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세 사람이 가자 오태섭과 둘이만 남았다. 오태섭이 아버지의 말년과 운명하시던 당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자라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싫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이해가 되고, 특히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너무나 안 돼 보여서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하였다. 남들처럼 호강도 누리지 못하고 젊었을 때는 힘이라도 셌지만 요양원에서 맥없이 있을 때는 정말 인생이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너도 알지만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 참 한심한 사람이었잖아. 비만 오는 날이면 술 취한 아버지 때문에 창피해서 견디기 힘들었지. 일하고 한밤중에 들어와서 술주정 부릴 때도 정말 싫었어. 생선 장수 한다고 머리에 큰 다라이 이고 시장통을 다니던 어머니가 밥을 차려주어도 밥상을 집어던지고 어머니와 자식들을 마구 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겠냐?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별로 용서가 되지 않아.

오태섭은 신돌석씨와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중학교 때는 다른 학교에 배정되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같은 동네였으니까 그런대로 어울렸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거의 같이 논 적이 없다. 신돌석씨와 오태섭 둘 다 평준화 1기로 시작된 고입 입시제도에 따라 1차로 실업계 지원을 해서 둘 다 떨어졌다. 2차 인문계 시험에 신돌석씨는 붙었지만 오태섭은 그것마저 떨어진 뒤 야간 공고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신돌석씨가 이사를 가서 보지 못했다가 군대 가기 직전 프레스 공장에 다닐 때 거기서 만났다. 워낙 이동이 심한 곳이라서 그런지 그가 연고도 없는 그곳에 들어왔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신돌석씨도 그다지 오래 다니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일찍 들어갔고 그가 그만둔 뒤까지 다녔다. 그런 곳에서 그를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말하자면 고향 친구를 객지에서 만난 셈이었다.

그는 그때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위 근무를 마친 뒤 바로 직장을 찾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여러 직장을 전전했는데 제대로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처럼 노가다는 안 하겠다고 기를 쓰고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프레스공장에서도 봉급이 너무 적다고 그만두었다. 사실 그때 노가다를 무시해도 기술 없이 공장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노임을 받았었다.

프레스공장에서 만났다 헤어진 직후 그는 사우디에 가려고 준비를 했고, 자기 돈 내서 비계를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사우디에 몇 년 있다가 와서 돈은 어느 정도 모으고 서울 변두리에 집 한 채를 사기도 했다. 그런데 직장이 안정되지 않으니 돈만 자꾸 까먹고 결국 노가다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용접 실력이 어느 정도 늘어서 자격도 따고, 전국 방방곡곡 공사판을 다녔다.

돌석이 니 소식도 종종 들었다. 노동운동한다고 했지? 처음에 들었을 때는 임마가 미쳤나 했다. 사실 노가다들은 노동조합, 노동운동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또래 노가다는 거의 그렇다. 정치도 별로 관심이 없다. 경상도면 국힘 찍고, 전라도면 민주당 찍는다. 다른 지역은 그때 그때 다르고. 그래도 우리 어릴 때는 전라도, 경상도 안 가리고 못 사는 놈들은 김대중 많이 좋아했는데, 이젠 안 그런 것 같애. 희한한 일이지.

그러던 그가 건설노조에 가입한 건 몇 년 전이란다. 같이 현장에서 만난 젊은 사람들이 자꾸 권해서 손사래를 쳤는데 가만 보니까 옳은 일인 것 같더란다. 그래도 꺼림칙해서 안 하고 있었는데 추락사고가 있었다. 젊은 사람인데 벤처기업인가 하다가 망하고, 공사판에 온 사람이었다. 그날이 마누라 생일이라면서 일 마치고 빨리 가야 한다고 조금 들떠 있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10층 정도에서 두 개 층 정도 아래 콘크리트 작업하는 데로 떨어졌다.

다행히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바로 응급실로 가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0층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8층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메트리스를 깔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구급차를 부르고 기다리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일손을 잡지 못하고 부상자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관리자들이 어서 작업을 지속하라고 하면서 해산시키려 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때 마침 본사에서 사람이 나와 있었다. 현장 몇 군데를 보다가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부상자가 누워 있는 곳으로 왔다. 그리고는 대뜸 데리고 내려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관리자나 고참들이 구급차가 와서 구급대가 이송해야지 여기서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이때 노조 간부가 나섰다. 구급대가 곧 올 텐데 왜 그러냐고 따지고 드니까 건방지다고 하면서 한 대 칠 듯이 달려들며 삿대질을 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보고만 있던 오태섭이 뭔가 속에서 뭉클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훈계조로 “이봐 젊은 사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들을 줄도 알아야지.”라고 목소리를 깔면서 한마디 했다. 본사 직원은 처음에는 흠칫 놀라면서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당신 일이나 해. 어디서 끼어들고 그래?” 이러면서 오태섭을 노려보았지만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신이라고 그러셨나요? 아 씨팔 내가 노가다로만 40년 살았지만 아무리 관리자라도 조카뻘 되는 놈한테 당신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네.”

