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연재를 시작하며

순암 안정복의 저서 가운데 『잡동산이(雜同散異)』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유서(類書)이다. 즉 백과사전의 일종인 셈이다. 이 ‘잡동산이’란 서명(書名)에서 ‘잡동사니’라는 말이 나왔다. ‘잡동사니’란 “잡다한 것들이 한데 뒤섞인 상태”를 말한다.

지난 47년 동안 내가 보아온 문화재에는 잡동사니가 많다. 그리고 나는 여러 잡다한 것에 뒤섞여 있는 천하에 유일한 문화재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잡동사니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것도 있다.

애서(愛書)운동가로서 내가 겪은 잡동사니와 같은 문화재 이야기를 여기에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체계적인 글이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주제의 순서 없이 단편적인 주제를 가지고 쓰는 글이다. 유서(類書)가 아닌 우리 시대의 그냥 ‘신 잡동산이’이다.

원래 이 새로운 연재를 3월 하순부터 하려 했다. 3월 9일 자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 제52회 연재의 끝에 “이제 3월 하순부터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新) 잡동산이(雜同散異)』에서 만납시다”라고 하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10여 일을 건너뛴다는 것은 긴장이 풀려 안 좋은 것 같다. 그냥 쉼 없이 매주 월요일에 연재하는 것으로 간다.


 

1. 인류 최대의 발명은 말과 글이다

단순한 의사 표현으로서의 말이 만들어지고, 구체적인 어순이 형성 및 정리된다. 사람은 말과 어순으로 생각을 하며, 말과 어순이 있어야 인류이며 인간이 된다. 말과 어순은 제1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글이 없던 시기에 인류 최초의 책은 일정한 내용을 외우거나 구술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후 말과 어순을 남기고 전달하기 위한 글이 발명된다. 글은 제2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2. 글을 기록하여 묶은 것이 책이다

글은 발명되자마자 기록으로 존재하는 운명을 갖게 된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나뭇잎(패엽)이나 풀입(파피루스), 죽간이나 가죽(양피지), 갑골, 바위, 직물, 청동 및 금속판 등등에 쓰였다.

갑골이나 바위 청동기 등등에 쓰인 글을 연구하는 것이 금석학(金石學)이다. 나뭇잎(패요)이나 풀잎(파피루스), 죽간이나 가죽(양피지), 직물이나 종이 등등에 쓰인 문헌을 묶은 것이 곧 책(冊)이다, 문헌을 묶은 것, 즉 책은 제3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3. 서지학이란?

묶인 책을 연구하는 것이 서지학(書紙學)이다. 서지학은 형태서지학과 내용서지학이 있다. 형태서지학(形態書誌學)은 책의 바탕 및 지질과 판본 제본 등등의 시대적 형식과 상황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내용서지학(內用書誌學)은 책의 내용이 어떻고 같은 책의 내용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등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책이 위서(僞書)인가 원서(原書)인가 연구하는 것은 내용서지학에 속한다.

4. 유네스코에서 규정한 책의 정의

유네스코에서 정한 책의 정의는 도서 출판통계를 작성하는 특별한 목적으로 정해진 규격을 말한다. 유네스코 규격에 의한 책(도서)은 적어도 49페이지(표지를 제외) 이상의 인쇄된 비정기 간행물을 말한다. 반면에 소책자란 적어도 5페이지 이상 48페이지 이하(표지를 제외)의 인쇄된 비정기 간행물을 말한다.

5. 천자문은 책인가?

천자문을 표지를 제외하고 49페이지 이상으로 편집하여 책으로 인쇄하여 묶으면 책이다. 그러나 표지를 제외하고 48페이지 이하로 편집하여 책으로 인쇄하여 묶으면 소책자이고, 5페이지 미만으로 인쇄하면 그저 유인물일 뿐이다. 유네스코에서 책을 이렇게 정의한 것은 각국에서 인쇄 출판한 도서를 통계 비교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6. 필사본도 책이다

그러나 서지학에서는 인쇄하지 않은 필사본(筆寫本)도 책이다. 또한 서지학에서는 책을 묶지 않고, 종이를 길게 연결하여 두루마리로 만든 권자본(卷子本)도 책이다. 서지학에서 책이란 보편적으로 문헌이 모여 철(綴)해진 것을 의미한다.

