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을 지난 14일 전국연맹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만나 민주화운동, 시민사회, 진보단체, 종교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주체간 연대와 단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을 지난 14일 전국연맹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만나 민주화운동, 시민사회, 진보단체, 종교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주체간 연대와 단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이달 초 윤석열 정부를 '검찰독재'로 규정한 1970년대 민주화운동 원로들의 '비상시국회의' 제안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분석, 미래 전망에 대한 고민이 새삼 깊어지고 있다.

기존 질서가 허물어진 가운데 새로운 국제관계는 신냉전과 다극화, 각자 도생의 특성을 보이며 변화하고 있지만 낡은 국제관계의 구심력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앞세운 윤석열 정부의 지배담론은 급격한 시대의 변화와는 동떨어진 맹목적인 냉전동맹과 반북 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로부터 경제위기와 민생파탄, 전쟁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불안이 발생한다.

정부가 표방하는 '법과 원칙에 의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자 사회적 약자를 방치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반대의견을 눌러버리는 자의적 통치술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들끓고 있다.

'정치개혁'에 실패한 대가는 엄중한 것이어서 대의 대표성을 상실한 기득권 양당체제의 고착화, 나아가 총체적 민주주의의 위기로 돌아왔다.

'10.29 이태원 참사', '퇴행적 공안통치', '반노동, 반시민 유사 파시즘', '미중패권이 격돌하는 한반도 대리전장화', '평화공존을 거부하는 전쟁추구'를 비롯해 벼랑끝에 메달린 이들에게는 지금 당장의 위기가 숨가쁘지만, 피흘리지 않고 촛불항쟁의 정치적 결실을 가져간 169석의 제1야당은 민생과 민주주의, 평화가 도전받는 시기에도 자신들의 이권을 고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된 듯하다.

민주, 시민, 진보단체들은 당면한 현실의 엄중함에 대해 생각은 같이 하지만 쉽사리 함께 행동으로 옮기는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2017년 4월 29일까지 182일간 23차례의 범국민행동을 밝힌 1,700만의 촛불이 절박하게 외친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 한반도평화'의 과제가 무참히 흩날려진 지난 경험때문이리라.

'윤석열 검찰독재 반대의 기치아래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은 생각이 다르더라도 무조건 이 깃발아래 모여야 한다'는 비상시국회의 제안 원로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와 진보단체들은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763개 시민·종교·평화·진보단체가 망라되어 발족한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출범식장에서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전국연맹) 사무총장을 만나 이같은 현실에 대해 묻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김경민 사무총장은 지난 2018년 6월부터 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시민사회와 조직화된 진보대중운동의 경계를 부단히 넘나들며 한국사회의 미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표적인 활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985년부터 대구와이엠씨 자원봉사자로 시작해 사무총장 13년을 포함해 대구에서만 34년을 활동하고 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5년째 일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평생 직업은 '와이엠씨에이 간사'이다.

그가 만들어 왔고, 그의 지금을 만든 전국연맹이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다. 평생을 해 온 와이엠씨에이(이하 와이) 운동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역할을 해왔고, 그 와중에 와이라는 공간내에서 좌우간 갈등으로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운 그런 사례는 거의 없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와이운동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이 100년 와이의 굳건한 전통이라고 소개한다.

반독재투쟁이라는게 원래 주체로 보아서는 '국민연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시민사회나 진보세력, 종교, 나아가 제 정당까지 모여서 '반독재민주화 국민연합' 정도의 틀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러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비상시국회의를 제안한 선배들의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저평가되어 있고, 시민운동은 근원적으로 진보의 보완이어야 하며, 진보진영만의 진리가 아닌 진보성을 담지한 보편적 진리여야 한다는 언급도 '좌우합작이 민족해방운동 100년의 뿌리'라는 오랜 확신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심각한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그동안 민주당은 너무 많은 반칙을 했고 민중의 성과를 수없이 독점적으로 취했다. 사람들이 윤석열정부의 행태를 못참고 나오긴 하지만 '로열티'가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당이 잘해서 집권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못해도 자체적으로 집권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힘이 동원되고서야 간신히 집권을 하지 않았나"라고 하면서 "협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줘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스스로와 우리 모두에게 아쉬운 점은 '우리 사회의 현상과 미래 과제에 대한 총체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이론적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긴 시간 말을 이어갔다.

장소를 바꿔가며 인터뷰를 하고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전화가 울릴만큼 바쁜 일정이었지만 매사 성심성의로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소년같은 천진한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입에서 담배가 떨어지지 않을만큼 '진정한 끽연가'를 자처하지만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한다.

크지 않은 체격이지만 일에 몰두하면 보름이고 한달이고 누워 잠을 자지 않을 만큼 끝장을 볼 정도로 강골이다. 그래도 미진한 일은 후배들을 다그치기 보다 놓쳤겠거니 하고 조용히 스스로 해버리는 스타일.

아래는 일문일답.

