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책판(冊板)을 이용한 출판은 책판이 보존되는 한 상당 기간 인쇄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변의 진리를 담은 ‘팔만대장경’이라든가 변함없는 수요를 갖는 책들을 출판하는 데는 주로 책판에 내용을 새겨 장기간의 출판에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책판(冊版)의 한계는 이미 새겨진 내용 이외에 다른 내용을 찍을 수는 없다.

반면에 목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가장 대중적인 출판 방법이다. 활자를 만드는 데 나무는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목활자는 활판(活版)을 흩었다가 다시 다른 내용으로 다시 조판(組版)하였다 하며 재사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게가 가벼워 지게에 짊어지거나 수레에 실어 이동하기가 쉽다.

실제로 조선후기의 많은 계보류(系譜類) 서적이나 문집(文集)이 목활자본으로 나왔음을 볼 때 이동(移動) 인쇄업이 조선후기에 나오게 된 것 같다.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은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는 것으로 출간의 임무가 끝난다. 조선왕조에서 왕조실록은 왕도 볼 수 없었으니 왕조실록은 처음부터 한 사람의 독자도 없이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오대사고(五代史庫)에 보존할 5부를 인출(印出)하면 끝이었다. 따라서 주로 목활자로 조판하여 인출한 후에 그 판을 흩었다. 그리고 왕조가 멸망한 후에야 그 기록을 후대인들이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목활자는 난세(亂世)에 긴급을 필요로 하는 출판물을 만드는데 효율적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 전쟁이 끝난 후 긴요한 의서(醫書) [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각종의 원종공신록권(原從功臣錄券)을 찍는데 4~5종의 목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의서 [동의보감]은 많은 수요가 발생하였으므로 사회가 전란으로부터 안정되자 다시 목판으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긴급한 중에서 긴요한 출판물이 필요할 때 많은 경우 목활자가 사용되었다. 근대에 제작된 그러한 대표적인 목활자본 가운데는 [동경대전]이 있다. 동학교도들이 박해받는 가운데서 숨어서 경전 [동경대전]을 간행하는데 목활자판 인쇄는 아주 유용한 출판 수단이었다.

『동경대전』 초간본으로 본 목활자의 사용

우리 민족의 근대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종교서를 꼽으라면 단연 동학(東學)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이다. 근대에 출발한 우리나라의 여러 민족종교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동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 중심점에 동학의 개벽신앙이 있기 때문이다.

1. 서학과 동학

조선후기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서학(西學)이라 불렀다. 서쪽에서 온 배움이라는 뜻이다. 서학에 자각하여 상대적으로 일어난 배움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동학(東學)이다.

[동경대전]에서는 천주(天主)에 대하여 나온다. 최제우는 “1860년(철종11) 4월 5일 종교체험 중에 천주의 말씀을 들었고, 그 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천주(한울님)를 위하며 살도록 하기 위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라고 한다. 최제우는 동학과 서학은 “도(道)는 같으나 이치는 다르다(道則同也 理則非也)”라고 하였다.

‘천주(天主)’라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동학과 서학이 다름없다고 보고 탄압하였지만, 동학은 서학에 상대적으로 생겨났으므로, 동학은 천주교나 기독교와는 다른 우리 민족 본성에 맞는 수도(修道) 이치를 논하고 있다.

2. [동경대전] 초간본

[동경대전]은 7권1책 본이다. 특히 중요한 부분은 권지1의 ‘포덕문(布德文)’ ‘동학론(東學論)’과 권지2 앞부분의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然)’ 등의 4편이다.

인제 [동경대전] 간행터. [사진 제공 - 강원도 인제군청]  해월 최시형이 1880년(庚辰) 5월 9일에 경전인간소(經典印刊所)를 설치하여 5월 11일부터 6월 14일까지 100여 책을 간행하게 한 장소(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351번지)이다.
인제 [동경대전] 간행터. [사진 제공 - 강원도 인제군청]  해월 최시형이 1880년(庚辰) 5월 9일에 경전인간소(經典印刊所)를 설치하여 5월 11일부터 6월 14일까지 100여 책을 간행하게 한 장소(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 351번지)이다.

[동경대전] 초간본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1880년(庚辰, 고종17) 5월 9일에 경전인간소(經典印刊所)를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에 설치하여 5월 11일부터 6월 14일 사이에 100여 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이 판본을 흔히 인제 경진판(庚辰版)이라 부르는데, [동경대전]의 초간본(총 30장)이다.

현재 인제 경진년 초간본은 세 부가 확인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한 부와 독립기념관 소장본 한 부, 그리고 필자 소장본 한 부이다. 이 인제 경진판의 특징은 다른 판들과는 달리 간기가 없다는 점이다. 다만 권지1에 있는 ‘동학론’의 제목이 이후의 판본에서는 ‘논학문(論學文)’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나는 코리안이다 - 동경대전 1], 도올 김용옥 저, 2021년, 통나무 발행, 412면. [사진 제공 - 이양재]
[나는 코리안이다 - 동경대전 1], 도올 김용옥 저, 2021년, 통나무 발행, 412면.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세 부 가운데 독립기념관 소장본은 도올 김용옥이 저술한 [나는 코리안이다 - 동경대전 1]의 책 끝에 영인되어 있다. 김용옥의 그 책 412쪽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동일 목활자본이면서도 본문 장3 앞면에서 인쇄할 때 빠져나온 글자를 다시 끼워 넣은 판 교정의 인흔(印痕)이 보인다는 점을 서지학 전문가 박철민의 의견을 제시하며 밝히 지적하고 있다.

