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민주묘지에서 사거리로 나오기 전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타서는 행진 집결 장소인 대학로에 한 번에 갈 수 없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서 우회전하니 고갯길이 있었다. 그리로 조금 더 가니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대학로에 직접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서울 나올 때면 거의 지하철만 이용하는데 버스 노선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버스 노선 앱만 깔고 활용하면 되는 일인데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게 나이 탓일까?

버스를 타면 확실히 시간이 좀 걸린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혜화동 로터리에 갈 때까지 신돌석씨는 실컷 졸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려야 한다고 깨워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렸다. 이럴 때면 나이가 은근히 걱정이 된다. 오늘 한 시간 이상 걷고 서 있고 했는데 또 행진을 하고 집회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아직도 신돌석씨는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움직였지만 괜히 신경 쓰일 때도 사실 없지는 않았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걸어서 대학로에 가니 행진 때 선도하는 차량들이 있었고, 집회 참가자들도 꽤 많이 모여 있었다. 보통 집회를 하고 나서 행진을 하는데, 오늘은 반대로 행진을 먼저 하고 집회를 한다. 그리고 행진 출발 장소를 대학로로 선택한 것도 아마 4.19민주혁명 당시 시위가 치열했던 곳 중의 하나인 동숭동을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물론 누구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고, 신돌석씨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었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날은 언제 비가 왔느냐 할 정도로 화창하게 갰다. 어떤 사람들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퇴진 구호, 심지어는 탄핵 이야기를 하느냐고 하지만,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오죽하면 그럴까 여겨졌다. 신돌석씨는 주말마다 나오는 것은 아니고, 지역에서 행사나 모임이 없을 때는 나오는데, 촛불집회에 나와 보면 사람들의 표정이 굉장히 간절하면서도 즐거워한다. 촛불집회는 하나의 축제 같은 분위기이면서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전 집회가 간단히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신돌석씨 일행은 어디로 갈까 하다가 오늘 참배식을 주최한 비상시국회의 현수막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현수막은 있는데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리저리 흩어진 것 같았다. 신돌석씨 지역 사람들도 함께 현수막을 들었다. 현수막에는 오늘 낮에 읽었던 선언문 제목이 쓰여 있었다. ‘검찰독재 민생파탄 전쟁위기 굴종외교 주권포기 그 모든 껍데기는 가라’ 다른 사람들이 들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음악이 나오기 시작하고 행진이 시작되었다. ‘촛불행진’ 등의 노래는 이제 꽤 귀에 익숙해졌다. 그 외에도 이제는 고전처럼 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의 노래가 행진선도차량에서 나왔다. 그와 함께 차량에 올라서서 구호를 외치고, 짤막한 연설을 하는 이가 여느 때처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하면서 걸으니 종로5가까지 나가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서 잠시 멈추기도 하고, 사거리에서도 속도가 상당히 더뎌졌다.

시위 때문에 통행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이 일부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흔들어 주고 함께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종로 5가에서 우회전하자 70대 이상 되어 보이는 네 명이 ’윤석열 퇴진‘을 따라 외쳤다. 어떤 사람일까 하다가 이것도 편견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70대 이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으니 나이로 꼭 정치적 성향을 가릴 일이 이제는 아닌 것 같다.

종로에 들어서서 가다 보니 건너편에 3사관학교 깃발을 든 사람들이 행진을 하였다. 이전에 비하면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었다. 요즘 와서 보이는 현상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일단 수구세력이 집권을 했으니 그 간절함이 줄어든 것일까? 어떤 이들은 저들 사이의 분열을 이유로 들기도 하였다. 시내에서 벌어지는 저들의 집회를 보면 현 정부에 대한 지지도 있지만, 박근혜 탄핵과 이른바 4.15부정선거를 주로 내세우는 이들도 있다.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그들이 이쪽을 향해서 ’조선족들아 북한으로 가라‘라고 하였다. 참 황당한 느낌이었다. 조선족을 멸시하는 그들의 사고가 드러나는 것일뿐더러, 같은 민족을 정치적 견해에 따라 나누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라는 것이 없는 듯하다. 집회 때마다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외세에 굴종하는 보수가 진짜 보수일까? 그들은 극혐으로 가득찬 생각만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광화문 네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시청앞을 지났다. 왼쪽으로 이태원참사희생자분향소가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추모의 마음을 표하자고 진행자가 이야기를 했다. 음악도 힘찬 행진가풍에서 추모의 노래로 바뀌었다. 4,16세월호참사희생자 추모노래인 ’잊지 않을게‘가 흘러나왔다. 오늘도 추모행렬은 줄을 이어서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을 맞이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보였다. 그런가 하면 추모분향소를 철거하라는 현수막도 그 부근에 걸려 있었다.