김경민 총장은 '와이운동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명제가 100년 와이운동사의 슬로건이라고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김경민 총장은 '와이운동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명제가 100년 와이운동사의 슬로건이라고 소개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와이운동은 좌우의 날개로 난다

□ 통일뉴스 :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시민-민주-진보진영을 넘나들며 맹활약중이신데, 먼저 독자들을 위해 와이엠씨에(YMC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운동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 김경민 사무총장 : YMCA는 처음에 1844년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기독청년들이고 노동청년들이었죠. 그게 이제 1855년도에 세계동맹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은, 조금 이론이 있긴 하지만 1903년도에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생긴 거죠. 이게 현 서울YMCA입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독립협회 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됐다가 국가의 국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이냐를 갖고 의논을 하다가 와이엠씨에를 만들자는 결정을 합니다. 그때는 국권수호투쟁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으니까요. 중요한 사람들로는 고려공산당(상해파)를 이끌었던 이동휘이라던가,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같은 분들이 있죠. 이런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와이를 만들었고. 사실은 지금 우리도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1895년에 협성회가 생겼어요.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에 만들어진 서클이었는데 이게 와이의 전신이 아니냐, 원래 어소시에이션이라는 번역어가 협성회다라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그리고 이 협성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잖아요. 이렇게 한국와이엠씨에이는 당시에 세계적으로도 조금 유별나게 운동중심적인 전통을 가지고 탄생을 한 거죠. 학생운동의 정신이나 시 청년회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제 신민회 같은 곳에도 와이멤버들이 많이 관여를 했었고, 그 다음 1914년도에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라는 명칭으로 연맹이 생겼죠. 여기에 와이 멤버들이 굉장히 많이 관여를 했어요. 그러니까 내년 2014년이 한국YMCA전국연맹 110주년이에요.

이후 대구, 평양, 함흥같은 곳에도 지회들이 쭉 생겼고요, 와이가 아무래도 민족독립운동에 깊게 관여를 해왔잖아요. 3.1운동 34명중 7명이 와이에서 굉장히 활동을 열심히 한 멤버들이고, 3.1운동을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여운형도 이상재 선생의 밀서를 가지고 학생와이 대표 자격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대회에 참여를 했어요. 여운형은 이상재 선생이 제일 아꼈던 애제자이기도 했죠.

그렇게 와이운동의 역사안에는 좌우가 항상 같이 움직이는 전통이 많습니다. 신간회 의장이 조선일보 4대 사장이었던 이상재 선생인데 그 당시 와이를 대표하는 지도자였거든요.

이후 와이는 70, 80년대를 쭉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튼 운동사 안에서 와이는 교육운동이라든가, 풀뿌리 차원에서 다양한 농민운동을 벌이는 등 현장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운동들을 굉장히 넓게 펼쳐 온거죠.

그리고 2.8독립선언도 재일본 한국와이에서 했어요. 나름대로 와이는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고, 또 그 와중에 와이라는 운동공간안에서 좌우간 갈등으로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운 그런 사례는 거의 없어요.  

거의 다 같이 이렇게 통합해서 운동을 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대구와이 사무총장을 했는데, 신간회가 제일 오랫동안 있었던 곳이 대구거든요.

1927년부터 시작한 신간회가 1935년에 제일 마지막으로 해소된 곳이 대구입니다. 아무튼 그런 전통이 가장 세게 남아 있습니다.

대구의 경우에도 와이를 대표하는 어른이 계시고, 와이와 관련된 좌파운동 리더들이 현장과 실무를 맡는 이런 시스템으로 가 있더라구요. 굉장히 전형적인 경우에요.

좌우가 멱살잡고 싸우는 건 본적이 없어요. 와이운동에서는 그런 사례가 없어요.

20년 이후에는 좌우가 굉장히 극렬하게 대립했거든요. 이건 역사적으로 충분히 정리는 안됐지만, 당시 '적극신앙단'(30년대 전반 기독교 개혁운동을 표방하면서 독립인재 양성응ㄹ 목적으로 설립)운동이라고 해서 농민운동같은 걸 열심히 했던 이대위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이 와이운동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대위와 박헌영이 굉장히 친한 사이라는 거죠. 박헌영이 북에서 사형당한 사유중에 와이 경력이 있어요.

그래서 이대위와 박헌영의 협의에 따라 신간회가 만들어진 것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얘긴 역사적 근거는 없어요. 하여튼 이래서 'YMCA는 좌우의 날개로 간다'는 것이 그냥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어 있죠.


□ 네, 대단하군요.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우는 늘 대립하고 갈등이 그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 꼭 그렇게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일부 그렇게 서술한 시각이 있기도 하겠지만 당시의 운동을 다시 잘 구성해서 보면 꼭 그렇진 않을 거에요. 조선시대는 당파갈등, 민족해방 당시에는 이념투쟁이라는 식으로 계속 분열하는 한국사를 서술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너무나 많은 다른 사실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 유독 와이운동에서 이런 전통이 오랫동안 축적될 수 있었던 비결같은 것 무엇이었을까요.

■ 유럽만해도 그렇지 않은데, 한국 와이는 에큐메니컬 기독교운동의 전통이 있어요. 교단이나 뭐 이런 거 안따집니다. 가톨릭이나 정교회 같은 것도 다 크리스찬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에큐매니컬 전통을 조금만 확대하면 민주화운동, 사회주의 운동 다 합쳐서 다 모든 선한 세력이 일하는 걸로 개념이 확대되고, 모든 선한 세력과는 연대하는 이런 개념으로 넓혀져 왔던 것 아닐까 싶네요.

 
□ 와이 운동을 하시던 분들중에 에큐매니컬 전통이라는 것과 조금 상반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무장투쟁의 길로 나가신 분들도 계시나요.

