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열혈 청년 김상옥(金相玉, 1890~1923) 의사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나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와는 달리 당시 서울의 한복판 종로에서 유혈 항거를 한 열혈 독립운동가이다.

나는 김상옥 의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지 꼭 100년이 되는 오늘 이 글을 인터넷 신문 [통일뉴스]에 기고한다.

1. 사업가 김상옥

김상옥 의사는 1889년 1월 5일,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상옥 의사의 본관은 김해이고, 별명은 영진(永鎭)이며, 아호는 한지(韓志)이다.

집이 가난하여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개신교(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부터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안목을 넓혔고,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에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당시 김상옥이 운영하던 철물점은 이내 직원 50명을 거느린 철공소로 발전했고, 김상옥의 철공소는 각종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거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농기구, 장갑, 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1917년의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시에는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해 보급하였는데, 당시 말총모자 판매액으로 3~4만의 큰 수익을 올렸다.

2. 김상옥의 독립전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등과 함께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 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0년 김동순(金東淳) 등과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 요인의 암살을 꾀하다가 발각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1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 3면. 김상옥 의사의 유혈 항거를 기사 지면의 1/2을 할애하여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 3면. 김상옥 의사의 유혈 항거를 기사 지면의 1/2을 할애하여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22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으며, 1923년 1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으로 귀국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의 총살이 여의치 않자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고, 이후에 체포를 피하여 다니며 많은 일본 경찰을 사살하였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5시반경, 일제 경찰은 김상옥 의사의 피신처였던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곳이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직감한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5채의 가옥을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한 1천여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은 그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던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남은 마지막 탄환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였다. 당시 만 34세였다.

3. 김상옥 기념관이 필요하다

가족들이 성체(聖體)를 수습할 때 그의 몸에는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한다. 1월 26일 가족들과 그를 추모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찾아온 학생들의 호곡(號哭) 속에 이문동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금년(2023년) 1월 12일(목)은 김상옥 의사의 항거(抗拒) 백주년이 되고, 22일(일)은 김상옥 의사의 순국 백주기가 된다.

김상옥은 감리교인이었다. 감리교 동대문교회에 출석하였고, 거기에서 손정도(孫貞道, 1872~1931) 목사를 만난다. 동대문교회는 김상옥 집터(본적지 ; 종로구 창신동 487)에서 200미터 정도의 거리이다. 김상옥 집터는 현대식 빌딩이 들어서 있고, 동대문교회는 2014년에 한양성곽 복원을 위하여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흥인지문공원이 들어서 있고, 인근에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다.

최근 ‘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종로지방회’에서는 동대문교회의 복원을 염원하고 있다. 나는 이 결실이 맺어지길 소원한다. 아울러 복원되는 동대문교회에 김상옥 의사 추모실이나 기념관이 설치되기를 희망한다. 김상옥 의사 같은 열혈 청년이 오늘 우리나라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침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회장 윤홍근)는 의사의 순국 백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사)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에 심심한 경의와 격려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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