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 615산악회 회원

 

615산악회 회원들이 북한산 금선사에 계신 장기수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렸다. [사진제공-6.15산악회]
615산악회 회원들이 북한산 금선사에 계신 장기수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렸다. [사진제공-6.15산악회]

묘한 인연이다. 6.15와 나는 별로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실 같은 인연이 생겼다. 6.15산악회 덕이다. 나는 통일운동권도 아니다. 더구나 <조중동>으로 엮이는 중앙일보에서 30년을 근무한 소위 보수언론 출신이다. 내가 만약 한국에서 계속 근무했다면 6.15와 내가 지금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였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정치적 바람을 덜 타는 미국지사에서 20년을 근무했다. 그 덕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 후 한국기자로는 처음으로 2012년 방북 취재를 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당시 10여 명의 미주 방북단에 포함돼 방북신청을 냈지만 중앙일보 기자는 안 된다며 난색을 표하는 북측 당국을 어렵게 설득해 두 번의 비자 거부를 이겨내고 갈 수 있었다.

순전히 기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기자로서도 흥분된 취재를 할 수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막연하게 머리로만 생각하던 남북문제, 통일문제에 대해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체험을 하게 됐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은 전신사진을 1면 통면으로 실었던 중앙일보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나의 방북 취재는 회사에서 허락을 했고, 중앙일보와 Jtbc는 내 기사로 여러 차례 단독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까지 중앙일보는 남북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통일 이슈에 전향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서서히 바뀌었고, <조중동>으로 함께 반통일 보수 신문으로 엮이는 아픔 속에서 은퇴를 하게 됐다.

나는 그렇듯 그저 기자로서 방북취재를 했고, 느꼈고, 있는 그대로를 글을 통해서 썼다. 어떤 부류들은 나를 불온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일부 극렬 인사들은 회사에 몰려와 나를 해고시키라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 북한산 비봉길 신년 산행은 날씨도 춥지 않은 데다 솜털 같은 눈까지 내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이번 북한산 비봉길 신년 산행은 날씨도 춥지 않은 데다 솜털 같은 눈까지 내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암튼 방북 이후 내 삶은 그 이전과 많이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남은 삶은 남북화해와 통일 조국을 위해 무언가 작은 역할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3년 전 25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올 때 딱히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건 아니었다. 다만 사회를 좀 더 좋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여러 사회운동단체들에 관심을 보였고, 그들과 교류를 하는 것은 다른 어떤 모임보다 뜻깊었다.

그러던 일련의 모임에서 김래곤 6.15산악회 총무가 나를 콕 찔렀다. 산에 갈 생각이 없냐는 것이었다. 원래 자연을 좋아하고, 사람 어울리는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경기도 예봉산 산행에 동참한 것이 나와 6.15산악회와 첫 인연이다.

615산악회 회원들이 북한산 금선사에 계신 장기수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렸다. [사진제공-6.15산악회]
615산악회 회원들이 북한산 금선사에 계신 장기수 선생님들께 새해인사를 드렸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이번 북한산 비봉길 신년 산행은 날씨도 춥지 않은 데다 솜털 같은 눈까지 내려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새하얀 수림 속에서 함께한 점심은 또 어찌 그리 다양하고 화려하던지.

하산길에 금선사에 들러 조국통일의 한을 품고 영면하고 계신 장기수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뜻깊었다.

23년 전 미국에서 맞았던 6.15의 감격, 그리고 2012년 방북 취재를 계기로 내 가슴의 지평이 열린 후 귀국하여 6.15산악회와 만난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귀국 후 많은 옛 인연들과 다시 연결됐다. 학연, 지연 등등. 반가운 마음에 모임에 참석했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이 다가왔다. 대화는 제한적이었고, 화제는 과거에 머물렀다. 단톡방에는 경조사 공지만 즐비하게 올랐다. 단톡방에 올린 경조사는 안 본 것으로 하겠다고 페이스북에 공표까지 했다. 단지 동창, 동기라는 이유로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도 무의미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페북 친구, 고전학자 박황희님이 내 생각과 똑 같은 글을 올렸다. 내용인 즉 이랬다.

“귀가 순해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추억’을 공유한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가 공유될 때에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동창회라는 이름의 모임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이었다.

산행 후 뒤풀이 장소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산행 후 뒤풀이 장소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제공-6.15산악회]

이 말을 장황하게 하는 이유는 한국에 들어와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훨씬 좋더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사회개혁을 위해, 남북화해를 위해, 통일조국을 위해, 복지사회를 위해, 적폐해소를 위해…. 그 여정에 자신의 삶을 담그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동창, 동기라는 이름의 소위 ‘친구’보다 훨씬 좋더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사람에 대한 탐색이 필요 없이 금세 속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비전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그래서 나는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다.

신입생더러 갑자기 산행기를 쓰라고 하니 두서없는 얘기들이 튀어 나왔다. 교감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 이해를 바란다.

남북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동지들과 함께 몸과 마음을 함께 다지는 즐거운 산행이 기다려진다.

 

필자 이원영 약력

-1962년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중앙일보 본사기자, 미주지사 편집국장

-미국 한의대 졸업, 자연치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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