■ 무장투쟁도 많았겠죠. 원래 무장투쟁론은 사실은 영남쪽이 주류였잖아요. 이회영 선생도 계시지만 안동쪽에 있던 이상룡 등이 신흥무관학교를 만들고 한 건데... 제가 보기에는 노선상으로 국내 와이운동에 개량주의 운동이라는 개념은 없었어요. 영남쪽에서 와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3.1운동이 좌절한 이후 광복군에 들어가거나 광복군을 모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남쪽은 기본적으로 무력항쟁 노선이 주류 노선이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는 노동운동과도 결합하고 계몽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3.1운동이 큰 좌절로 다가오니까 와이운동하던 사람들 중에 광복군을 모아가지고 신흥무관학교로 보내거나 군자금 모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노선상 와이운동은 무력항쟁 노선과 결을 달리한 건 아니구요. 제가 알기로는 내부에서도 무력항쟁노선이 전혀 특이한 일이 아니었어요. 당시에도 무장투쟁은 당연히 받아들였다는 거죠.

이동휘 선생이 와이 멤버였는데, 이분이 원래 만주에서 개척교회를 마흔개나 만든 전도사였어요. 그러다가 레닌을 만나면서 고려공산당이 되는 거잖아요. 이 분들 사이에는 소위 말하는 '비폭력투쟁' 같은 개념은 없었어요. 대표적인 게 명동학교잖아요. 명동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신흥무관학교와 얼마나 깊게 관련이 있습니까. 와이 활동하는 사람중에 명동학교나 만주쪽 무장투쟁세력과 내면적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이상재가 이동휘를 만나는 것도 여운형을 매개로 해서 국경에서 만나거든요.

제 생각엔 문제가 되는 건 자치파죠. 이승만류의 자치파 흐름이 와이 안에도 있었지만 이게 주류는 아니었고 와이 운동의 중심에는 민족주의 전통과 사회주의 지향이 있었어요. 

이야기가 좀 길어지긴 하는데, 그럼 이런 전통이 어떻게 기교와 연결되느냐는 거죠. 대구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대구교보는 당시 굉장히 과격한 운동의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그럼 이게 기독교와 어떻게 연결되느냐하면, 대구에 보면 경고등학교 전신인 대구고보 이런 데가 이렇게 굉장히 과격한 운동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은 미션스쿨인 계성학교가 그 중심이었어요.

이 학교의 교사가 3.1운동 대구 대표였구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단야도 계성학교 출신이에요. 고려공산당 청년위원장을 했던 신철, 남로당 군사총책이었던 이재복 같은 사람들이 계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재복은 박정희를 남로당 당원으로 추천한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다 크리스챤들이었어요.

이재복은 10.1항쟁의 주축이잖아요. 대구 인민당 간부인 최문식과 이재복이 10.1항쟁의 중심인물인데, 이재복은 효시됐고 최문식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군이 퇴거할 때 서울구치소에서 사살됐죠. 최문식은 해방전에 일곱번이나 투옥된 굉장한 투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남로당이었던 흔적은 못찾았고 여운형계인 인민당이었더라구요. 와이 내부에는 인민당계, 남로당계, 조선공산당계가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사회주의는 뭐 기본적으로 무력투쟁이잖아요.

그래서 무력투쟁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최소한 일제하 와이엠씨에이 운동때는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애요.

 

지난 14일 763개 시민·종교·평화·진보단체가 망라되어 발족한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출범식장에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지난 14일 763개 시민·종교·평화·진보단체가 망라되어 발족한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출범식장에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와이 운동이 한결같이 지켜온 '민족해방의 과제'


□ 흥미로운데,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말씀 듣겠습니다.

■ 이게 다에요. 여기까지는 팩트가 확인된거고 최근에는 하여튼 그런 자료들이 계속 공개되고 있으니까요. 


□ 이렇게 와이 운동의 역사나 전통이 그동안 큰 굴절없이 쭉 이어져 온 것으로 보면 되겠군요.

■ 그렇진 않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와이 내부의 중심 계보는 학도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과 보수기독교 중심으로 계보가 살아남습니다. 또 이승만이 와이 활동을 했으니까 시 청년회가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었고. 물론 학생 화이는 좀 다르죠.

제가 보기엔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부터 운동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으로 가고, 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깊게 관여를 하죠.

대개 지금의 시민운동을 경실련에서 주창했다고 알고 있는데, 시민운동이라는 걸 주창한 건 와이에요.

와이에서 시민운동을 주창하고 그 운동을 추진하려고 하다보니까 와이로는 의결구조가 복잡해서 힘들고 거추장스러운게 많다보니까 와이에 있는 리더십들이 다른 사회 엘리트들과 함께 경실련을 창립하게 된 거에요.


□ 주로 대구 와이에서 활동하신 거죠.

■ 그렇죠. 대구 경실련 창립에도 관여했어요. 원래는 1985년도에 대구로 내려갔는데 5년간 자원봉사를 하다가 1990년도에 간사를 했어요. 그러다 대구 와이 사무총장 13년을 포함해 다 합쳐 34년간 대구에서 활동했죠. 직업이 딱 말하는거죠. 와이엠씨에이 간사.


□ 그러고는 서울에 올라오신 게 2018년이군요.

