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2023년 첫 번째 조중동폐간실천시민단 지원 1인시위를 위해 광화문에 있는 원표공원에 갔다. 벌써 새해가 되고, 조중동폐간실천 1인시위를 한 지도 1100일이 넘었다. 매달 하루씩 날을 정해서 이곳에 와서 한 시간 반 정도 1인시위를 한다. 새해 첫째 달이 되었으므로 올해 1인시위를 시작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전처럼 잡혀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서 있으면 된다. 이따금 와서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는 반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쯤이야 간단하게 답을 해서 물리칠 수 있다.

처음 했을 때는 신문사 측에서 사람이 나와서 방해를 했다고 한다. 또 사주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인지 몰라도 광화문 일대에서 극우시위를 하는 자들이 와서 종종 해코지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실천단이 워낙 강하게 맞서 자리를 잘 잡아서 그런지 신돌석씨가 하기 시작한 뒤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날씨만은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눈비가 많이 올 때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늘이 그랬다. 주말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기온이 서울 최저 영하 13도를 기록하였다. 이런 날에 30분 이상 서 있으면 온몸이 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표공원에 도착해서 항상 지키고 있는 실천단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리고 계단으로 되어 있는 공원 중심에서 1인시위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장종웅이었다. 그는 다니던 악기제조업체가 위장폐업을 하자 철회투쟁을 하였는데, 특히 대법원 1부와 2부가 부당해고와 위장폐업 여부를 놓고 엇갈린 판결을 내리자 대법원 앞에서 텐트농성을 하기도 했다. 10년이 넘게 계속된 투쟁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요즘은 조중동폐간투쟁을 비롯한 여러 투쟁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경에 수도권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었던 친목모임에서였다. 주축이 58년생들이라서 ‘개띠 노동자회’라고 하였다. 57년생도 있고, 59년생도 있었지만 대체로 58년 개띠들이었다. 그리고 대학 학번으로는 77학번들이었다. 당시에는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이 대거 노동운동현장에 들어올 때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민주노조에서 학생 출신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학생 출신들은 대체로 산업선교회나 가톨릭노동사목 등을 통해서 노동운동을 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쯤이 되면서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제적되고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이른바 존재 이전이란 이름으로 대거 현장에 들어갔다. 또 시위 등을 하지 않고 학교를 졸업하거나 중퇴한 학생들이 현장에 가는 경우도 많았다. 남자들은 대개 군대를 갔다 온 뒤 현장에 들어갔고, 여자들은 곧바로 현장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어떤 경우이든 이들이 수도권 여러 지역에서 노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쟁의를 하기도 했다. 그 결과 신분이 드러나고 해고가 되는 일들이 많았다. 이때 해고된 사람들 주축으로 여러 노동운동단체들이 만들어졌다.

개띠 노동자회는 이 과정에서 해고가 된 사람들이 주로 모였는데 대부분 학생 출신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 중 개띠 전후인 사람들을 이 모임에 참여시켰다. 신돌석씨도 공장에서 만난 학생 출신 노동자 조철구의 소개로 이 모임에 들어갔고, 장종웅은 당시 자동차 회사에 다니다 해고되면서 이 모임에 참가했다. 신돌석씨와 장종웅은 노동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좀더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신돌석씨와는 달리 좀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는 모임이 있을 때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술만 마셨는데 그러다가 술기운이 오르면 곧바로 일어나서 가곤 하였다. 사실 개띠 노동자회라는 모임이 만나서 술 마시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고 그때가 한창 바쁠 때였으므로 자주 만나기도 어려웠다. 몇 달에 한 번씩 만났는데 친목회원 중 일부만 모이기 일쑤였다. 각자 있는 지역의 정보를 주고받았고, 가끔씩 정세나 투쟁 방향에 대해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학생 출신 중에서도 고수들만 모였기 때문에 솔직히 신돌석씨도 이야기에 끼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 장종웅도 그랬던 것 같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노동자 출신인 신돌석씨와 장종웅은 2차를 따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모임은 주로 인천에서 했는데 공단이 있는 부평, 주안 등에서 보았다. 전체 모임 이외에도 둘이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만나면서 전체 모임이든 둘이 만난 자리이든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적은 없었다. 장종웅도 그랬고, 신돌석씨도 그랬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은 신돌석씨가 있는 지역에 찾아왔다. 아마 그때가 6월민주항쟁이 한참 일어나던 때였을 것 같다. 시위 대열에서 그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신돌석씨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핸폰이 없을 때이니 전화로 연락해서 찾아올 수는 없고, 시위하는 데 가면 신돌석씨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무작정 왔다고 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시위는 주로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신돌석씨와 장종웅은 시위 대열에서 벗어나서 시장통에 있는 순댓국집을 찾아갔다. 평소에도 자주 가던 곳이었다. 술집에는 시위를 하다 들어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낯이 익은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확실하게 아는 사이는 없었다. 한쪽 구석 자리를 잡아서 순댓국과 소주를 시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신돌석씨는 장종웅이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렇다고 무슨 용건으로 왔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알아서 말하기를 기다렸는데 장종웅은 좀처럼 왜 왔다는 말을 하지 않고 딴 이야기만 계속했다. 요즘 자기 지역은 싸움이 어떻다는 둥 하면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놀러온 것처럼 말했다. 공부라고는 담을 쌓고 살다가 요즘 하려니 힘이 든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주 석 잔을 연거푸 마신 장종웅이 신돌석씨를 빤히 쳐다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신형 말이에요, 만약에 지금 북한군이 쳐 내려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돌석씨는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술집에서 노래도 불렀기 때문에 시끄러워서 다른 좌석에서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기도 하였다.

