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공연이 끝난 뒤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낭독할 사람은 세 사람이었다. 남자 둘, 여자 하나였다. 지역 민회 대표와 단위 민주동문회 대표, 그리고 대학생 단체 대표였다. 제목과 처음 시작하는 한 문장을 셋이 같이 읽었다. 비상시국회의의 앞에 붙은 ‘검찰독재, 민생파탄, 전쟁위기’에 두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굴욕외교’와 ‘주권포기’였다. 아마도 굴욕외교는 한일정상회담과 관련된 것이고, 주권포기는 미국의 도청 의혹에 대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제목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고, 그 뒤에 ‘그 모든 껍데기는 가라’라고 썼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를 인용한 듯하였다. 이 시는 대단히 유명한 시이기는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아는 사람만 아는 시라고 할 수도 있다. 신돌석씨도 학교 다닐 때는 배운 적이 없다. 그때만 해도 신동엽은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시인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시는 잘 모른다. 그래서 시인이라면 김소월, 청록파, 서정주만 있는 줄 안다.

신돌석씨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스물 한두 살 때였다. 고교 때 친구들이 만나서 술을 마실 땐데 한 친구가 이 시를 중얼거렸다. 아마 고교 졸업한 이듬해 4월이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시를 꽤 잘 썼는데, 서정주를 무척 좋아했었다. 서정주 시선을 들고 다니면서 수업 시간에도 그것을 몰래 봤다. 당연히 서정주의 시들을 줄줄 외우곤 하였다. 대학 주최 백일장이나 문예현상에도 응모했고, 상도 타는 친구였다.

시를 써도 서정주 풍으로 쓰는 친구였는데 대학 들어가더니 돌연 신동엽이나 김지하를 예찬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대학 들어간 첫해 가을에 있었던 대규모 시위가 정신적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술 마실 때마다 신동엽이나 김지하의 시를 줄줄 외우면서 해설까지 곁들였다. 다른 시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껍데기는 가라’는 다른 친구와 논쟁까지 붙어서 이후 계속 기억에 남았다.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해 냉소적인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는 ‘껍데기는 가라’는 구호일 뿐이지 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친구는 김춘수의 시를 좋아하였다. 그러다가 둘이 말싸움을 벌였는데 4.19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 등에 대해서 서로 열변을 토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먹다짐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런 점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던 신돌석씨는 두 사람의 논란이 짜증스러웠다. 다른 친구들도 그랬을 것 같다.

어느 날인가는 신동엽의 시를 좋아하는 친구가 소설가 김동리에 대해 욕을 섞어가면서 마구 비판을 하였다. 김동리가 당시 신문에 현실참여 문학이 대세를 이루는 것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러면서 ‘껍데기는 가라’를 인용하였는데, 그의 관점으로 이건 시가 아니라 구호일 뿐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문학이 현실 문제만 다루는 것에 대해 우려스럽다고 하면서, 고전이 된 문학 작품들은 영원성을 담은 생명, 정신세계 등을 다룬다고 하였다..

김동리의 주장으로는 우리 문학은 너무 현실 사회에만 매몰되어 있고,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물론 그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라고 하였다. 당시에 김동리는 문학권력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만큼 그의 이런 발언에 대해 사실주의계열의 젊은 문인들은 난감해졌다. 더욱이 넓은 의미라고 해도 사회주의라는 것은 무시무시한 비난인 셈이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시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주워 듣는 이야기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시나 소설이 거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하였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이 한창 많이 읽히던 때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거의 유행이 되어서 안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이었는데 신돌석씨도 친구한테 빌려서 그 중 몇 편을 보았다.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는 성남 이야기라서 읽어 보게 되었다. 당시에 신돌석씨는 성남에 살았다. 친구들이 그 책을 읽고는 성남에서는 정말 애들이 콘돔 불면서 노냐고 물어서 화가 난 적도 있었다. 성남에 사는 신돌석씨로서는 얼마간 불쾌함도 갖게 만드는 점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외에도 시, 소설 등에서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작품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 작품들의 상당수는 나중에 노동운동을 하게 된 후에 읽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아무튼 그 친구 말로는 당시 문인협회라는 곳에서 자기 과 학생들을 호텔로 불러서 사실주의 문학을 비판하는 세미나를 열었다고 한다. 출석 체크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갔는데 이건 뭐 세미나가 아니라 사실주의 문학 성토장 같은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사회를 보는 사람이 좀더 논리적인 말을 하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세미나에 갔다 온 뒤 흥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었다. 노동운동을 한 뒤 학습을 하면서 ‘껍데기는 가라’를 읽어 보니 그렇게 우리 현대사를 잘 노래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한참 동안 잊어버렸던 그 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였던 것 같다. 월간조선에서 갑자기 당시 금성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내용을 문제 삼고 나왔다. 그때 여당 어느 국회의원이 이 교과서에 ‘’껍데기는 가라‘가 나온다면서 북을 찬양하는 내용이라고 비판을 했었다.

그 의원을 비교적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신돌석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미 그때만 해도 근현대사가 아니라 문학에서 ’껍데기는 가라‘는 널리 배웠는데 갑자기 그걸 문제 삼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물론 그 시만이 아니라 항일무장투쟁이나 친일파에 대한 내용들을 시비 걸고 나온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이념 지형에 충격이 오면서 온 반동의 하나였다고 생각이 든다.