조금 더 가면 서울시의회 옆에 4.16기억관이 있다. 광화문에 있던 것을 광화문광장을 조성한다고 폐쇄하겠다고 한 것을 이리로 옮긴 것이다. 이제는 국힘당이 다수이니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안산에는 기록공관 등이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많은 시민들이 추모를 하러 다녀갔던 광화문 기억관이 없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수구기득권세력에게는 정말 보기 싫은 곳인 모양이다.

이태원참사분향소도 이태원으로 옮기라는 서울시측의 요구가 있다고 한다. 녹사평역인가에 공간을 마련해 줄 테니 그리로 옮기라는 것이다. 참사 현장이나 그곳과 가까운 곳에 그런 분향소 혹은 기억장소가 있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요구가 시민과 추모를 분리하려는 저의가 너무도 분명해서 거부되는 것이다. 시청앞에 분향소를 세우고 지키는 것은 많은 시민에게 알리는 커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촛불대행진 집회가 열리는 숭례문 뒤부터 시청광장까지의 공간에 행진 대열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2호차와 함께 신돌역씨가 함께 하는 대열도 그곳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았다. 현수막을 계속 들고 있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집회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 접자고 하여 접어서 한 사람이 보관하기로 했다. 그 외 이곳저곳 민회나 단체동지회, 민주동문회 깃발들은 옆으로 옮겨서 계속 들고 있었다.

집회가 시작되고 사전 발언들이 몇 차례 있고 나서 사회자가 오늘은 중요 발언이 많으니 사회자 발언은 자제하고 빨리 진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무대에 오른 사람이 지난 번 전주을 재보궐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나왔던 안해욱 회장이다. 이 분은 민주개혁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주로 태권도인으로 살았고, 공영방송에서 태권도 중계도 하였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촛불후보를 자칭하면서 나가게 된 계기는 이른바 쥴리 때문이었다.

그는 라마다르네상스호텔에서 쥴리라는 별명을 쓰는 김건희를 만났다고 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열린공감TV 등에서 보도되고, 여러 사람이 그걸 인용해서 작년 재작년 대선 당시에 SNS에서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그것 때문에 고소가 되어 명예훼손으로 불구속기소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게 하여 전주을 재보궐 선거에도 나서게 되었다.

지난 4월 5일에 실시된 전주을재보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서 1위 진보당 강성희 후보, 2위 민주당을 탈당한 무소속 임정협 후보에 이어 3위를 차지하면서 10% 이상 득표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정의당도 불출마해서 진보당에 상당히 유리한 지형이 되었던 이번 선거에서 안해욱 후보는 국힘의 김경민 후보를 제쳤다. 김경민 후보는 지난 번 지선에서 전주시장 후보로 나와 15% 이상 득표를 했으나 이번에는 8%에 그쳤다.

안해욱 회장은 자기가 출마하게 된 동기, 자기 나름대로의 소회 등을 이야기한 뒤 한 마디 덧붙이고 끝내겠다고 하고는 월남참전군인에 대한 보상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월남참전군인이라고 밝힌 그는 미국으로부터 월남참전군인에게 주라고 해서 받은 돈을 박정희가 모두 꿀꺽했다고 한 뒤 하루빨리 전우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월남참전군인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위해 싸우는 경수형과 그 동지들이 생각나게 하였다.

이어서 울산 남구에서 기초의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 발언을 하였다. 이 사람은 민주당 공천으로 나와 당선된 사람이었다. 울산 남구가 김기현의 지역구이기도 하고, 국힘의 텃밭이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여러 말을 들으면서도 당 대표로 선출된 김기현에게는 치명적인 결과였고, 국힘 전체에게도 적신호가 울린 셈이었다. 그는 울산 남구에서 울린 윤석열 비판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데 앞장서겠다는 말로 발언을 마무리하였다.

