크기 ; 21.7×79㎝.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5~7의 권두(卷頭) 변상도, 변상도 판 크기 ; 21.7×79㎝.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당시 그가 보따리를 풀어 내게 보여준 책은 간기가 없는 [묘법연화경] 권제5~7의 3권1첵이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의 서지학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 직전이었다.

그가 가져온 책의 첫머리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그린 변상도(變相圖)가 있는데, “고려 우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주하여 목판에 새긴 것”이라는 사실이 변상도의 왼쪽에 밝혀져 있었다. 박동섭씨는 우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책이므로 고려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나의 직감은 고려본으로 단정지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우왕(禑王, 재위 1374~1388)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우왕이 붕어(崩御)한 이후에 만든 것은 확실하지만 창왕(昌王, 재위 1388~1389)이나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라기 보다는, 이런 고본인 경우에는 대체로 려말선초본(麗末鮮初本)이라고 하지 않는가”라며 얼버무려 말하였다.

[묘법연화경] 권제5의 권수(卷首)와 권제7의 권미(卷尾), 책 크기; 29㎝×30.5㎝,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5의 권수(卷首)와 권제7의 권미(卷尾), 책 크기; 29㎝×30.5㎝,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러나 책은 분명 고려의 판식이었고, 고려식 절첩본을 다시 펴서 선장본으로 개장(改裝)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결국에 나는 그 책을 당시로는 상당액을 지불하고 매입하였다.

2. 떨어져 나간 그 책의 간기와 조우

간기가 없는 [묘법연화경] 권제5~7, 3권1책을 입수한 지 3년 정도 지난 1986년경이다. 당시 나는 답십리에 있던 삼희고미술상가의 어느 고서를 취급하는 골동점을 들렸다. 7~8평 크기의 그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유리 진열장 안에 두 장의 목판 인쇄물이 눈에 들어왔다.

[묘법연화경] 권제5~7의 발문과 시주기. 책 크기;; 29㎝×30.5㎝,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5~7의 발문과 시주기. 책 크기;; 29㎝×30.5㎝, 1405년, 목판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 이양재]

그 인쇄물 낙장(落張)을 보는 순간 나는 3년여 전에 매입한 [묘법연화경] 권제5~7의 간기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격을 물으니 3년여 전에 매입한 책 가격의 1/3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한 푼도 깎지 않고 부르는 대로 다 주고 사들일 수밖에‥‥‥.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돌아와 맞추어보니 책의 크기라든가 물 자국의 흔적과 개장된 것 등등이 딱 맞아떨어졌다. 골동상인 누군가가 이 책을 고려본으로 주장하기 위하여 발문과 시주기 두 장을 제거하고 유통한 것이다.

당시의 각기 떨어진 상태에서는 본 책과 낙장 2장 가격은 높은 가격이었지만,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는 만약 처음부터 본 책과 간기가 붙어 있는 원 상태대로 나왔다면 그 책은 최소한 내가 산 값의 3~4배는 호가(呼價)하였을 것이었다.

3. 밝혀지는 [묘법연화경] 권5~7의 진가

따로 구입한 두 장의 간기는 양촌 권근(權近, 1352~1409)이 지은 발문(跋文)과 시주기(施主記)였는데, 이 [묘법연화경] 권제5~7은 “태종 5년(1405)에 성달생(成達生, 1376~1444)과 성개(成槪, ?~1440)가 죽은 아버지 성석용(成石瑢, ?~1403)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필사한 것을 도인(道人)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1405년 안심사에서 간행한 책”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밝혀져 있었다.

이 책은 양질의 장경지(藏經紙)에 찍은 목판본으로 3권을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책 크기는 세로 29㎝, 가로 30.5㎝이다. 권두(卷頭) 변상도(세로 21.7, 가로 79㎝) 안에 그려져 있는 신중상(神衆相)은, 구도가 크고 새김이 정교하여 다른 법화경에 있는 어느 변상도보다 뛰어난 최고 최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간기 두 장을 확보한 나는 간기를 책의 뒤에 붙여서 문화재청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하여 1988년 12월 28일 자에 보물 제971호로 지정받았고, 한동안 소장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양여하였다.

4. 맺음말

이렇게 본책과 제거된 발문 및 시주기에 다시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필자의 경우는 책귀(冊鬼)보다 책을 더 좋아하여 찾아온 천재일우의 경우라고나 할까! 이러한 경험을 한 필자는 “책의 주인은 정해져 있으며, 보물 제971호로 지정된 1405년 판 [묘법연화경] 권5~7은 내 손에 들어와 빛을 볼 운명이었다”라고 실감한다. 본책과 제거된 발문이 만나지 못했다면 결코 보물 제971호로 지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신 잡동산이’에서 말한다. 책의 서발문과 간기 및 시주기 등등을 제거하는 행위는 문화와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런 파괴 행위를 하지 말라.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