■ 네. 2018년 6월 9일부터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는거죠.


□ 와이에서는 사무총장이 최고 결정권자인가요.

■ 실무자로는 최고위 자리이고 이사회의 이사장이 있어요. 우리는 미국식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나 와이는 사무총장이 사실은 대표에요. 총무라고도 하는데 NCCK에도 이홍정 총무말고 이사회 의장이 있거든요. 그런데 총무가 대표하잖아요. 와이도 그래요. 유엔에도 의장이 있지만 사무총장이 대표하잖아요. 대륙형 조직이라고도 하는 것 같애요. 우리도 사실은 법적으로는 이사장이 대표이신데, 관행과 운영전통에 따라서 대외적으로 사무총장이 와이를 대표하고 사무는 모든 인사권 전권을 가진 사무총장이 총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무총장 인사권은 이사회가 갖고 있어요. 


□ 사무총장 임기가 따로 있나요.

■ 임기를 정해줘요. 보통 4년이에요. 4년동안 계속 신임을 묻는 경우도 있고, 4년에 한번 신임을 묻고 난 후 중임하면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국연맹 사무총장은 중임하면 끝입니다. 제 경우는 2018년부터 2022년 6월까지 한번 했고 두번째 임기를 조금 지났으니까 3년 6월 정도 남았네요. 그렇지만 임기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다 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와이는 레짐이라는 것이 있어서 누가 사무총장이냐, 이사냐 하는 것보다도 선배로부터 시작한 넓은 체제가 있기 때문에 그 중에 일부라고 봐야죠. 내가 혼자 잘나서 연맹 사무총장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양한 레짐들의 합의와 조정과 투쟁을 통해서 결정되는 거니까요.


□ 전임자들은 어떤 분들이셨나요.

■ 전임은 이충재라는 분이었는데, 뇌출혈때문에 좀 짧게 했고 그 앞이 남부원 총장이셨는데 이분은 지금 아시아태평양 와이엠씨에이 사무총장으로 가셨어요. 두 분다 4년씩 하셨죠. 그 앞이 이학영 선배가 연임으로 사무총장을 하셨죠.


□ 대구에서 하셨던 일에 대해 말씀 좀 해주십시오.
 
■ 제일 대표적인 일이라면 페놀오염수 사건 당시에 시민단체 대책회의 사무국장을 했어요. 또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 사무국장, 신남네거리 지하철붕괴사고 진상조사위원장, 중앙로역 화재참사 진상조사위원장 등 뭐 이런 일을 했고. 그 다음에 하나는 마을만들기, 담장허물기를 했죠.

 
□ 마을만들기, 담장허물기가 전국적으로 반향이 컸었죠.

■ 그게요. 참. 버스 요금투쟁을 했는데 2년을 싸워서 10원을 내렸어요. 그 와중에 보수조합 이사장의 비자금 노트가 어떻게 발견이 됐는데, 그것때문에 공무원 두분이 자살을 했어요. 그때 조금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흐름을 바꾼게 그 일이에요.

 
□ 매우 독특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YMCA운동의 특징이라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 와이엠씨에이는 하여튼 민족운동의 역사 안에 있는데 좌우가 굉장히 통합적으로 움직이는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그런 역사적 경험과 구별되는 주체성에 대한 굉장히 강한 강조가 있어요. 반면 회원 규정은 무한 개방이에요. 인종, 나이, 종교, 국적, 성을 가리지 않고 가입할 수 있습니다. 아직 섹슈얼 오리엔테이션, 성적 취향이 어떻든 회원이 될 수 있다는 규정은 못넣었어요. 그렇지만 지금도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다 회원으로 받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주체성에 대한 엄청난 강조도 있지만 또 이렇게 완전한 개방성을 갖고 있는 이 두가지가 와이엠씨에이를 운영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 와이 운동사에 대해 공부를 하려면 어떤 자료가 있을까요.

■ 송건호 선생님이 쓴 YMCA80년사가 있습니다. 와이 멤버쉽은 아니셨는데, 반민족사전 편찬하셨던 윤경로 교수님도 와이에서부터 운동을 시작하신 중요한 분이고 이번에도 한국YMCA전국연맹 백년사 공동편찬위원장이 되실거에요. 신용하 교수님이나 이만열 교수님도 와이 운동에 대해서 관심이 많죠.

특히 이만열 교수님은 한국 근대와 민족해방운동에서 기독교가 가졌던 종교적 역할외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아주 초기에 연구를 하신 분이잖아요.

의외로 동학쪽 자료가 기독교와 굉장히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동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나쁜 건 아닌데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안그렇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사상적 문맥이나 형식적 문맥에서 동학이나 기독교가 상당히 공유하는 점이 있는데 내용에서 그 실질을 가지지 못했다라고 하는 게 동학이라고 할 수 있죠.

한국 와이도 1976년도에 한번 '목적물'이 만들어졌어요. 그 목적물에 따른 와이 운동의 과제가 세 개에요.
 
첫 번째가 '민중의 복지 향상',  그 다음이 '민족의 통일', '새 문화 창조' 이렇게 세가지거든요.

그 다음에 '청년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사실은 와이엠씨에이 운동의 목적 안에 민족 통일이나 이런 게 이제 정확하게 명기돼 있는데 이걸 전문에는 어떻게 반영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 정신을 넣자, 말자는 논쟁이 있어요.

