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안희제(왼쪽)와 근재 이현익. [사진 제공 - 김동환]
백산 안희제(왼쪽)와 근재 이현익. [사진 제공 - 김동환]

만주 동경성(東京城) 대종교총본사에서 두 사람이 마차를 탔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와 근재(槿齋) 이현익(李顯翼)이다. 안희제는 식자라면 모두 아는 항일의 선각이다. 이현익 역시 흥업단(興業團)과 신민부(新民府)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종교 항일투사다. 두 항일투사는 동경성역으로 내달렸다. 그 때가 1937년 10월 어느 날이다.

기차에서 육중한 인물이 모습을 보였다. 육당 최남선이었다. 만철(滿鐵)의 위촉으로 북지순회(北支巡廻) 강연 기회에 발해 고도 동경성(東京城)을 찾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친일신문인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1938년 4월 취임)으로도 위촉된 상태였다.

그 순회 기행 중 가장 중요한 사안이 대종교총본사가 있는 동경성 방문이었다. 육당 스스로가 밝혔듯이, 당시 대종교 교주인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동경성을 찾은 것이다.

육당의 윤세복에 대한 존경심은 남달랐다. 그가 윤세복을 ‘단애선생(檀崖先生)’이라 깍듯이 호칭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육당에 있어 선생이라는 호칭은 쉽게 사용하지 않는 존칭이다. 육당이 “나는 지금까지 평생 선생이라고 부르는 이가 없으나, 오직 도산(島山) 한 분만은 선생으로 안다”고 말했다는 이광수의 증언에서도, 그에게 선생이라는 두 자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허당 윤세복(왼쪽)과 육당 최남선. [사진 제공 - 김동환]
허당 윤세복(왼쪽)과 육당 최남선. [사진 제공 - 김동환]

윤세복을 찾은 육당은 그 앞에서 공손히 엎드렸다. 윤세복은 반가움에 앞서 길게 탄식만 했다. 육당의 친일적 삶에 대한 윤세복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두 사람은 밤이 깊도록 수작(酬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대종교의 문제를 화제로 심도 있는 이야기도 건네게 된다. 육당의 다음 기록이 확인해 준다.

“석식(夕食)을 초초히 마치고 백산(안희제를 말함-인용자 주)의 인도로 단애 선생을 찾았다. 선생을 뵙는 것이 동경성을 온 기망(期望) 중 가장 주요한 일건(一件)이기 때문이다.…(중략)…몇 번 골목을 꼽쳐서 커다란 기간(旗竿)의 서있는 점막(店幕)같은 어느 노방(路傍) 일방자(一房子)로 도입되었다. 고호(叩戶)에 응하여 ‘뉘요’ 하는 것이 이미 반가운 선생의 음성이다. 여기가 선생의 장수처(藏修處)요, 또 응문(應門)의 척동(尺童)이 없으심이다. 호비(戶扉)를 열뜨리고 이윽이 보시다가, 부복(仆伏)하여 ‘아무올시다’ 하는 말씀을 듣고는, 반기기보다 감(感)이 극(極)하여 차차우우(嗟嗟吁吁)만 하신다. 빈변(鬢邊)의 백설이 먼저 그 동안의 풍상을 말하는 것 같아서, 나도 한참 속어(續語)할 바를 모르고 미우(眉宇)만을 쳐다 뵈었다. 한참 만에 조금씩 정화(情話)를 주작(酒酌)하여 웃음 반 눈물 반의 장면이 되풀이하는 중에, 선생 본래의 강정(剛正)하신 풍격(風格)이 시방도 의구(依舊)하시기는 새로에 계강(桂薑)의 미(味)가 유구유소(愈久愈疎)하심을 살피고 참으로 든든하다는 생각이 났다. 말은 대교(大敎, 대종교 원로들이 대종교를 높여 부르는 말-인용자 주)의 진행을 중심으로 하여 연연히 끝이 없었다.”(최남선, 『송막연운록』)

윤세복을 찾은 육당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 글이다. 육당은 윤세복에 대하여 선생이라는 호칭과 함께, 그의 글에서는 쉽사리 발견할 수 없는 극존칭의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더욱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어버이처럼 꾸짖는 윤세복의 가르침도 육당은 아래와 같이 숨김없이 서술했다.

“거기 이어 불녕(不侫)의 행장(行藏)과 및 종종의 전문(傳聞)에 대하여 책계(責戒)와 격양(激揚)을 섞은 친절하신 제명(提命)을 나루(覶縷)히 하심에는 괴송(愧悚)과 감회에 몸 둘 바를 알지 못하였다. 부앙천지(俯仰天地)에 어디 가서 이러한 정리구도(情理俱到)한 회도(誨導)를 다시 받을꼬 하면, 이 밤을 다하여 이 말씀을 더 듣자와도 가쁠 줄이 없었다.”(최남선, 『송막연운록』)

그의 친일 소문과 관련하여 윤세복의 자상한 꾸짖음에 대해서도, 육당은 부끄러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가장 공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 깨우침의 훈도에 감격할 따름이었다. 당시 육당이 대종교총본사에 3일간 체류하며 대종교의 교원(敎源)과 교리(敎理)에 대해 강의하듯 논구한 것도 그의 대종교에 대한 애착과 무관치 않았다.

