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논리의 씨앗이다. 학문을 포함한 모든 질서는 개념으로 시작하여 개념으로 끝난다. 개념이 뒤틀리면 왜곡·억측·사설(邪說)이 난무하고, 개념이 무너지면 자주·자존·정체가 모두 붕괴한다.

무정체(無正體)·몰정체(沒正體)의 사회일수록 개념의 전도(顚倒)도 극심하다. 내 것과 네 것의 경계가 없고 주인과 노예의 구별도 허물어진다. 고려 말 이후 우리의 모습이 그러했다. 특히 20세기 들어서는 우리의 국권마저도 송두리째 뽑혀나간 기억이 있다.

일본의 신도(神道)가 우리의 국교(國敎)로 봉대(奉戴)되고, 일본어와 일본사가 우리의 국어와 국사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전통시대를 이끌어 온 중국의 꾸오쉐(guóxué, 國學)를 근대기에 들어 일본의 고쿠가쿠(こくがく, 國學)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개념이 고꾸라졌던 우리 역사의 아픈 경험이다.

우리의 진정한 ‘나라학문[國學]’이 다시 고개를 든 시기도 이 무렵이다. 전통시대 막바지에 각성의 논리로 등장하여, 식민지 저항의 무기로 체계화되었다. 과거 꾸오쉐를 비판하며 고쿠가쿠의 횡포에 맞서 포효하던 학문이 우리의 국학이다.

그 중심에 홍암(弘巖) 나철(羅喆)이 있었다. 그는 단군정신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문(文)·사(史)·철(哲) 재건에 새로운 디딤돌을 놓았다. 근 천년만의 기지개였다. 대종교 중광을 계기로 유교와 불교의 정신줄기를 배달(倍達)의 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문존숭의식을 한글사랑으로 혁파하였고, 탈중화의 역사학 정립으로 일제관학에도 대항하였다. 진정한 국교·국어·국문·국사의 정립을 통한 국학을 세운 것이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광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신채호나 박은식 등이다. 신채호는 단군시대의 선인(仙人)을 국교(國敎)이며 민족사의 정화(精華)로 보았다. 이것을 계승한 화랑을 종교의 혼(魂)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단군시대의 이러한 정신이 국학임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 『꿈하늘』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단군시대로부터 흘러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했다.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근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국학이 불학(佛學)·유학(儒學)과는 분명히 다름을 확인시키고, 양학(洋學)과 구별되는 국학의 의미도 상기시켰다. 특히 신채호에 있어 국학은 그의 국수(國粹) 개념과도 상통하는 의미였다. 그는,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관습·법률·제도 등의 정신을 국수로 규정하고, 이 정신의 출발을 단군에서 찾았다.

박은식 역시 국학의 근사치로 국혼(國魂)을 내세운 인물이다.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며, 국교‧국어‧국문‧국사를 국혼의 근본요소로 이해했다. 그의 국혼이 국학과 동의어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국망(國亡)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임을 강조하고,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은 반드시 회복된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마치 구한말 나철이 국학 중흥의 당위로 내세운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과도 흡사한 인식이다.

나철로부터 잉태된 이러한 국학의식은 우리의 문·사·철 방면에서 다양하게 영글었다. 주시경·김두봉·최현배 등으로 대표되는 어문민족주의나, 김교헌·신채호·박은식·정인보 등으로 회자되는 민족주의역사학이 그것이다. 또한 서일(徐一)·강우(姜虞) 등에서 살필 수 있는 삼일철학(三一哲學)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체계화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을 맞으며 우리의 국학은 좌초한다. 중화의 굴레, 일제의 잔재, 그리고 서양학문의 홍수 속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멍들어버렸다. 국학을 보수적 또는 국수적인 느낌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이다. 국학을 한국학으로 얼버무리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한국학이 학문적‧개방적이요 국학은 비학문적‧폐쇄적이라는 괴설(怪說) 역시 이러한 정서 속에서 싹텄다.

국학은 우리의 정체성과 밀접한 학문이다. 남이 우리의 학문을 부를 때 일컫는 한국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에 의해 ‘나’라고 하는 것이 국학이요,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 없이 ‘너’ 혹은 ‘그’로 지칭하는 것이 한국학이다.

그 동안 객체적·수동적 시각으로의 학문에 익숙해온 우리 학계에, 국학이 아닌 한국학이라는 명칭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립적 학문은 무너진 지 오래고, 수입된 학문에 의해 타율적 학풍이 지배한 정서적 결과라 할 수 있다.

근자에 들어 유사개념의 국학이 국학으로 오용되는 것도 문제다. 국학진흥을 내세운 기관이나 협의체, 국학을 걸고 추진하는 연구사업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부분이 유교(유학, 이하 유교로만 칭함)을 국학으로 내세워 칭하는 사례들이다.

국학을 내세운 이러한 기관이나 사업에, 중앙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예산 역시 만만치 않다. 그 역시 국학진흥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투입되는 혈세다. 여기서 학문진흥사업에 공공예산이 지원되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와전된 개념의 확산에 일조하는 듯한 모양새가 안타깝다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국학은 유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유교는 살핀 바와 같이 우리 국학의 극복 대상이었다. 나쁘다는 것과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다. 우리에 있어 유교는 학문의 가치로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긍정적 요소로서도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국학=유교’라는 개념은 단언컨대 잘못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개념의 오류가 중국에 잘못된 인식을 주지 않을까 두렵다. 자신들의 꾸오쉐가 대한민국의 정체성(국학)으로 자리 잡았다는 희열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셀프 소중화국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럼에도 고언(苦言)하는 지식인 하나 없다. 천학비재(淺學非才)인 필자가 부득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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