지난 2014년 개정 목적물에는 못 들어갔어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삶을 따라' 그 다음에 '동학농민전쟁과 3.1 운동의 민중의 전통을 계승하여...' 이렇게 들어가야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어요. 아직 넣지는 못했는데 와이 운동 사가들은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은 무조건 와이 운동의 정신사안에 넣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죠. 


□ 처음에 어떻게 와이 운동을 하게 되신 건가요.

■ 난 '스카'(SCA) 잖아요. 연세대학교 '스카'는 원래 대학 와이에요. 내가 69기거든요. 1969년도에 서울대에서 주로 안병무 교수를 중심으로 활동한 SCM 계열, 연세대는 대학 와이, 대학YWCA가 있었는데, 이 세 흐름을 합쳐서 통일된 기독학생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이름을 다 SCA로 다 바꾸기로 한거에요. 그러니까 연세대 대학 와이도 SCA로 바뀌게 된 거고, 그 전신은 대학 와이였죠.

연희전문이 생기면서 대학 와이가 생긴거고 제가 1981년도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가입한 SCA는 역사적으로 연희전문 시절부터 계승하다보니까 SCA 69기가 되는 거에요. 연세대에서는 제일 오래된 학생 서클이 SCA일거에요. 그 다음이 목하회.


□ 대학 와이 운동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평생 해오게 된 계기가 있나요. 

■ 저는 크리스챤이었으니까 기독교에 대한 질문이 깊었던 거죠. 모태신앙으로 시작한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보면 '유물론자', '사탄'이고,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론자'인 그런 자기 분열이 있었잖아요.

운동에서도 그렇죠. 기독교라는게 부르조아 운동인데, 이런 부분을 정리하고 싶었죠. 그래서 난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골간을 공개적으로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예를들어 종교개혁을 놓고보면, 종교개혁 우파인 마틴 루터의 슬로건은 '내면의 왕국은 사제에게, 세속의 왕국은 제후가'라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정신과 육체를 별개의 것으로 본 정물이원론(精物二原論)이죠.

루터에게 실망감을 느껴 농민들의 편에서 독일농민전쟁을 주도한 토마스 뮌처(Tomas Muntzer)나 츠빙글리(Zwingli), 후스(Hus)같은 사람도 있어요.

농민이단전통에 있던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냥 쿨합니다. "아담이 밭갈고 이브가 베짤때 영주가 어디 있었느냐"는 입장이거든요.

'교회없는 혁명'(Revolution without church) 노선인 거죠. 교회를 개혁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세계를 혁명한다는 것이죠.

유럽에는 그런 전통이 굉장히 강하게 있어요. 한국에서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폭이 아주 협소하니까 루터 계보의 프로테스탄티즘만 갖고 온 거고 좌파 전통이나 소정파 전통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저에게는 '기독교는 사회 역사적으로 무엇이냐' 것이 평생의 질문이었어요.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국YMCA전국연맹 건물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국YMCA전국연맹 건물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진보운동, 세계를 읽은 이론의 혁신과 세공 아쉬워 

이후에도 김 총장은 '헤겔로 라캉을 읽고 라캉으로 헤겔을 읽어 변증법적 유물론을 새로 정리하려는 철학사'의 흐름에 대해서 꽤 긴 시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냥 진리여야지, 좌파의 진리여서는 안되지 않느냐는 것', '유물 변증법을 진리의 체계에서 해석하려면 세계를 재인용하는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운동이 만나고 있는 가장 큰 도전은 이론의 좌절'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우리 사회운동이 어떤 이론적인 기반을 가지고 어떤 세계를 만들어가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있다'는 자성이 깔려있는 셈이다.

그래서 요구하는 바는 "우리는 한반도 문제와 동아시아 평화문제, 작게는 남한의 사회혁신에 대해 지금 어떤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으로부터 하나의 답을 찾고 거기서 다시 질문을 뽑아내어 앞으로 밀고 나가는 방식이다. 

"전술적 상상력과 그 적용을 넘어서는 다양한 분야 고유의 영역별 행위들이 통합되는 지점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 다시 말하면 "보편적 방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각 영역들과 부분을 통합해 나가는 통일적 사유"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그가 보기에 다소 교조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80년대에 빛나는 성과를 거둔 집단도 있었다. 그런 전통을 지금도 유지하는 진보운동단체들은 지금 자기 이론을 좀 더 혁신하고 세공할 필요가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기존 시민운동은 "이론적인 틀을 세우다 중간에 멈춰버렸다"는 진단이 나온다.

헤겔의 보편과 특수 검증을 예로 들어 "각 영역과 보편이라는 게 어떻게 서로 물리고 또 나눠지는가를 고민하는 사유의 틀을 통해서 우리 운동을 새롭게 조정하는 일, 각 영역의 주동성을 극대화하면서도 보편적인 운동적 의지 안으로 통합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하지 않나"라고 문제제기했다.

'시민운동의 분절'이라는 뼈 아픈 지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아주 철학적인 고민부터 이야기해 주셨는데, 이력을 보니 철학과 출신이시네요. 

■ 운동이 무엇이며,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고민한거죠. 그걸 그래도 한 40년 했으니까.(웃음) 아무튼 운동적으로는 그런 약간의 좌절이 있는 것 같애요.