3. 인제 경진판 세 부의 실제 모습

이제 세 부 전존하는 인제 경진판 [동경대전]을 검토하여 보자.

이 세 부는 동일한 목활자본이다. 구태여 이 목활자에 이름을 부친다면 “인제 경진년 동경대전 목활자”라고 칭할 수 있겠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독립기념관 소장본은 같은 판본이면서도 인쇄할 때 빠져나온 글자를 다시 끼여 넣어 판 교정의 각기 다른 인흔(印痕)이 본문 장3의 앞면에서 보인다.

[동경대전] 초간본 앞 표지와 앞 표지 이면지, 1880년, 인제 경진판.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표지는 만자형(卍字形)의 능화문판으로 만들었고, 그 이면지는 [동경대전] 인쇄 파지로 만들었다.
[동경대전] 초간본 앞 표지와 앞 표지 이면지, 1880년, 인제 경진판. 필자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표지는 만자형(卍字形)의 능화문판으로 만들었고, 그 이면지는 [동경대전] 인쇄 파지로 만들었다.
[동경대전] 총목, 1880년 초간본, 인제 경진판. 필사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경대전] 총목, 1880년 초간본, 인제 경진판. 필사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경대전] 동학론 시작 부분, 1880년 초간본, 인제 경진판. 필자 소장본으로 인쇄 상태가 매우 우수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경대전] 동학론 시작 부분, 1880년 초간본, 인제 경진판. 필자 소장본으로 인쇄 상태가 매우 우수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위의 두 부의 판 교정의 각기 다른 인흔을 참고로 하여 볼 때, 필자 소장본은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인흔이 일치한다. 위의 두 부의 표지 이면지는 [용담유사]의 인쇄 파지(破紙)를 사용하고 있으나, 필자 소장본은 앞표지 이면지는 [동경대전] 인제 경진판 장5의 앞면을, 뒤표지 이면지는 장5의 뒷면을 사용하고 있다.

도올 김용옥은 인제 경진판 [동경대전] 표지 이면지가 [용담유사] 인쇄 파지(스리지)를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데서 혼돈을 일으킨 바 있다(위의 책, 421면 참조). 그러나 필자 소장본은 인제 경진판의 인쇄 파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누구의 소장본이 먼저 완성된 책인가 하는 검토를 가능하게 한다.

4. 세 부 중에 누구 소장본이 먼저 제본을 완료한 책인가?

간혹 서지학에서는 같은 판본을 가지고도 어느 책이 먼저 인쇄되었거나 먼저 완성된 것인가를 따지기도 한다.

우선,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필자 소장본은 판 교정의 각기 다른 인흔으로 볼 때 거의 같은 때 인쇄되었다.

[용담유사] 판본도 인제 경진판 [동경대전]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판본이 있었다면, [동경대전] 인쇄 파지를 표지 이면지로 먼저 소모한 후에, [동경대전] 표지 이면지로 [용담유사] 인쇄 파지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동경대전]은 [용담유사]보다 판의 수량이 상당히 적다. 따라서 [동경대전]의 인쇄 파지는 [용담유사]의 인쇄 파지보다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그러니 [동경대전]의 이면지를 [동경대전]의 표지 이면지로 먼저 사용하였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인쇄 상태가 고르지 못한 것을 보면, 대체로 늦게 인쇄한 것을 모아 제본한 것 같다.

이렇게 보았을 때,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필자 소장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보다는 먼저 제본이 끝난 책으로 보인다. 세 부가 같은 인제 경진판인데도 이러한 유추를 해 보는 것이 형태서지학의 일면이기도 하다.

5. 다수 수요의 출판물은 목판본으로, 민간에서의 소 부수 출판은 목활자로

민간 판본에서든 관(官) 판본에서든 다수 수요의 출판물은 목판본으로 만드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소부수(小部數) 출판물은 활자본으로 만든다. 특히 민간에서의 소부수 출판물 간행에는 목활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비 면에서나 가성비가 좋았다. 이러한 출판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고본의 구분에 매우 중요하다.

요즘에도 같은 초판본의 같은 인쇄본이라도 어느 표지가 첫 장정이냐가 중요할 때가 있다. 물론 동시 간행물이면서 다종의 표지를 발행하는 때도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같은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초판본도 포(布) 장정본이 있고 혁배(革背) 장정본이 있으며. 현채(玄采, 1886~1925)의 [동국사략]의 초판본도 오침선장본이 있고, 혁배(革背) 장정본이 있다.

인간 쌍둥이의 출생 순위에 따라 형과 아우가 구분된다. 책에는 그러한 관점이 약하다. 다만 인쇄나 장정의 순서를 알아본다는 점은 간단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특히 목판본인 경우에는 판을 만든 초기의 인쇄물과 한 세대가 지난 후의 인쇄물은 그 찍혀진 상태가 다르다. 형태서지학에서는 그러한 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도올 김용옥은 위의 저서에서 인제 경진판 [동경대전]을 국보급으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철학 및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동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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