북한군이 왜 쳐 내려와요? 그거야 군사독재정권과 자본가들이 하는 이야기지.

아니 그럴 리가 없지만 누가 아나요?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지.

신돌석씨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어서 그런지 막상 이런 질문을 받고 보니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본 것은 아니었다. 노조 결성 준비위를 할 때 여러 사람이 툭 하면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 이용당하지 않는 범위에서 노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럴 때마다 자기 권리를 찾자는 것인데 왜 북한 이야기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에서 분단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무섭게 작용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장종웅이 왜 자기가 그런 질문을 하는지를 설명하였다. 학생 출신끼리 대화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민족문제 미국문제 등을 말하다가 논쟁이 되고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이야기를 하더란다. 내용은 잘 정리가 안 되는데 아무튼 그러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북이 내려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자기는 그렇다면 북한군과 싸울 거라고 하더란다. 그러자 질문한 사람이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이야기할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 일어나서 나갔단다.

장종웅은 자기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사실 학생 출신들은 자기 속을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단다. 그리고 자기 머릿속에 서로 다른 생각이 마구 싸움을 일으킨단다. 그것은 신돌석씨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 문제를 덮어 버리고 일단 부닥치는 일에 몰두해서 그렇지 말끔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때 장종웅은 자신이 왜 특별히 그런 문제에 민감한지를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놀랍게도 그는 공수부대 하사관으로 7년을 근무한 사람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공수부대 하사관으로 근무한 그는 자동차 공장에 특채되었다. 공수부대 하사관이라면 일단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 것이고, 어느 정도 관리 능력도 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회사의 노동자 통제에 용이하므로 특채한 모양이었다. 처음 몇 년 동안 장종웅은 회사의 요구대로 착실히 일했다. 회사에 노조가 있었는데 어용노조였다. 거기에도 가입해서 대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노조 대의원이면 분임조 모임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매주 한 번씩 분임토의도 하여 의견 수렴을 하였다.

장종웅이 대의원을 맡은 부서에 부근 성당을 다니는 노동자가 있었는데 매번 가톨릭 소식지를 가지고 왔다. 부서 사무실 책꽂이에 꽂아 놓기도 하고, 장종웅에게는 꼭 주면서 보라고 권하곤 하였다. 준 다음 주에는 읽었냐, 내용이 어떻더냐 하면서 묻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대답했고, 조금 성가시기도 했지만, 정성을 봐서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마음이 이상했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도 그 소식지를 보고 처음 알았다. 노조들이 정권이나 자본가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파업이 일어났다. 주로 학생 출신들이 움직여서 일어난 파업이었다. 회사는 장종웅을 회사측 대의원으로 생각하고, 파업을 저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장종웅은 듣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파업하는 사람들의 말이 옳은 것이었다. 그래서 파업에 참가하고 발언도 하였다. 회사에 찍히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협력업체 5급 사원으로 보내줄 테니까 가라고 하였다. 협력업체에 가서 품질 검사를 하는 일이었다. 생산직이라면 거의 가고 싶어하는 직책이었다. 봉급도 많고 협력업체 임원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꿀보직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장종웅으로서는 회사의 말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이미 마음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그런 요구를 하기 한 발 앞서서 장종웅은 가톨릭 소식지를 갖다 주는 노동자를 따라 가톨릭 노동사목에 가서 상담도 하였고,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한 선배들을 만나 조언도 들은 상태였다. 생각을 하고 또 했지만 회사는 자기를 이용하려고만 했고, 노동사목이나 민주노조운동 선배들은 진심 어린 충고를 한다고 생각되었다. 결국 회사의 요구를 거절했고, 그것 때문에 해고가 되었다.

신돌석씨와 만나서 개인 이야기를 처음 했던 이때는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되고 복직투쟁을 하던 때였다. 한해 전인 1986년에는 5.3인천항쟁에도 참여했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규탄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되었다. 1987년이 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요구 투쟁, 그리고 4.13호헌 철폐투쟁에서 뛰어난 투사로 활약하였다. 신돌석씨도 같이 시위를 해봤지만 몸집도 작은 사람이 어떻게 힘이 좋고, 몸놀림이 잽싼지 놀라울 정도였다. 알고 보니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이었다.

그런데 그가 중대한 장애물을 만난 것이었다. 지금은 의미 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사실 당시에는 노동자 출신과 학생 출신 사이에 커다란 장벽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학생 출신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노동자 출신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상당히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것 때문에 노동운동에서 멀어진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학생 출신이라는 사람들도 한참 미성숙했고, 당시에는 노동자 출신들은 막 운동을 접해서 생각이 정리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시대의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학생 출신들의 논쟁을 옆에서 들은 장종웅이 혼란스러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말대로 하면 그는 얼마 전까지도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일념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정부에 반대하면 공산당이고, 그런 사람은 쳐부수어야 한다는 생각을 뼛속 깊이 주입 받았던 것이다. 고민하다가 그래도 같은 노동자 출신으로서 대화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 신돌석씨를 멀리 찾아온 것이리라. 신돌석씨는 부담스러운 마음도 생겼지만 그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도 정리해보자는 마음도 생겼다. 그렇게 장종웅과 맺은 인연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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