지금도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어디로 가야 된다라는 주장을 해도 논리적인 기반과 근거가 없거든요. 그저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지금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가자는, 현상에서 현상으로 이동하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애요.

지금 우리나라의 좌파 교수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닌데 이론적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닌데 이 분들의 문제는 뭐냐하면 실천하고 완전히 유리돼 있잖아요.

스터디도 깊게 하는데 자기들끼리 하니까 한국 사회의 문맥과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서는 이분들도 이야기를 못하는 거애요.

 
□ 그동안 주목할 만한 단서라도 발견한게 있으면 소개해주시죠.

■ 저는 지금 한국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종합적인 분석을 해낼만한 이론가가 없다고 봅니다.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거애요. 비정부기구(NGO)라는 틀에서 분석하는 게 운동체인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전위정당의 내적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외적 형식은 갖추지 못한 거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전위정당의 역동성없이 움직이지 않고 사회운동이 승리할 수는 없죠. 우리 사회의 정치구조나 여러가지 현실 때문에 전위정당의 내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적형식을 전위정당으로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주당이나 일부 진보당이든 정의당에서 그런 정치적 실험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운동의 기원과 연속성을 계속해서 놓치잖아요. 이론적고 개념적인 견고함이 없으니까 그런 거에요.

정의당의 경우 매우 아쉬운데, 지금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적 탐색은 하지 않고 각론과 정책 토론만 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건 경실련같은 초기 시민운동이 한국사회운동에 남긴 커다란 기여이면서 동시에 폐해에요.

운동에서 정책적 합리성을 제안한 정당함은 있지만 사실은 시민들이나 민중들의 사회적 발언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다는 거죠.

 
□ 와이의 제안이라면 어떤 내용일까요.

■ 우리가 최소한 시민운동이라는 걸 제안할 때는 나름대로 기독교 사회운동의 보편적 형식, 시민운동을 제안하는데, 영어로는 '피플스 파워링'(People's Powering)으로 정리했습니다.

'인민 주체'라는 건데, 피플이라는 영어를 인민으로 번역하는데 한계가 있는 우리 사회에서 사회과학의 왜곡은 정말 심각하죠.

와이는 세계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열려 있잖아요. 동구권의 붕괴 이전에 그런 사실을 이미 폭넓게 감지하면서 민주주의적 흐름을 반영한 새로운 운동 기조가 나와야 된다고 하면서 시민운동을 한번 제안하자고 했던 건데, 그때도 결국은 맥락에서는 민중운동을 함께 하자는 것이고 이름을 '피플스 파워링'으로 한 것이죠.

우리가 투쟁을 할때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을 어떻게 사회에, 제도로 담을 것이냐는 고민을 하지만 실제로 다 담지는 못하죠. 그건 일종의 잉여로 남아서 계속 운동적 동력으로 회수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시민운동이 당분간 자기의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해 독자적인 경로를 갖겠다는 생각은 맞지만 기존 기층운동, 진보운동의 안티테제로 스스로를 성립시킨 것은 진짜 큰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진보운동이 담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데, 이걸 사회적 실험으로 해서 그 다음에 합류하자고 할 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안티테제로 성립시키면 이게 다 큰틀에서 분열이 되는 거죠.

진보운동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좀더 풍성하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계속 통합적으로 가야된다는 지향이 와이 운동 내부에서 흔들렸던 적은 한번도 없어요.
 
서울에 와서 진보쪽에 자꾸 가니까 시민쪽에서 조금 문제제기를 하더라구요. 그런데 지역에서는 어차피 다 같이 합니다. 시민의 삶의 양식이 노동자인데 시민과 노동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거죠.

직장에 가면 노동자고 집에 돌아오거나 공론장에 참여하면 시민인데, 그게 어떻게 다릅니까. 똑같은 주체죠. 시민과 진보가 혹은 시민과 민중이 따로 가야된다는 건 조금 스타일이 조금 다르고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궁극적으로 이론적 지평이 다르거나 민주주의 원론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반독재투쟁의 성격은 '국민연합전선'으로 구체화될 것

□ 주로 대구에서 오래 활동하던 경험으로 비추어보더라도 시민과 민중, 시민과 진보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 벽이 있는 것 같은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그래도 촛불같은 것들이 다 같이 해왔잖아요. 제가 보기에 큰 국면에서는 항상 연대의 원칙을 잘 만들어 왔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큰 고비를 같이 넘어온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런데 미시적이거나 세밀한 영역에서 의견 합의에 도달하지 못해서 생긴 골들이 있긴 했다는 정도로 이야기하면 될 것 같애요.

각자의 스타일로 운동을 해 가더라도 큰 틀에서는 서로 공동행동과 공동의 지향점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되잖아요. 예를들어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 같은 건 공동 행동의 지향점을 다 공유한 거잖아요.

지난번 코로나비상시국대책위원회때에도 전국민중행동과 한국진보연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같이 만들었잖아요. 그때도 시민운동 일각에서 따로 만들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저는 반대했습니다.

그게 국민전선은 아니더라도 넓은 의미의 시민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시민단체 일부가 그냥 만드는 것 보다는 진보와 시민이 같이 의논해서 틀을 짜자고 한거죠. 행동에 한계는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같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영역하고 이번 이태원 참가같은 경우에도 부드럽게 서로 잘 되더라구요. 큰틀에서는 시민과 민중이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상호존중하면서 다른 건 다른대로, 같은 건 같은대로 해서 기조를 함께 잘 잡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함께 행동하는게 최종 목표는 아니고, 한국사회의 미래비전을 위해서 훨씬 더 깊게 연대할 필요가 있죠.