갑자기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느꼈다. 용접기를 든 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건가? 아니면 참아야 하는가? 오태섭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사람들이 본사 직원을 얼른 끌고 갔다. 쫓아갈까 말까를 갈등하는 시간이 몇 초였을 텐데 한 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이 순간에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형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이런 순간을 얼마나 많이 겪었을까?

오태섭의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싸움 잘 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도 십장들이 잘 쓰려고 하지 않았다. 그 형도 그랬다. 그 형 역시 공사판을 전전했는데 형은 결국 폭행치사로 감옥에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그때부터 형의 인생이 꼬였다. 감옥 살고 나와 보니 형수는 어린 조카 남기고 도망가 버렸다. 끼리끼리 연결되어 있는 공사판에서 형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노가다판 블랙리스트에 걸린 것이었다.

오태섭은 그날 일 끝나고 술자리에서 바로 노조에 가입했다. 본사 직원을 끌고 나간 사람들이 고마웠다. 이런 일이 처음인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다들 오씨 아저씨 정말 짱이라고들 했다. 그날 추락한 친구는 어깨와 다리에 약간의 골절과 타박상이 있어서 며칠 치료하고 나왔다. 구급대원들 말로는 부상자를 함부로 옮겨서 자기들이 곤란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잘했다고들 했다.

그 뒤로는 노조가 하는 행사마다 따라다녔지. 처음에는 되게 어색하더라. 재벌 건설사 앞에 가서 집회하는데 대로변에 있는 문 앞에 앉아서 구호를 외쳐야 하는 거야. 어찌나 잘 안 되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더군. 그렇게 몇 번 하니까 점점 익숙해지고 노래도 그냥그냥 따라부를 정도가 되더라. 돌석이 너는 젊을 때부터 했지만 나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하기 시작했어. 그러니 힘들 수밖에. 근데 내 주변에는 내 나이 또래가 많아.

공사장에서 추락한 사고를 들으니 신돌석씨는 젊은 날의 경험이 생각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방공장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프레스를 하는 쇠공장엘 다녔다. 어디나 다 오래 다니지 못했다. 임금도 적었고 노동조건도 매우 열악했다. 그러다가 찾은 곳이 건축현장이었다. 그때는 알바라는 것을 할 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젊은 남자들은 공사장을 잘 찾았다. 가방공장 같은 가내수공업이나 프레스 하는 곳보다는 수입이 더 좋았다.

대학 다니는 사람들도 공사장에 왔다. 수입이 그런대로 괜찮고 방학 때만 하고 말 수도 있으니까 쉽게 찾았다. 신돌석씨 친구 중에도 대학 다니면서 방학 때는 공사장을 찾는 애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나중에 알고 보니 노동현장에 가기 전에 돈도 마련하고 육체노동도 한다는 생각에서 간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렇게 시작해서 계속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찾은 공사장인데 작은 건물을 짓는 곳이었다. 거기서 일하다 떨어졌다. 아직도 꿈 속에서 아주 가끔 추락하는 꿈을 꾼다.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때는 떨어진 놈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때였다. 지금은 철망도 치고 여러 가지 장치도 많이 한다고 하는데도 전체 산업재해 중 사망사고의 55%가 건설현장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건설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7%라는데 이렇다면 정말 대단히 사고가 많이 나는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요즘 건설노조를 건폭이라고 윤석열이가 했던 모양인데 이런 보도 나올 때마다 열불이 난다. 내가 뭐 노조에 대해서 아냐. 그저 수박 겉핥기지. 하지만 이놈들이 하는 이야기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더라. 평생 노가다로 산 사람으로 이런 소리 들으면 화딱지가 막 솟아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폭력배한테 당한 사람들이지, 어찌 폭력배냐?

