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강원도의 DMZ(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은 서쪽으로부터 철원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이 있다. 철원군은 육상 DMZ의 1/3을 차지하고 있고, 고성군은 남한의 최북단이다.

이 네 곳의 강원도 접경지역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철원군의 MDL(군사분계선) 통과지점에는 궁예(弓裔, ?~918)의 궁터가 있고, 양구군에는 양구 출신의 명화가 박수근의 미술관이 있다. 인제군 서화면에는 DMZ 일원을 평화와 생명의 터전으로 바꾸어 나가자는 의욕이 넘친 ‘DMZ평화생명동산’이 있고, 고성군은 나름대로의 통일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이 숨쉬고 있다. 이번에는 철원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철원 출신의 탁월한 독립운동가로는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이 있으며, 문학가로는 이태준(李泰俊, 1904~1978경)이 있다. 영화인으로는 1950~60년대의 대표적인 명배우 김승호(金勝鎬, 1918~1968)가 있다.

1. 독립운동가 박용만

『박용만』, 1913~4년 모습, 대조선국민군단의 장교복을 입고 있다. 박용만은 무장독립전쟁을 주장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박용만』, 1913~4년 모습, 대조선국민군단의 장교복을 입고 있다. 박용만은 무장독립전쟁을 주장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박용만은 일제강점기 외교관이자 언론인,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군사학교인 소년병군사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창설 등 무장항쟁론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04년,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농장(Kearney農場)에서 독립운동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1912년 첫 번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다.

박용만은 1911년 미주에서 설립된 재미동포의 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 때 『국민개병설』‧『군인수지』라는 책을 저술, 발간하였고, 이때(1911)부터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는데,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훈련을 하고,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것이었다. 즉 박용만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선구자인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천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있었으므로,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기관지인 『신한국보(新韓國報)』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폈다.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며 자리잡자 하와이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된다. 이후 이승만과의 정치 싸움에서 밀린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대한인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남은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독립단을 창설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 부총장에 선임되어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차츰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는 1924년 말경 중국 군벌 펑위샹(馮玉祥)의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는데, 그로 인해 변절한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급기야 1928년 의열단원 이해명(李海鳴, 본명 이구연, 1896~1950)에 의하여 밀정으로 의심을 받고 북경에서 암살된다.

그리고 소영웅주의자 성향의 이해명은 임정 내의 박용만 정적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박용만의 정적들을 통해 중국 고위층과 연결된 덕분인지 ‘의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받았다.

박용만은 일제가 불령선인으로 지목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승만과 대립하고 임시정부를 반대한 것으로 인하여 평가가 늦어진 독립운동가이다. 출세주의자 이승만과는 달리 박용만과 안창호(安昌浩, 1878~1938)는 미주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끈 진정한 투사였다. 독립투사 박용만의 독립정신을 기리자.

2. 문학가 상허 이태준

상허 이태준은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조선의 모파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여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흔히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이라고 평가되었다.

그의 부친 이문교는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함경남도 덕원감리서(德源監理署)에 근무한 지방관원이었으나, 한말의 개혁파로 수구파에 밀려 블라디보스톡로 망명하여 사망하였다. 이러한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이태준은 어려서부터 어렵게 수학하였다.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당시 그 학교의 교원이었던 이병기(李秉岐)의 지도를 받아 고전문학의 교양을 쌓았다. 그런데 학교의 불합리한 운영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결과 퇴교를 당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에 있는 조오치대학[上智大學] 문과에서 수학하다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 개벽사(開闢社) 기자로 일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친목단체인 구인회(九人會)를 이효석(李孝石)‧김기림(金起林)‧정지용(鄭芝溶)‧유치진(柳致眞) 등과 결성하였다. 이어 순수문예지 『문장(文章)』(1939.2∼1941.4.)을 주재하여 문제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이상(李箱, 1910~1937) 등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여 문단에 크게 기여하였다.

상허 이태준은 단편소설 「오몽녀(五夢女)」(1925)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아무일도 없소」(東光, 1931.7.)‧「불우선생(不遇先生)」(三千里, 1932.4.)‧「꽃나무는 심어놓고」(新東亞, 1933.3.)‧「달밤」(中央, 1933.11.)‧「손거부(孫巨富)」(新東亞, 1935.11.)‧「가마귀」(朝光, 1936.1.)‧「복덕방(福德房)」(朝光, 1937.3.)‧「패강냉(浿江冷)」(三千里文學, 1938.1.)‧「농군(農軍)」(文章, 1939.7.)‧「밤길」(文章, 1940‧5‧6‧7합병호)‧「무연(無緣)」(春秋, 1942.6.)‧「돌다리」(國民文學, 1943.1.) 등이 있다.

그리고 「해방전후(解放前後)」(文學, 1946.8.) 등 일제강점기 민족의 과거와 현실적 고통을 비교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썼으며, 그의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묘사적 문장은 독자의 호응을 크게 받았다. 그가 취택한 인물들은 가난하고, 무력하지만 우리의 전통적 삶의식을 잘 드러내며 인간미가 풍기는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초기작품 「아무일도 없소」에는 신출기자의 취재에 의하여, 3‧1운동 당시 대동단(大同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한 애국지사의 딸이 생계가 어려워 창녀가 되었고,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지사의 아내가 자결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적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당시대의 세속적인 삶의 궤도는 잘도 돌아간다는 반어적 인식이 제기된다. 이러한 민족의식의 주제는 상당히 많은 편수에 이르고, 장편 「사상(思想)의 월야(月夜)」(1946)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 소외된 인물들의 현실적 고난과 그 인물의 내면세계의 순수무구함을 드러내어 인간애의 의식을 촉구하는 주옥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수필집 『무서록(無序錄)』(1944)과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1946) 등도 그의 탁월한 문학적 저서로서 크게 공헌한 책들이다.