그랬던 시가 다시 4월을 맞이하여 소환이 된 듯하여 선언문이 정말 반가웠다. 비가 좀더 거세진 가운데 세 사람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다들 받아쥔 선언문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신돌석씨가 처음 ’껍데기는 가라‘에 대해 강의를 들을 때 그것은 그냥 4.19민주혁명을 팔아먹는 정치꾼들, 모리배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배웠었다. 사실 4.19 세대라고 하면서 정치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그런 자들이라고 보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동엽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4.19민주혁명을 반독재 혹은 반이승만에만 가두려고 하는 자들, 4.19민주혁명의 전과정에 걸쳐 타도 대상이 되었던 자들을 모두 일컫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독재, 외세, 분단세력과 함께 마지막에서 말하는 쇠붙이는 전쟁, 무기, 군사독재, 외국군대 등을 모두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껍데기는 사라져야 할 이 땅의 적폐들인 것이다.

선언문에서는 현재의 껍데기는 외세를 등에 업은 수구기득권세력과 윤석열 검찰독재라고 규정하고,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소명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4.19혁명의 의미를 단지 반독재에 머물지 않고 심층적으로 열거하였다. 불의에 항거하였을 뿐 아니라 민생파탄에 대한 분노로 일어난 총궐기라고 하였다. 또한 민중들의 정당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하였다. 교원노조도 바로 그런 투쟁 속에 나온 것이었다.

국민학생도 데모를 할 정도로 시위만능시대였다는 비아냥은 다시 말하면 그만큼 민주주의가 만개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수구기득권세력의 눈으로 보면 민초들이 저마다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못마땅한 법이다. 그리고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그러한 자들에게 세뇌되어 마치 자기들에게도 불편한 듯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야당이나 진보세력을 향해 핏대를 올리는 서민들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선언문에서 밝힌 4.19민주혁명의 성격 중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 민심이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니 6.25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7년 만에 일어난 것이 4.19민주혁명이었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구한 날 북진통일이라는 허황된 소리만 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 민심이 이반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여기까지는 그야말로 반독재, 민생, 평화를 추구하는 내용이다. 더 나아가서 4.19민주혁명은 전쟁 기간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전쟁범죄에 대해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정부의 사과 등을 목표로 내걸었던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전쟁범죄는 공권력과 그에 영합한 극우단체들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일컫는 것이다. 선언문은 이것을 인권회복선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전쟁범죄 피해자 유족회의 회장이 처형당하고, 이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운동이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된 것을 보면, 4.19민주혁명은 무엇을 이끌어냈던 것이고, 5.16군사쿠데타는 무엇을 짓누르려 했는지가 명확해진다. 5.16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치군인들이 보호하고자 했던 이들은 전쟁 기간에 민간인 학살 등의 범죄를 저지른 이들인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후퇴와 더불어 진전되는 듯하던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규명 움직임이 다시 후퇴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나오고 있다. 탈북자 출신으로 국힘당 의원이 된 자는 4.3항쟁이 북의 지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까지 하였다. 북에서 배웠다는데 그가 북에서 배운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면 북에서 왜 탈출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자신의 입지를 위해 아무 말이나 하는 것 아닌가?

4.19민주혁명은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것이고, 통일국가를 목표로 나아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역 시민단체의 원로와 대화를 하다가 4.19민주혁명은 불의에 대한 항거로 족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1960년 4월 19일부터 이듬해 5월 16일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과정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논점은 있었다. 6월민주항쟁이 일어난 뒤 논쟁이 벌어지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4.19가 미국의 기만에 의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는데 과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1980년도, 6월항쟁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미국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싸우기 전에는 이러한 기만은 항시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그러한 주장을 할 것이었다.

그에 반해 4.19부터 오늘날까지 껍데기와 알맹이의 싸움은 지속되는 것이라는 반론을 펴는 이들이 있었다. 선언문은 후자의 견해를 담고 있었다.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짓밟혔지만 이후에도 그 정신을 계승하는 민중의 투쟁은 지속되었고, 부마항쟁, 518광주민중항쟁, 6월민주항쟁,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한 발 한 발 전진해오면서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해 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신돌석씨는 과장이라는 것은 지나친 말이라고 해도 미국의 기만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미국에 대해 어떻게 자주적 의식을 갖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진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만에 의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 걸음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4.19민주혁명은 미완이면서 분단 이후 민족민주운동의 출발선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언문은 4.19민주혁명의 성격에 대해 열거하면서 오늘날 나타난 껍데기의 문제도 열거하였다. 검찰독재, 민생파탄, 전쟁위기, 전쟁범죄 두둔, 이승만과 같은 학살자에 대한 영웅시, 일본에 대한 굴종외교, 미국에 대한 주권포기, 통일 훼방, 국가보안법을 통한 탄압 등을 거론하면서, 지난 60여 년 동안 껍데기는 숱하게 변신을 해왔지만 그 본질은 바로 친외세 반민중수구기득권세력임을 분명히 하였다. 오늘날 그것의 정치적 표현이 윤석열 검찰독재인 것이다.

선언문 낭독이 끝난 뒤 합동참배식은 끝을 맺었다. 삼삼오오 가까운 사람들끼리 부근의 식당으로 향했다. 오후 3시부터는 대학로의 마로니에 광장에서 촛불대행진이 열리는 숭례문 앞까지 행진을 한단다. 함께 해줄 것을 사회자가 당부하였다. 신돌석씨도 오늘 행진과 집회 참여를 모두 하기로 계획하고 왔으므로 일단 식사부터 하기로 하고 일행들과 식당을 찾았다. 비는 잦아들다가 그쳤다.

식당마다 사람들이 가득찼다. 아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있는 보리밥집에 몇 자리 빈 곳이 있어서 끼어 앉았다. 지역 사람들 중 들어오기 어려운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하였다. 이제 서서히 날이 맑아지고 있다. 오늘 4.19민주혁명 당시의 시위대를 연상하면서 행진을 해보자고 이야기들을 했다. 총탄이 날아오거나 깡패들이 습격할 일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단 역사가 진보하기는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신돌석씨는 속으로 쓴웃음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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