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이번 회로 이 연재를 마치면, 3월 하순부터 다른 주제의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현재 정해 놓은 제목은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新) 잡동산이(雜同散異)』이다. 주로 책과 문화에 관하여 쓸 것이다.

이번 52회에서 나는 총 맺음말을 준비하였었다. 그러나 불법을 밥 먹듯 행하는 소송전으로 인하여 지난 10여 일을 정신없이 보냈기에 거창한 총 맺음말을 대신하여 이렇게 내 삶에 있어 미완의 사업에 대하여 소박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미완의 이준 사업

아마도 필자만큼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를 제대로 조명하려 노력한 인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준 열사도 가려지거나 왜곡된 면이 적지 않은데, 그러한 것 역시 바로 잡았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이준을 미완인 채로 남겨 놓고 있는 영역이 있다.

첫 번째가 북에 살고 있을 이준 친손들의 근황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가 이준을 현대인들의 사표로 기리는 것을 구현하지 못한 것이며, 세 번째가 이준기념관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첫 번째 미완의 영역, 즉 이준의 진짜 자손을 찾는 일 역시 북측 당국자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북청에 아직 살아 있을 텐데 찾고 싶다.

두 번째 미완의 영역, 즉 이준을 현대인들의 사표로 기리는 것을 구현하지 못한 것은 속 좁은 기념사업회의 전 모 회장과 그 주변의 임원들에게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준을 기념사업회의 전유물로 독점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미완의 영역, 즉 제대로 된 이준의 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인데, 그것은 이준을 왜곡한 세력으로 인하여 매우 힘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조속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 미완의 허준 사업

아마도 필자만큼 의성 허준(許浚, 1539~1615) 역시 제대로 조명하려 노력한 인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허준을 미완인 채로 남겨 놓고 있는 영역이 있다.

첫 번째가 북에 살고 있을 허준의 친손들을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가 허준을 과학자로 기리는 것을 구현하지 못한 것이며, 세 번째로 제대로 된 허준의 연고지에 허준기념관을 세우도록 하지 못한 것이다.

첫 번째 미완의 영역, 즉 허준의 진짜 자손을 찾는 일은 북측 당국자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황해도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을 텐데 찾고 싶다. 북측은 허준의 진짜 자손들을 찾아내 북이 말하는 고려의학의 종주국으로서 그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두 번째 미완의 영역, 즉 허준을 과학자로 기리는 것을 구현하지 못한 것은 속 좁은 한의사들에게 원인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허준을 독점하고 싶었기에 허준이 과학자로 기려질 때 자신들의 설 자리가 위축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미래가 과학 입국이라면, 한의학은 남아 전하는 유일한 우리 민족의 과학이라는 자각을 선양하여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미완의 영역, 즉 제대로 된 허준의 연고지 경기도 옛 장단 땅 일각(현 파주시)에 허준기념관을 세우는 것인데, 그것은 지역민들 사이에서 민족적 자각이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이제서야 지역민들 사이에서의 서서히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그 결과 1991년 9월, 허준의 묘소를 찾아내고 30년 만인 2021년 파주시장의 주선 아래 나는 파주에서 첫 강의를 하였다.

3. 민족의 영광을 위한 미완의 삶

『백두산정의 호랑이』, 박광림 작, 조선화, 260×20cm. 북경 C 컬렉션중에서. 북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과 남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100여점을 함께 전시하는 한라-백두전을 진행하고 싶다. 이미 5년 전에 기획하였으나 나서는 지자체가 없어 아직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두산정의 호랑이』, 박광림 작, 조선화, 260×20cm. 북경 C 컬렉션중에서. 북의 작가가 그린 백두산 그림과 남의 작가가 그린 한라산 그림 100여점을 함께 전시하는 한라-백두전을 진행하고 싶다. 이미 5년 전에 기획하였으나 나서는 지자체가 없어 아직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신이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은 미완의 삶이다. 완성의 삶을 산 사람은 전체 인간의 1%가 채 안 될 것이다. 우리 삶에서 하나의 완성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결집하고 심지어 대(代)를 물려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목표를 한 사업을 이룬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준 열사든 의성 허준 선생이든, 회화사나 민족사관의 연구이든, 우리 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영광을 찾아왔던, 그러한 것이 우리 민족과 내 개인에게, 그러고 내 가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인간의 삶의 본질은 생존이고, 그 생존을 위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존재하며 지금은 이렇게 떠들지만 내가 추구했던 내 삶의 사업은 영겁의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티끌조차도 되지를 못한다. 결국 신(神, GOD)이 아닌 인간의 모든 삶은 미완의 삶으로 돌아간다.

민족의 본질은 유사성을 가진 인간의 결집이다. 개인의 삶은 압살 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압살 되지 않기 위하여 민족의 이름으로 결집한다. 나의 삶은 하찮고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미완의 삶이 민족의 생존을 추구하는 이들의 결집을 힘입어 머지않은 시기에 그 작은 일부라도 달성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한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희망을 갖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이제 3월 하순부터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新) 잡동산이(雜同散異)』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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