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역사소설과 기행문학을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단군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이 여러 종 나왔다. 처음 나온 것이 강무학(姜舞鶴)의 장편소설 『단군』(1967)일 것이다. 필자는 청소년 시절에 그 책을 구매하여 살펴본 적이 있다. 철학도 사상도 신념도 없는 그냥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였다. 소설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필자는 10대 후반에 일찍이 체험한 것이다. 강무학 외에도 최근까지 몇 분의 소설가가 단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내놓았다.

소설가는 장편역사소설을 쓰면서 사실대로 쓸 여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역사소설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반(反)하는 왜곡만 하지 않으면 된다. 역사소설은 나름대로 고증(考證)을 고려해야 한다. 고증을 고려하지 않고 쓰고 역사소설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공상소설 또는 공상역사소설이다. 공상과학소설은 과학적 미래를 상상하고 창작한 내용으로, 그 일부가 먼 미래에 실현되기도 하지만, 공상역사소설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허구이다.

역사학자, 또는 역사학도임을 주장하면서 사료를 조작하거나 왜곡한다면 그는 역사학자나 역사학도라 할 수 없다. 역사에서는 과거를 소급하여 실현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역사소설은 사서나 사료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역사유적 기행문은 사료가 될 수도 있다. 20세기에 우리 민족이 남긴 최고 최선의 역사유적 기행문학작품이 빙허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이다.

1. 식민지시대의 반일문학가와 빙허 현진건 기념사업

일제 식민지시대에 민족의 자존과 지조를 지킨 반일 문학가는 여럿이 있다. 우선 기억나는 인물로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을 꼽을 수 있고, 윤동주(尹東柱, 1917~1945)와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이상화(李相和, 1901~1943)도 그렇고, 이번에 언급하는 빙허 현진건도 그렇다. 아마도 몇 분 더 있을 것이다.

이 다섯 분 가운데 네 분은 당대의 유명 시인이고, 현진건만이 소설가이다. 시인 네 분은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섯으나 빙허 현진건만은 아직 문학관도 기념관도 서지를 않았다.

지난 1월 20일 자로 김경은 여행작가가 <일요서울>에 기고한 “[김경은 여행작가의 서울이야기-동대문⑦], 폐허된 현진건 고택과 감초마을의 꿈”에 의하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감초마을의 ‘방아다리어린이공원’ 옆에 신축 중인 7층 건물에 ‘현진건 기념관’이 들어서며 오는 7월에 완공 예정이라 한다. 그렇지만 감초마을에 있는 “현진건 고택(故宅) 건물은 폐허로 방치되고 있다”라고 한다.

서울에 현진건의 집터는 몇 곳이 있다, 그러나 폐허로 변해있을망정 그가 살던 고택 건물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여기 감초마을이다. 빙허는 1942년에 제기동으로 이사하여 1943년 타계할 때까지 1년 남짓 여기서 살았다.

2. 빙허 현진건의 문학

필자는 1973~4년경에 빙허의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1924년)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작품은 도시 하층민의 운명을 추적한 단편이다. 그러나 당시 내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빙허 현진건은 우리 문학사에서 단편소설의 형식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간략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인 구성이 빛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당시의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는 고민과 가난한 하층민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고발하였는데, 이는 우리 근대민중문학의 시작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빙허는 『무영탑』(1938) 『적도』(1939) 『흑치상지』(1939, 미완성)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찬란했던 민족혼을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필자가 빙허 현진건을 특히 주목해 온 이유는 그의 역사유적 기행문이자 수필집 『단군성적순례』에 있다. 원래 이 역사유적기행문은 동아일보사가 ‘단군릉수축운동’에 참여하면서 기획해 빙허 현진건을 제1차로는 1932년 7월 8일부터 22일까지 묘향산⸱평양⸱강동⸱강서⸱구월산 등지를, 제2차로는 1932년 10월 23일 강화도 일대를 특파원으로 파견하여 쓰게 한 것으로,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해방후에 시인이자 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가 1948년 1월 7일 자로 서문을 쓰고, 1948년 2월 23일 자로 예문각에서 단행본으로 발행하였다. 그의 사후에 서문과 목차를 포함하여 4×6판 108면(내표지와 판권지 제외)으로 발간한 것이다. 현진건의 무남독녀는 월탄의 며느리이기도 하니, 빙허와 월탄은 사돈 간이다.