이것은 윤세복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에 앞서, 자기가 마음으로 의지해 살아온 대종교라는 집단에 대한 외경과도 무관치 않았다. 육당이 남긴 다음의 시구도 눈에 들어온다.

“떠돌던 난봉자식/돌아옴만 기뻐하사/때씻고 새 옷 입혀/사당(祠堂) 절도 시키시니/인제야 어버이 마음/모른다고 하리까”(최남선, 『송막연운록』)

육당은 친일적 자신의 모습을 난봉자식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윤세복이 따뜻하게 맞아줌에 감격도 한다. 또한 윤세복이 단군천진전(사당)에 정중히 절도 시켰다. 윤세복을 어버이로 기대고 있는 육당의 심회도 엿보인다.

그러나 1939년 4월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취임한 육당은, 오히려 친일의 늪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더욱이 1943년 11월에는 「학도(學徒)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매일신보』1943년 11월 5일)라는 글을 통해, 신라 화랑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일본 신황(神皇)의 성전에 갖다 붙여 ‘보람있게 죽자’고까지 외쳐 댔다.

반면 이 시기 윤세복은 영어(囹圄)의 몸이었다. 대종교를 항일단체로 규정한 일제가, 1942년 말 대종교지도자 동시에 검거하는 사건(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이라 함)을 자행했다. 당시 윤세복은 수괴(首魁)로 지목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는다. 그리고 목단강 액하감옥(掖河監獄)에 수감 중이었다.

육당은 윤세복으로부터 더욱 멀리 달아나는 듯했다. 그의 삶이 대종교적 가치와 뗄 수 없었음에도, 지사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주의자는 못되었다. 단군이라는 민족적 혹은 동북아적 의미에 대한 끝없는 궁구의 뒤에는 대종교라는 정서적 모태가 도사리고 있었지마는,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자세로 우회했으며, 변절이라는 방법으로 정면돌파를 거부했다.

공교롭게도 윤세복의 당호(堂號)는 허당(虛堂)이다. 말 그대로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며 살았다. 그의 의·식·주가 남루함, 굶주림, 허름함이었음만 보아도 헤아리게 된다. 반면 육당(六堂)은 채우며 살려 한 인물이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군림한 듯했으나, 소인기(少忍飢)의 교훈은 새기질 못했다.

허당과 육당의 사이는 허물이 없었다. 종문(倧門)의 선후배로 이심전심했으며, 스승과 제자처럼 베풀고 존경했다. 인자함이 어버이 같았고 극진함이 자식보다 더했다. 육당의 변절을 연민하며 깨우치려 한 것이나, 허당의 질책에 부끄러워 고개 조아린 이유다.

해방 후까지도 허당의 육당에 대한 연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1950년 5월 5일(음력) 제7회 대종교 교의회(敎議會)를 통해 발포된 『대종교규범(大倧敎規範』(5장 12절 151조로 구성)의 기초를 육당에게 맡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서로 다가설수록 벽이 생겼고 서로 바라볼수록 암운이 끼었다. 허당은 품고 가려 했으나 주위의 눈총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육당 역시 다가서려 하였으나 변절의 낙인에 늘 좌절하곤 했다. 한마디로 항일과 친일의 간극이었다. 동경성역에서 육당을 마중했던 이현익(李顯翼)의 아래 기록이 그러한 미묘한 정서의 답일 듯하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대종교당에 선착(先着)하여 단군 천진전에 참배한 후 윤단애(윤세복-인용자 주) 선생께 진배악수(進拜握手)하시고 두 무릎을 꿇고 말없는 순간 두 눈에 손수건만 번갈아 젖어졌다. 너무 감개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어 ‘해외에서 큰 책임을 지시고 계신 선생님을 이처럼 뵈옵고 보니 평소에 하고 싶던 많은 말씀은 다 간 데 없고 그저 황감할 뿐입니다.…(중략)…금일 선생님께 기탄없이 평생 소회를 고백하여 후일의 편달을 기다리오며 끝으로 드릴 말씀은 떠날 때 다시 못 뵈옵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면 이 모두 선종사(先宗師, 무원 김교헌을 말함-인용자 주)의 훈도로 큰 기대를 가졌던 것은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운명인지! 민족의 불행인지! 여기에 논평할 것도 아니지만 좌우간 몇 분의 최후가 겨레의 앞에 원망 없는 길로 가셨는가가 궁금할 뿐이다.”(이현익, 『대종교인과 독립운동연원』)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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