7. 일정한 문장을 새긴 석경이나 비도 책이라 할 수 있다

[비림(碑林)] 전시실 제1실 내부. 중국 산시성 [비림]은 비석문(碑石文)으로 이루어진 중국 고전 및 문화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사진 출처 - 시안비림 박물관]
[비림(碑林)] 전시실 제1실 내부. 중국 산시성 [비림]은 비석문(碑石文)으로 이루어진 중국 고전 및 문화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사진 출처 - 시안비림 박물관]

단편적인 문자를 쓴 갑골문 조각은 책이라 볼 수 없다. 대개의 갑골문은 문장을 새긴 것이라기보다는 점을 치기 위하여 문자를 새긴 것이다. 반면에 석경비(石經碑)라든가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는 체계적인 문헌을 새긴 것이므로 책이라 할 수도 있다.

반면에 암각화는 책이라 할 수 없다. 암각화는 기록적 성격이 있고, 일정한 내용을 표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순(語順)에 의한 편찬 의도가 없는 형상들을 무질서하게 새긴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 산시성 서안(西安)의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馆)에는 1,095기(基)의 석비(石碑)와 3,000여 점의 지석(誌石)이 보관되어 있다. 비림은 석비도서관(石碑圖書館)이라 말할 수도 있다.

8. 그림책도 책이다

문장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그림만 있는 그림책도 책인가? 형태서지학적 측면에서 보면 그림만 들어 있어도 책이다. 책의 형태적 본질은 일정한 목적을 두고 표현물을 묶어 놓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9. 전자책은 책인가?

20세기 중후반의 개념으로는 기계 장치 없이 맨눈으로 판독할 수 있는 것을 책으로 보았다. 20세기 중반기에 출현한 마이크로 롤필름(Micro Roll Flim)이라든가 마이크로피시(Microfiche)는 마이크로 리더기를 통하여서만 읽을 수 있었기에 책으로 분류하지 않으려는 관점이 있었다.

그러나 문헌을 영상(사진)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자사전이나 CD-Rom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러한 전자기기가 책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마이크로필름이나 전자책을 모두 책으로 인정하는 관점이 20세기 말에 대세로 굳어졌다. 마이크로필름이나 전자책도 책이다.

10. 미래의 책은 인공 지능(AI)인가?

현재까지의 모든 책은, 원시사회에서부터 현대의 전자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책은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위한 보조적인 기록 및 기억 장치였다. 그러나 울트라 슈펴 컴퓨터의 인공 지능은 미래의 책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을 위한 보조 장치로서의 인공 지능은 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보조 장치를 뛰어넘어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인공 지능은 책이라 할 수 없다. 모든 책은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위한 보조적인 기록 및 기억 장치에 그 고유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책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와 행복을 위한 보조 매체이다. 마이크로필름이나 전자책, 인공 지능 컴퓨터는 기계 장치와 전원이 없이는 가독(可讀)할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책은 기계 장치 없이 맨눈으로 판독할 수 있는 상태의 책이다.

11. 계속되어 온 인류 최대의 발명

나는 위에서. “말과 어순은 제1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고, 글은 제2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며, 책은 제3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이은 인류 최대의 발명을 더 언급한다.

종이는 제4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종이는 책의 이동과 보관을 자유롭게 하였다. 인쇄술은 제5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목판 인쇄술이든 활자 인쇄설이든 활판 인쇄술이든 인쇄술은 세상을 바꾸었다. 사진술은 제6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사진술은 영상 기록과 영화 예술을 끌어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제7차 인류 최대의 발명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지식의 검색과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아마도 제8차 인류 최대의 발명은 인공 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 될 것이다. 인공 지능은 현대의 경제 사회 문화를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의 소통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의 문화 자체가 바뀔 수 있다. 우리 인간이 인공 지능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공 지능의 활용 범위와 한계를 정해야 할 것이다.