3. 현진건은 『단군성적순례』에서 당시 있는 그대로를 써 내다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 1948년 2월 23일, 예문각(藝文閣) 발행. 4×6판, 108면(내표지와 판권지 제외). 백두산 그림으로 표지를 장정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 1932년 7월 29일부터 11월 9일까지 5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 1948년 2월 23일, 예문각(藝文閣) 발행. 4×6판, 108면(내표지와 판권지 제외). 백두산 그림으로 표지를 장정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빙허 현진건은 당시 있는 그대로를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에 썼다. 유적에 관한 해석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내용을 각색, 또는 날조하지는 않았다. 우리 민족의 문화유적을 관찰한 역사유적 기행문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려내는데 충실한 것이다.

순례길에 오른 빙허는 우선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무찌른 살수대첩의 감회에 젖은 것도 잠시, 세 토막 난 채 흩어져 있는 을지문덕의 석상을 보고는 너무나도 무참한 현실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어 묘향산에 있는 단군굴을 찾은 빙허는 단군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남겨주신 위대하고 찬란한 문화적 유업이 잘 보존되기는커녕 조락한 채 버려져 있는 사실에 대해 몸 둘 바를 모른다. 빙허는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왔는고.”라고 자책한다.

빙허의 행보가 대박산(大朴山)에 있는 단군릉, 구월산에 있는 단군대, 마니산에 있는 제천단으로 이어질 때마다 송구스럽고 한탄스러움은 그 도를 더해 가기만 한다. 빙허는 이 기행문의 끝을 나철(羅喆, 1863~1916)의 한시를 소개하며 막을 내리고 있다.

빙허 현진건은 민족주의 경향의 작품을 여러 편 발표했고, 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2년 6월 10일 출옥한 셋째 형 현정건(玄鼎健)을 병석에 눕혀놓고 순례길에 올랐기 때문인지, 국조(國祖) 단군을 흠모하고 국토와 민족을 아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 빙허의 이 기행문은 식민지시대의 독자들에게 우리 민족혼을 분기탱천시켰다.

빙허가 『무영탑』 『적도』 『흑치상지』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발표한 것은 이 기행문을 써 내려간 1932년 이후이다. 이것으로 볼 때 빙허의 작품에 흐르는 민족주의 정신은 단군민족 정신임이 분명하다.

4. 이제라도 빙허 현진건을 기억하자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 [사진 제공 – 이양재]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 [사진 제공 – 이양재]

빙허 현진건은 1900년 8월 9일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태어나, 1943년 4월 25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137-61에서 사망하였다. 꼭 80년 전이다.

빙허 현진건은 일제 식민지시기의 많은 문인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것과는 달리 친일 논란이나 의혹이 전혀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로서 궁핍하면서도 민족의 자존과 지조를 지켰다.

그는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나, 해방된 지 60년이 되던 2005년 8월 15일에 와서야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 대구에서는 아직도 그를 잊고 있다. 보수의 대구가 민족주의자 빙허를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현재 빙허의 마지막 거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137-61 고택도 지금 폐허가 되어 있다. 필자는 서울에서라도 그 고택이 수리되어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 필자는 빙허 현진건의 80주기를 맞아 기행문 『단군성적순례』를 꺼내 보며, 그 참된 가치를 되새겨 본다. 빙허는 소설가로서 역사학도로서 부족함이 없다. 필자는 민족주의자 빙허 현진건을 숭모한다. 이제라도 빙허 현진건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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