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페르낭 브로델은 역사적 시간을 ‘장기지속’, ‘국면’, ‘사건’으로 구분한다. ‘장기지속’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지나가는 안정적이며, 일관되게 유지되는 구조를 갖는 시간이다. 이에 반해 ‘사건’적 시간은 미시적이며 겉으로 드러나 있어 언제라도 의식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국면’은 ‘장기지속’과 ‘사건’의 중간 정도로 인식되는 시간이다. ‘국면’은 잘 드러나진 않지만 진행되고 있는 ‘장기지속’의 과정이 사건으로 외형화됨으로서 행위자들 간의 작용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의 구조들로 인해 사회 구조와 각각의 행위자들의 의식 사이에는 일치되지 않는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적 차이를 블로흐(Ernst Bloch)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 정의했다.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시간은 70년 동안 수많은 사건 속에서 많은 국면을 만들어 왔다. 이로 인해 민주화의 이행을 위한 정의와 이를 거스르는 역행이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정치, 사회, 경제 등 많은 영역에서 나타났다. 특히, 정치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을 정도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존재한다.

2012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 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 판결 직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는 어떻게 보느냐의 질문에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라고 했다.

32년 만에 사법 판결을 바로잡은 것을 두고 ’최악의 사법 선고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서 보는 시각은 사건이 장기지속의 역사적 시간이 되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한다. 민주주의 이행기 정의 실현을 거부하는 배경에는 ‘부인(denial)’ 정치가 작동한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적 시간의 이행 과정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한순간도 중단될 수 없다.

이행기 정의 실현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김종욱씨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대법원을 통해 무죄 판결됨으로서 억울하게 사형당한 분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이수병 선생의 삶

이수병 선생은 1937년 3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1953년 부산사범학교 입학하여 사회과학이론연구회 ‘암장’을 만들어 동문들과 모임을 갖고 청년들이 나아갈 바에 대해 고민하였다.

이후 이수병 선생은 1959년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편입한다. 그리고 1960년 11월 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연구회를 통해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 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결성준비위원회’에 경희대 민통련 대표로 참가했다.

4·19혁명으로 인해 확장되었던 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탄압 받기 시작했다. 이수병 선생은 1961년 9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혁명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7년의 옥고를 치르고 1968년 4월 17일 석방된 그는 유신체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독서회, 강좌를 통해 혁신계를 비롯한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장기 집권을 이어가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다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수병 선생은 1974년 4월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 이른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수병 선생을 비롯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우홍선, 송상진, 김용원, 여정남 선생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등이 이들의 죄목이었다.

사형은 대법원 선고 다음 날인 1975년 4월 9일에 곧바로 집행되었다. 국제 법학자협회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을 사형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철저한 조작으로 사법 살해된 날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김종욱]
경남 의령 이수병 선생 묘소에서 개최된 추모제 모습. [사진제공-김종욱]

이수병 선생의 추모 행사는 1990년에 들어서 경희대 민주동문회에 의해 챙겨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천주교 사제 등이 나서서 사형당한 분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하였으나 인혁당 관련 추모행사는 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시기였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며, 이수병 선생을 비롯한 사건 관련자들은 2007년 1월 23일 32년 만에 대법원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역사적 시간과 김종욱씨의 삶

김종욱씨는 92학번으로 경희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아당뇨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실에서 역사, 지리 백과사전을 읽으며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학생회를 통해 학교 주변 식당의 밥값 인상 담합, 학교 당국의 등록금 인상 등을 막아 내는 것을 보며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고 이를 통해 함께 행동하면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굣길에 우연히 전농동 철거민들이 용역회사 직원들에 의해 폭력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경찰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들은 철거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벌어지고 있는 폭력 상황을 못 보도록 막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며 공권력에 대해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선배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학회모임을 하며, 과학생회장을 거쳐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잠시 여행사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였으나 다시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활동하던 단체는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였다. 그가 상근활동가로 활동하던 2002년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 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행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이전에도 이런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였다.

그는 두 여중생이 사망한 장소를 방문하여 참혹한 현장을 직접 보게 되었다. 사망 사건을 일으킨 장갑차는 미 2사단 소속이었다. 사망 사건에 대한 사과와 처벌을 요구하며 의정부와 파주지역의 여중생 및 여고생들은 2사단 앞에서 항의집회를 했다. 침울하고 비통함 속에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으나 국민적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경기 지역에서의 두 여중생 사망에 대한 미국의 사과 요구 시위 과정에서 무리를 하여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치료에 들어갔다.

몸을 추스른 후 그는 2003년부터 경희대 민주동문회에서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경희대 민주동문회는 매년 4월 8일 이수병 선생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가 상근활동을 하던 시기는 이수병 선생 30주기가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2005년 30주기 과정에서 이수병 선생 평전 『암장』을 『이수병 평전』으로 재출간하는 사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법원 재심준비에 참여했다.

2007년 이수병 선생의 대법원 재심을 통한 무죄 결정은 그가 역사를 보는 관점에 다시 한 번 큰 감명을 준 사건이었다. 구호에 그칠 줄 알았던 명예회복이 실제로 이루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추모제 개최라는 사건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정의 실현이라는 장기지속의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16년간 경희대 민주동문회 사무국장 등의 활동을 했다. 하지만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쉼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사이 두 번째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건강을 추스른 후 그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운영하는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사무국장으로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사람들의 기록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수집된 자료를 소장만 하기는 안타까워 기록을 공유하기 위해 만든 전시관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김종욱씨. [사진제공-김종욱]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는 김종욱씨. [사진제공-김종욱]

김종욱씨는 현대사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시간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하지만, 아직도 매년의 추모제라는 사건이 어떻게 이수병 선생과 ‘인혁당 재건위’에 대한 이행기 정의가 실현되었듯 일제 강점기 역사도 잊히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부인의 정치가 작동하는 지난한 역사적 시간을 걷고 있다. 보수 회귀로의 정권 교체는 민주화에 대한 역행의 국면을 형성하기 위한 사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 교체 때마다 교과서는 개편 대상이 되어 단순한 기술적 수정이 아닌 관점을 바꾸는 시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한국의 역사적 시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한국은 수많은 ‘사건’과 ‘국면’의 반복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김종욱씨 등 활동가들을 통해 우리는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장기지속’의 역사적 시간 속에 머물고 있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자 한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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