뭐 사실 노가다판에 폭력배가 없는 건 아니야. 바로 박준범이 같은 녀석들이야. 그 자식 평생을 깡패로 살았어. 지가 무슨 운동을 해? 그냥 선거 때면 대중이나 그 수하들 쫓아다니면서 선거운동했지. 그 외는 주로 폭력배로 건설현장에서 설치고 다녔어. 사람들 채용에서부터 임금, 함바 운영 등등 이런 것들을 조폭 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가 대부분이었거든. 박준범이는 마포, 용산 등에서 세력이 꽤 있었지.

오태섭 말로는 윤남우가 박준범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얼마 전까지 달라진 게 없었단다. 그러다가 지난 대선 때부터 갈라졌는데 박준범은 이낙연파로 이재명을 못잡아 먹어 안달이 난 쪽이 되었고, 윤남우는 이재명 지지파가 되었단다. 그걸로 서로 말다툼하다 박준범이 윤남우에게 주먹을 휘둘렀는데 이제는 윤남우도 만만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단다. 그래서 둘이 치고받고 하다가 옆에서 뜯어말린 일도 있었단다.

어째 셋이 있을 때 윤남우가 떨떠름한 것 같다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이제 환갑도 훨씬 지난 나이가 되었는데 그냥 고분고분하고 살 까닭은 없다.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 문제 못지않게 이권의 문제가 끼었을 거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박준범이 더 이상 윤남우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된 것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 보니 그것 이상으로 사람들 사이를 규정하는 것이 없었다.

건설 현장은 다른 사업장과는 달리 건설사의 직접 고용이 아니라 이른바 십장, 오야지 등이 팀을 짜서 고용되는 오랜 관행이 있었다. 그것도 몇 단계 하청으로 되어 있어서 그 무리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본사는 물론 말단 관리자나 십장 등에 잘못 보이면 일자리를 얻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럴 때 인간시장이라 불리는 곳에 가서 자기를 팔아야 했다. 새벽부터 성남 같으면 세곡동으로 나가 일자리를 구걸해야 했었다.

그때 폭력배들이 끼어들어서 소개비를 받거나, 다단계 고용의 단계마다 돈을 뜯어갔다. 그 이권을 차지하려고 조폭들끼리 칼부림이 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항의하다가 반죽음이 되도록 맞은 사람도 수두룩했다. 신돌석씨는 군대 가기 전 아주 어린 나이에 그런 이들을 목격했다. 다행히 동네 사람 덕에 인간시장에는 별로 가지 않고 일자리를 얻었는데 사고 난 뒤 때려치웠다. 그리고 군대 갔다 와서는 다시는 안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비합리한 구조를 극복하고 노조와 당당하게 교섭해서 채용하라고 요구한 것이 지금의 건설노조다. 물론 건설노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노조 결성이 어느 정도 쉬워지자 조폭들이 노조로 변신한 곳도 없지 않았다. 박준범이 그랬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건설사 사장으로 갈아탔다. 때로는 인력사무소 등 그럴 듯한 이름을 쓰면서 채용 비리를 일삼는 조폭들도 있고, 그런 일들을 동시에 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소속 건설노조는 오히려 그런 자들을 건설현장에서 축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 윤석열 정권은 그런 자들의 비리를 마치 건설노조가 저지르는 것처럼 만들어서 공격하고 있다. 건설노조 때문에 이윤이 줄어든다고 생각한 건설사들은 정권이 앞장서서 노조를 탄압해주자 옳다구나 하고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떠들고 있다. 마치 건설노조가 거대한 비리덩어리라도 되는 듯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어떤 놈들은 나라도 잡아넣고 싶다. 노가다 피 빨아먹고 사는 준범이 같은 깡패들 정말 많은 게 공사판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건설사다. 그런데 건설사의 비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귀를 씻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정치자금 받는 곳이니 봐주는 거겠지. 이제 노가다들도 그 정도는 안다. 조폭들을 조금씩 끼워 놓고, 에먼 건설노조만 잡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노조만 말이다. 그러니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참을 수 있겠나.

오태섭은 흥분을 못 참겠다는 듯 소줏잔을 급하게 들이켜고는 자기 같은 노인네도 화가 나는데 젊은 사람들은 오죽하겠냐고 하였다. 정말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노동현장이 젊은 사람들을 외면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그러니 애 낳고 싶겠냐고 하였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었다. 화물연대 조합원들과 1인 시위할 때 들었던 것 같다. 맞다. 출산 장려 어쩌구 하면서 거금을 낭비하지 말고 노동현장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신돌석씨도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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