이번 울산시 교육감 선거에서도 진보성향의 천창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전임 노옥희 교육감이 갑자기 운명하여서 그 남편인 천창수 후보가 나선 것이었다. 고 노옥희 교육감은 국힘이 압도하는 울산의 분위기에서도 교육감에 당선되었다. 그만큼 시민들의 신임을 얻은 교육감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갑자기 생을 마감하였고, 함께 교육운동을 하였던 남편 천창수 후부가 뒤를 이어 출마해서 당선이 된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전주을과 울산의 재보궐선거는 현재 정세에 중요한 경고음을 보내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러한 조짐에 대해 어떠한 대응을 하느냐에 따라 국힘도 민주당도, 또 시민사회나 진보진영도 다른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빙산의 일각이지만 보여주는 민심의 흐름을 결코 놓쳐서도 안 되고 아전인수식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 신돌석씨는 냉철하게 열정적으로 정세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임을 실감했다.

이어서 민주당 최고위원이 나와서 연설을 했다. 격세지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민주당의원은 집회현장에서 인터뷰를 하거나 여럿이 단상에 올라 짧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국힘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수구언론들이 질타를 하였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거의 매주 민주당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나오고, 오늘은 최고위원까지 나왔다. 이 사람은 민주당이 잘하지 못한 점이 많고, 앞으로는 정말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하였다.

오늘 발언을 한 민주당 최고위원도 학생운동이 한창 활발하던 시기에 총학생회장이었다고 한다. 언젠가 누군가에 들은 이야기인데 민주당 의원 중 학생운동을 직간접적으로 했던 사람들이 1/3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노동운동을 했다고 하면서 의원 배지를 단 이후에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집회가 마지막을 향해 가는 듯하다. 시간이 꽤 흘렀다. 행진을 먼저 했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발언자가 많고 발언시간도 길었던 것 같다. 사방이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집회에 참가할 때마다 신기하게 느끼는 것은 집회 도중에 자리를 뜨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다. 특히 앞부분에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가지 않았다. 이 집회에 온몸과 정성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확고한 세를 이루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연단에 올라온 사람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범국민합동참배식을 주최한 비상시국회의를 제안한 100명 원로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분을 사회자가 소개하면서 1970년대 이후 다섯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다섯 번의 징역살이라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고통이다. 신돌석씨는 딱 한 번 감옥에 갔고, 그것도 집행유예로 나왔으므로 짧은 기간이었다. 그 외는 구류나 연행되어 조사받은 정도였다.

그 고통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현재까지 계속 이 사회의 민주화와 진보를 위해 앞장선다는 것이 놀라웠다. 연설을 시작하면서 그는 ’껍데기는 가라‘를 낭송하였다. 오늘 낮에 있었던 범국민합동참배식과 기본개념이 맞닿아 있었다. 그는 검찰독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바로 주권자의 아우성, 주권자의 외침, 주권자의 힘이라고 하였다. 여러분들 같은 촛불시민들이 모여서 싸우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독재로 치닫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껍데기를 청소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뒤에 당당한 평화의 나라, 주권자의 나라, 다 함께 번영하는 찬란한 민족통일국가를 세우자는 것이다. 비상시국회의는 그것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 동네마다 비상시국회의를 조직하고 외치자. 잠꼬대할 때도 외치자, 이런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 결국 연설의 마지막도 껍데기는 가라의 구절로 맺었다. 그릇된 역사를 뚫고 간 아우성만 살고 그 모든 껍데기는 가라.

이어서 4.19당시 현장에서 싸웠던 사월혁명회 어른들이 단상에 올랐다.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분이 많을 정도로 연세들이 들었다. 사월혁명회 회장은 80이 넘은 나이인데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하였다. 우리가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윤석열 독재를 물러나게 할 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 4월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때 못 다 이룬 꿈을 이루어 나가자고 열변을 토할 때 참가자들의 열렬한 박수가 울렸다.

회장의 연설 뒤에 선언문을 여럿이서 나누어 읽었다. 선언문을 미리 나누어 주지 않았고, 자막으로도 나오지 않아서 그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언뜻 언뜻 듣기에도 낮에 있었던 선언문과 일맥상통하는 듯하였다. 결국 4.19민주혁명은 독재와 불의에 대한 항거이지만 동시에 미일 외세와 분단세력을 향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민주혁명은 민족민주혁명으로 이해되고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이리라.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집회가 마무리될 때 둘러싼 이들이 언제나 그렇듯 빨리 지역으로 돌아가서 한 잔 하자고 하였다. 오늘은 정말 체력 소모가 많았기 때문에 빨리 식사를 하고 간단히 한 잔 하고 헤어지자는 다짐을 했다. 오늘은 정말 껍데기에 대한 외침으로 시작해서 껍데기를 몰아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하루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신돌석씨 일행들은 재빨리 서울역 쪽으로 발검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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