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책은 그 바탕이 무엇이었건 대체로 아래와 같은 발달을 거친다. 즉, “필사본 시대 ⟶ 목판본 시대 ⟶ 목활자본 시대 ⟶ 금속활자본 시대 ⟶ 활판인쇄술 시대 ⟶ 옵셑인쇄술 시대 ⟶ 전자출판 시대” 등이다.

물론 목활자본 시대에 교니(膠泥)활자가 있었고, 금속활자본 시대에도 목활자나 바가지(匏)활자 도(陶)활자 상아(象牙)활자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근대식 활판인쇄술 시대에 등사본인쇄라든가 석판인쇄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 시대의 가장 발달한 인쇄술의 주종은 아니었다.

또한 이러한 변천 과정에서 근대에도 목활자나 목판본이 만들어져 출판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니, 대체로 각 출판 및 인쇄술은 각기의 시대에 뒤섞여 사용되었다. 즉 21세기에도 복고적인 목판인쇄나 활판인쇄술을 시도하는 출판업자들이 있다. 옛 목판으로 다시 찍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판을 만들어 인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출판 및 인쇄술의 변천이 가져온 출판물을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형태서지학(形態書誌學)이다. 고고학에서는 수백 년, 수천 년의 시간 편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지학에서는 1년이나 2년의 시간 편차는 큰 펀차이다. 때에 따라서는 하루 이틀의 시간 편차를 세어야 할 때도 있다. 형태서지학이든 내용서지학(內用書誌學)이든 서지학은 꽤 까다로운 학문이다.

그런데 출판 및 인쇄술에 있어 필사본 제작은 각 시대를 막론하고 전 기간에 걸쳐 가장 위조가 쉬운 원본이나 사본의 제시 방법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를 아래에 제시한다.

하지만, 필자가 이 글에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들추어내고 비판하여도, 아래에서 [황사영백서]를 비판하여도, “나는 천주교에 매우 우호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내가 “천주교를 싫어한다”라는 오해는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신 잡동산이]

필사본 위조 문헌
- [콘스탄티누스 기진장]과 조선 후기의 변조 문건 [황사영 가백서] 

 

1.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사진 제공 - 이양재]
[콘스탄티누스 기진장(Donatio Constantini, 寄進狀)], 8C, 양피지에 작성. 로마교황청 소장품, 8세기에 출현한 이 문서가 약 700여 년이 지난 후에 로렌초 발라에 의하여 위조된 문건임이 논증되었다. 1,200년 전에 위조된 문건이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세기적인 위조 문건 가운데 [콘스탄티누스 기진장(Donatio Constantini, 寄進狀)]이라는 문건이 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Ι, 274~337)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때 로마 교황 실베스테르 1세(Sylvester Ι, 314~335)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탈리아 기타 서방 여러 지역의 종교상 및 세속적 통치권을 헌납하였다는 것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 기진장은 출현한지 700년 뒤에, 1440년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1407~1457)의 저서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 가진 허위성에 관하여(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 1440)]에서 위조된 세기적인 허위 문건임이 논증되었다.

중세시대의 한 로마 교황이 허위 문건을 통하여 세계를 훔치려 한 것이다. 이 문건이 출현한 8세기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천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소동이 허위의 헛된 짓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1440년 로마 교황의 말이 곧 법이던 중세시대에 33세의 나이로 이러한 사실을 밝힌 로렌초 발라의 진실을 향한 열정은 실로 대단한 것임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러한 진실과 진리를 향한 용기가 없이 서지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2. [황사영 백서]와 [황사영 가백서]

[사진 제공 - 이양재]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한 [가백서(假帛書)]. 서울 중구 명동성당 소장품, 1929년 촬영 사진.  [사진 제공 - 이양재]

[황사영 백서(帛書)]는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1785년(정조 9)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당시 모화사상에 의하여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식하였던 그는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그리고 [황사영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중국인)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2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禮部)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황사영 가백서(假帛書)]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은 빼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3. 잊혔던 [황사영 백서]가 다시 알려지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Mutel, G. C. M.) 주교가 입수하였고, 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로마교황에게 전달되어,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후일 원본 크기로 양지(洋紙)에 영인 되었다. 이 영인본은 간간이 고서 시장에서 유통된다.

그런데 황사영이 꿈꾼 대로 조선이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되거나, 서양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이 조선을 침략했다면, 과연 조선이 개화하고 근대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했을까? 아니면 조선이 좀 더 일찍 서구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천주교에서는 황사영을 복자(福者)로 보고 있지만, 나는 그를 반역자로 본다. 종교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조선시대의 왕조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백성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국체(國體)의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4. 맺음말 ; 역사 사료의 취사 선택에 대하여

[콘스탄티누스 기진장]과 [황사영 백서]의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 보며, 나는 중세시대나 조선시대에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위조하거나 날조한 사료를‥‥‥, 특히 천주교 신유박해 당시에 황사영의 “백서를 대폭 축소한 [가백서]를‥‥‥ 만들었다”라는 위조 및 변조한 예를 돌이켜 보며 중요한 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역사 사료에서는 “당대의 원본이 나타나더라도 실물을 검토하기 전에 눈에 보이는 증거가 증거의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또는 면피를 위하여 당대의 사료도 위조하는 판국이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사실을 왜곡하기 위하여 위조 문건을 만드는 판국이다. 즉 후대인들이 자신의 주장과 유익을 위하여 전대의 사료를 위조하는 일이 흔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지학이나 문서 분석학을 기본학으로 배워야 한다. 사료를 위조하거나 날조하는 것은 사기(詐欺)이자 사기(邪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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