결국 핵심은 정치권력, 특히 민주당과의 문제겠죠. 촛불이 이룬 성과를 민주당이 5년만에 다 뺏기고 정치개혁 요구는 위성정당으로 훼손하는 이런 정치적 문제를 만나고 있잖아요.

한국의 정치공간이 절대적 공존체계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걸 깨뜨리기 위해서 정치생태계의 다원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내세워 정치개혁공동행동을 하려고 했는데, 민주당이 결국 이걸 위성정당이라는 형태로 완전히 죽쑤어버렸잖아요.


□ 결국 정치개혁과 맞닥드리게 되는데요, 조금 더 말씀해 주시죠.

■ 문재인 정부는 정치개혁한게 하나도 없어요. 다른 말로 문재인도 이렇게 역사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치개혁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였고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정치개혁이야말로 촛불의 명령이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500여개의 단체가 모여서 정치개혁공동행동을 만들었는데 그 성과를 이렇게 말아 먹는 법이 있느냐라는 거죠. 
지금 민생 문제와 함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제일 중요한 게 정치개혁의 문제인 거죠. 그 다음이 지금부터의 고민이죠.


□ 이달 초에 70년대 민주화원로들이 '검찰독재, 민생파탄, 전쟁위기에 맞서는 비상시국회의'를 제안하셨는데, 다소 이견도 노출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 저는 80년대 학번이지만 70년대에 사실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동시에 성장했고 종교운동도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70년대 운동사가 저평가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70년대 선배들이 비상시국회의를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분들이 지금 윤석열 정권을 놓고 검찰독재로 규정했거든요. 그런 규정에 대해서는 면밀히 따져봐야 겠지만 저도 검찰독재로 규정할만한 여러가지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문제가 이렇게 하나 딱 생긴 거고, 또 민생문제가 있죠. 그 다음에 평화 문제가 있고 기후문제는 여전히 실종입니다. 기후 문제는 실종이고. 이렇게 네가지 프레임에서 보면 큰틀에서 유능한 독재는 아닌 것 같고 무능한 독재 같애요.

어디와도 소통하지 않고 실정법도 이렇게 편안하게(?) 편법으로 넘어서서 온갖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독재라고 규정할만한 여지가 충분하죠.

그렇게 되면 반독재투쟁이라는게 원래 국민연합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연합 투쟁을 하는 거에 대한 요청이 지금 이미 있다고 하면서 독재정권 타도 입장을 제안하신 거 잖아요. 

또 퇴진 촛불이 있죠. 시민사회 등에서 제일 우려하는 건 결국 '위성정당 버전 2'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어요.

이게 당을 만들고 뭐 하다가 선거법과 적절히 타협하면 다시 위성정당 버전 2'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평가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퇴진 촛불도 대단하죠. 불을 지폈고 어쨌든 헌신적이잖아요. 반면에 민주당을 끌어들여서 저렇게 하는게 또 '조국' 유령을 만드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어요.

동의는 하면서도 선명하거나 분명하지 않은 부분들이 남아있는 상태 같애요. 잘 품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이 없지만 반면 어떻게 품을 것이냐,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는 민주당과 어떻게 관계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은 있죠.

퇴진 촛불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민주당의 비민주적 행동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의식인 셈이에요. 그렇지만 그것도 조율될 수 있을 것이고 어쨌든 합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세력은 세곳이 더 있습니다.

시민, 민중, 그 다음 종교가 있죠. 또 반독재투쟁을 하려면 제 정당을 합류시켜야 하거든요. 이 투쟁을 해가면서 반독재투쟁인지에 대해서는 개념 규정이 선명해 질 거에요.

그럼 제 정당과 연대하는 거냐, 아니냐의 문제가 밝혀질건데 지금 분위기로 보아서는 연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보당, 정의당은 늘 같이 하니까 그건 문제가 없을텐데, 민주당은 중요하니까 들어왔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고민이죠. 딱히 해줄 거라는 기대는 없지만 민주당은 어쨌든 진보정치를 위한 공간을 내놔야 한다고 봅니다. 진보정치가 받는 지지에 비해 지금 의석이 너무 적잖아요.

민주당도 아쉬운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용지불없이 그저 '우리 아파요. 도와주세요'라고만 하면 우리는 몸대줘야 하는 방식보다는 최소한의 약속은 하면서 서로 연대하는게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죠.

그게 연대의 조건은 아니지만 민주당도 의미있게 결합하면 좋겠습니다.

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국노총같은 곳에서는 꼭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아직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는 없어요.

민주노총은 결국 윤석열정부 주요 국정과제중 하나가 노동개혁인데, 이게 민주노총 때리기잖아요. 혼자 싸워서는 안되겠죠. 한품에서 싸우길 바랍니다. MBC도 언론노조하고만 연대해서 싸우고 그럴 사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2월 14일)도 이야기가 있었지만 통일문제에서 제 정당을 빨리 합류시키는 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당에 대한 우려는 매우 깊었다. 
민주당에 대한 우려는 매우 깊었다. 김 총장은 "민주당이 잘해서 집권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못해도 자체적으로 집권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힘이 동원되고서야 간신히 집권을 하지 않았나"라고 하면서 "협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줘야 한다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민주당, 협치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남겨줘야


□ 이제 시작단계이고 조정할 여지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아리송하네요.