 

신(新) 잡동산이

1. 만들어지는 복제품

세계를 돌아다니다 198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기원전 2세기의 파피루스 문서 조각을 매입한 적이 있다. 곡물 배급에 대한 기록이라 하는 것인데 15년여 전에 분실하였다. 은허(殷墟)에서 출토한 갑골 1점을 1990년대 초반에는 매입한 바 있다. 이 은허 갑골 1점은 내 서재의 어느 틈엔가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수 년 전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양피지 토라(Torah, 유대인 율법서) 두루마리도 매입한 바 있다. 조선 닥종이에 관심이 있어 11C부터 20C까지 우리나라의 고서(古書)와 고지(古紙)를 상당수 모으기도 하였다.

21세기의 요즘에 우리나라에 한지(韓紙)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듯이, 서양에서는 양피지가 아직 만들어지고 있으며, 이집트에서도 관광상품으로서의 파피루스가 아직도 만들어지고 있다. 북경의 유리창에는 경서(經書) 및 고전(古典)을 근래에 죽간(竹簡)으로 만든 책이 있고, 또한 관광상품으로 모조한 청동기를 유통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송원(宋元)이나 고려 시대의 금속판 불경의 복제품을 만들고 있다.

합천 해인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팔만대장경 가운에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密多心經)]이 있다. 줄여서 [심경(心經)] 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경은 책판 하나로 된 경이다. 팔만대장경 판목 가운데 이 [심경]만은 필요시마다 수시로 인출되어 그 고려시대 원 판목의 자체(字體)는 거의 다 뭉그러졌다. 따라서 후에 그대로 복각한 판목으로 계속 대체되어 왔고, 때로는 근대의 판목 각자장이 복원한 판목이 시중에 유통되면서 고려시대의 고판목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2. 만들어지는 모조품

옛 판본을 이용하여 다시 책을 찍어 내기도 하며, 아주 생짜로 고본(古本)을 위조해 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1949년 공산혁명 이후에 [광개토태왕릉비]의 탁본을 허용하지 않는다. 1949년 이후에 제작된 원탁본이 4~5점이나 될까? 그렇게까지 릉비로부터의 원탁 제작은 제지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이래 [광개토태왕릉비]를 목판에 모각(模刻)하여 찍어 고탁본처럼 위조한 모각 탁본이 여러 부 제작되었고,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모각 탁본은 원 탁본보다 그 크기가 좀 작으므로, 크기를 재 보면 쉽게 판별할 수 있다.

3.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중국의 대표적인 고서화 감정가 사수청(史樹靑, 1922~2007) 선생이, 1993년 2월 20일에 오전에 북경에서 써 주신 붓 글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비림(碑林)] 전시실 제1실 내부. 중국 산시성 [비림]은 비석문(碑石文)으로 이루어진 중국 고전 및 문화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사진 출처 - 시안비림 박물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중국의 대표적인 고서화 감정가 사수청(史樹靑, 1922~2007) 선생이, 1993년 2월 20일에 오전에 북경에서 써 주신 붓 글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비림(碑林)] 전시실 제1실 내부. 중국 산시성 [비림]은 비석문(碑石文)으로 이루어진 중국 고전 및 문화 도서관이라 할 만하다. [사진 출처 - 시안비림 박물관]

옛 것과 요즘 것을 많이 보면 시대가 보인다. 진위의 구분이 명확히 가능하다. 중국의 대표적인 고서화 감정학자 사수청(史樹靑, 1922~2007) 선생은 꼭 30년 전인 1993년 2월 20일 오전에 북경에서 만났을 때 나에게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이란 붓 글씨를 써 주셨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다녀라”라는 말이다.

나는 지난 47년간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하다. 책꽂이 30여 개와 모빌렉 12련을 가지고 있으니, 얼핏 계산해도 현대서 3,500~4,000여 책과 한적(韓籍) 1,500여 책, 고문서(古文書)와 고간찰(古簡札) 등은 1,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만권 서를 읽지 못했으나 삼천서(三千書)는 이곳 저곳 들추며 읽었을 법한데, 만리(萬里)는 넘게‥‥‥, 아마도 구만리(九萬里)는 넘게 다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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