광복 후 1946년에 월북하였으나, 후일 비판을 받아 철직된다. 이후 한때 남북 모두에서 잊혀진 문학가가 되었는데 황석영에 의하면 이태준이 1964년 북에서 “가까스레 복권되어 당중앙 문화부 창작실에 배치”된 적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또한 남에서도 1988년 7월 19일에 복권되었다.

3. 제11회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 은곰상에 빛나는 배우 김승호

김승호의 본명은 김해수(金海壽)이다.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5년에 당시 상업주의연극의 산실이었던 동양극장(東洋劇場) 전속 청춘좌(靑春座)에 처음 연구생으로 입단하였다.

광복후에는 극단 신협(新協)에서 유치진(柳致眞)의 「소」, 이만택(李萬澤)의 「무지개」, 차범석(車凡錫)의 「갈매기」 등에 출연했다. 그의 천성적인, 서민풍의 구수한 연기가 드러난 것은 유치진의 「소」에서 ‘개똥이’역을 맡으면서부터이다.

또한 그의 연기가 더욱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연극에서보다 1950년대 후반 영화계로 진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실험정신을 보여주어야 했던 연극무대보다 당시 대중적 인기에 편승한 활달하고 서민적인 영화가 오히려 더 그의 선천적인 적성에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첫 영화출연작품은 1946년 10월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된 「자유만세」로, 이 작품은 광복 후 고려영화사가 처음으로 제작한 본격적인 극영화이며, 우리 나라 영화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했던 작품이다. 이어서 1947년에 「해방된 내 고향」(전창근 각본‧감독)에서 중요한 역을 맡음으로써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는 수많은 작품에서 그 천성인 후덕하고도 유순하며 텁텁한 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연기는 주로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희극배우로서의 가능성(시집가는 날‧인생차압 등), 둘째 한국 서민상의 이미지(곰‧굴비‧박서방 등), 셋째 중후한 신파적인 연기(육체의 길‧하루살이인생‧잔발잔 등)로 볼 수 있다.

특히 왕후장상에서 지게꾼에 이르기까지의 연기를 통해 풍기는 그의 개성과 정신은 언제나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주변 인생들의 애환과 비애를 느끼게 해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나는 그가 출연한 극영화 「마부」를 본 적이 있다. 1961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제11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 은곰상을 받았던 수작이다.

그는 영화연기생활을 하면서 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했으며, 문교부 주최 우수영화주연상(1956),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 남우상(1958, 인생차압에서), 제1회 부일영화상(釜日映畫賞) 남우주연상(1959), 제7‧8회 아세아영화제 주연남우상(1959‧1960), 제5회 청룡영화상 주연상(1967) 등을 수상하였다. 액션배우 김희라(1947~)는 그의 아들이고, 가수 겸 배우인 금성은 그의 손자이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철원에 시급하게 3인의 기념관과 문화회관 건립 추진해야

독립운동가 박용만, 문학가 이태준, 영화배우 김승호. 이 세 분 모두 철원이 배출한 기념할 만한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을 추모하고, 문학가 이태준과 영화배우 김승호는 기념하자.

박용만은 철원군 서변면(現 철원읍 중리)에서, 이태준은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현 철원읍 산명리)에서, 김승호는 철원에서 태어났으나 출생한 읍면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들 3인을 추모 및 기념하고 현재 철원의 예술인 활동을 위한 문화회관이 철원군청이나 명소 인근의 교통이 원활한 곳에 세워졌으면 한다. 이토록 큰 인물들을 기리는 것은 두메산골 철원을 문화 철원으로 승화시키는 과업이다.

철원은 남북이 통일되면 상당한 발전이 예상되는 지역이다. 강원도 영서 지방 최대의 평야인 철원평야가 위치해 있고, 서울특별시에서 동해안의 요충지인 북강원도 및 원산과 그 북쪽, 멀리는 북한 및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통의 중심지이자 남북통일의 명분과 실리를 다 갖는 중추 지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철원은 관광지로서의 가치와 발전 가능성 매우 높다. 철원이 내세울 수 있는 근대의 인물을 선양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철원의 중요한 컨텐츠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신냉전시대에 이 컨텐츠를 구상하고 추진하지 않으면, 통일 및 교류협력시대에는 허둥댈 것이다.

박용만은 1928년에, 이태준은 1978년경에, 김승호는 1968년에 사망하였으니, 2028년이면 100주기, 50주기, 60주기가 된다. 철원군에서는 2028년 개관을 목표로 지금부터 시급하게 이들 3인의 기념관과 문화회관의 건립을 추진하여야 한다. 아직 시간은 있다.

현재 활동하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철원 출신의 중요한 인물로는 SBS방송국의 윤세영(尹世英, 1933~) 전 회장과 국회의원 우상호(禹相虎, 1962~)와 한기호(부친이 김화 출신, 1952~) 의원 등이 있다. 이 분들에게 고향 사랑을 명분으로 이 사업 지원을 요구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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