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개선을 이야기할 때 통상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입장은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위해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정부든 보수적인 정부든 이 기조는 대체로 유지돼 왔습니다.

‘과거 직시, 미래 협력’이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미래를 위해 함께 협력하는 것을 마다하겠습니까?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는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는데, 일본이 식민지배의 책임을 전면 부정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과거 부정이 한일 간 미래 협력에 결정적 걸림돌로 되어 온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3.1절이나 8.15 광복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일본의 과거사 직시를 지적해 온 이유입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104주년 3.1절 기념식’ 기념사에서 ‘과거 직시’는 한마디도 없고 다만 ‘미래 협력’만 밝혀 놀라움과 함께 당혹감을 주고 있습니다.

즉,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고 임의로 규정한 것입니다.

일본이 과거에는 ‘군국주의 침략자’였으나 지금은 우리의 ‘파트너’라는 것입니다.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 현재 파트너’라는 단순한 논리에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 촉구가 모두 삭제돼 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배의 책임을 전면 부정하고 또 위안부 피해자나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자칫 일본 면죄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벌써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접한 일본의 언론매체들이 일제히 윤 대통령이 현안인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점과 ‘파트너’라고 한 발언에 주목했다고 합니다.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듣고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이 우리 국민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은 당혹해 하고 일본인이 기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아가,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위 발언에 이어 곧바로 “특히,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한일 협력이 필요한 이유가 북핵 위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순성에는 논리의 비약만이 아니라 행위의 무자비함도 들어 있습니다.

이 단순한 논리도 위의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 현재 파트너’마냥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북핵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기인한다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북핵 문제의 해결 주체는 ‘북한-미국’입니다. 물론 한국이 가끔 북미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지만 이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북핵 문제가 북핵 위협이라는 탈을 쓰고 일본까지 끌어들인 것입니다. 일례로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동해 공해상에서 한미일 군사훈련이 스스럼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것입니까? 윤 대통령이 그런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일관계 개선 때문입니다.

말이 좋아 ‘한일관계 개선’이지 실지로는 ‘한일관계 개선의 조급함’이 전폭적으로 반영된 것입니다. 지금 외교가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한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를 시급히 풀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일본 피고기업의 참여 없이 국내기업의 기부금만으로 배상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합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밝힌 단순한 두 가지 발언인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였지만 현재는 우리의 파트너’와 ‘북핵 위협 때문에 한일 협력 필요’란 명제는 사실상 ‘민족을 팔아 일본과 파트너가 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민족을 팔아 일본과 파트너가 되겠다!’ 우리 역사는 이를 두고 ‘반민족 친일’ 행위라고 불러왔음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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