■ 지금 비상시국회의는 전국 조직을 만들고 있고 퇴진 촛불과 연합하는 흐름이 없는 건 아니죠. 본 진영과 만나는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는데, 그건 뭐 순서가 꼭 논리적으로 되는 법은 없으니까요. 시민사회나 진보세력도 큰틀에서 이렇게 보여서 반독재민주화 국민연합 정도의 틀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

시민사회쪽에서는 민주당으로 결실이 넘어가는데 대한 견제같은 게 있죠.

민주당은 최소한 그 전에 정치개혁 요구를 배신한 일들이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정도의 의지를 확인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민주당에 몸대줘야 하느냐는 불만이 많으니까요.


□ 조직된 단체들에서는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운동이 좀 상설적인 수준에서 정치개혁에 대한 요구도 중요한 요구로 전면에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 결국 이런 다양한 움직임들이 수렴점이 있겠죠. 그냥 각자 알아서 자연스럽게 갈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그렇다고 갑자기 모여야 된다는 것도 아닌 것 같애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운동의 내적인 동력이 반독재투쟁이라는 기조안으로 모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모이도록 전선을 국민전선의 양상으로 전망을 넓게 펼쳐 놓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제안을 해 봅니다.

또 다른 한축으로는 내년 4월 총선이 있잖습니까. 국민의힘 당대표 선출과정도 그렇고 민주당 사정도 만만치 않아보이잖아요. 

이런 과정도 잘 살펴봐야겠지만 '정전 70년 한반도 평화행동'이나 비상시국회의가 제안한 '민주주의 민생 국민연합'과 같은 시민적 저항의 흐름들이 총선 구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낼 겁니다.

직접적인 정치현안은 아니더라도 큰틀에서 기저를 만드는 흐름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공안정국이라든지, 야당 당대표에 대한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와 같은 변수들이 섞여 혼돈중이지만 큰틀에서는 많이 기울었다고 판단합니다.


□ 일각에서는 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행동의 정치적 성과를 민주당이 거져 가게된데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무조건 단결'하자는 주장을 경계하는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런 지적은 받아야 하는데, 사실은 당시의 촛불행동이 시민적 요구에 운동단체들의 리더들이 합류한 거잖아요. 전체적인 형국을 보면.

시민들의 요구를 최대한 읽어내고 담아내서 집회를 이끌어 갔던 것인데, 당시에는 정파성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점에서 굉장히 주의깊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퇴진촛불이 가지는 하나의 성과거든요.

반면에 그 동력을 탄핵과 함께 해소해버린 것이 옳았는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오랫동안 토론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시에도 그런 토론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고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다양한 직업적 지향과 사회적 관심을 갖고 있던 촛불광장의 촛불들이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결합되었던 거잖아요.

그런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해서 퇴진으로 끌고 간 건 굉장히 세련되고 성숙한 리더십이라고 평가합니다. 이걸 당적 체계와 전략적 기능을 가지고 역할을 분담해서 하기에는 현장조직에 가까운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그렇지만 촛불 해소이후에 그 운동을 주도했던 주체들이 새로운 사회적 전망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좀 더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방향 탐색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초동 검찰청 앞 촛불이나 지금 퇴진 촛불은 오히려 정파적 색채없이 사람들의 요구를 객관화하고 정치적 편향을 최소화하고 자기 절제가 필요한 측면에서 취약한 것이 사실이죠. 

지금 시민단체나 조직된 대중단체들이 쉽게 합류하지 않는 것도 광우병 촛불때처럼 한번에 다 나와서 밀리니까 다시 동력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경험도 작용했겠지요. 전략적인 판단을 가지고 결정적인 시기에 합류할 수 있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게 민주당의 문제인데, 그동안 민주당은 너무 많은 반칙을 했고 민중의 성과를 수없이 독점적으로 취했어요. 사람들이 윤석열정부의 행태를 못참고 나오긴 하지만 '로열티'가 떨어지는 이유에요.

민주당은 자기들이 잘해서 집권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못해도 자체적으로 집권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사회적 힘이 동원되고서야 간신히 집권을 하지 않았어요.

협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줘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죠.


□ 그동안 여러 성취도 있고 아쉬움도 있었을텐데, 특히 남북관계 관련 관심사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와이엠씨에 총회유치가 가장 보람이 있어요. 한반도 평화문제는 특히 국제사회와 로컬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돼요. 이제 우리가 글로벌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표면 하나를 한국에 유치했다는 것이 아주 좋았어요.

작년부터 계속 추진하고 있는 세계YMCA 평양연락사무소 설치가 큰 관심사죠.

세계YMCA 평양연락사무소를 만들어야 우리가 평양당국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의미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거죠. 

그건 세계YMCA 결의사항이고 가장 큰 미국YMCA도 이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미국 와이는 상근 직원만 110만명이 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로컬 조직이고 미국내에서는 노조보다 영향력이 센 강력한 시민사회입니다. 

우리 희망은 세계시민사회와 평양당국이 서로 연대해서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기후협력 활성화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에서 협력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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