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는 1970년대 진행된 39차례의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 관련 문서를 30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 대상은 1972년 8월 29일부터 1977년 12월 9일까지 진행된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문서. 남북대화 사료집 제4~6권, 총 3,028쪽에 해당한다.  

이번 공개대상에서 남북 당국간 접촉, 회담 분야(남북대화 사료집 제7~9권) 문서는 제외됐고  공개 시기도 작성, 접수 이후 30년이 지난 1981년까지에서 1979년으로 줄어들었다.

앞서 통일부는 지난 5월 4일, 분단 이후 첫 당국간 회담이 시작된 1970년 8월부터 1972년 8월까지를 포괄하는 남북대화 사료집 제2, 3권, 총 1,652쪽 문서를 일반에 시범공개하면서 관련 절차를 거쳐 연내에 1981년까지의 남북회담 문서를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국간 접촉, 회담내용이 공개범위에서 제외한 것도 문제지만, 생산, 접수된지 30년이 지난 문서를 연내 공개한다는 발표가 내년으로 미뤄진 것도 사료 공개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목할 점은 통일부가 1981년까지의 남북회담 문서를 2022년까지 공개하도록 한 통일부 훈령의 부칙을 이번 공개 이틀전에 개정하여 공개시기를 1년 미루도록 한 것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29일 관련 질문에 "예비심사과정에서 비공개 범위와 관련한 의견이 상이하게 갈렸던 분야가 있어 해당 분야의 검토를 거쳐 공개범위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일단 (이번 공개에서는)제외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또 2023년 공개를 검토하고는 있지만 시기는 특정하기 어렵고 의견 수렴 절차가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통일부는 1970년대 진행된 39차례의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 관련 문서를 30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노동신문 갈무리] 
통일부는 1970년대 진행된 39차례의 남북적십자 분야 회담 관련 문서를 30일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사진-노동신문 갈무리] 

통일부가 문서공개를 위해 지난 1월 1일 제정해 시행하고 있는 훈령인 '남북회담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에는 '△예비심사 △유관기관 협의 △남북회담문서 공개심의회 등 절차를 거쳐 남북회담 문서공개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공개 결정을 앞두고 진행된  예비심사위원들의 심의 결과에 따라 비공개범위가 결정됐다는 것이다.

통일부가 사전 배포한 보도참고자료에 따르면, 이번 문서공개를 위해 지난 10~11월에 예비심사 및 유관기관 의견수렴이 진행되고 12월 16~20일에 '2022년 제2차 남북회담문서 공개 심의회'가 열렸으며, 공개를 이틀 앞둔 12월 28일 훈령 부칙 제2조가 개정됐다.

기존 훈령 부칙 제2조에는 "훈령 시행일 이전에 이미 생산하거나 접수된 후 30년이 지난 남북회담문서에 대해서는, 제3조 제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1981년 이전에 생산하거나 접수된 남북회담문서를 2022년에 우선 공개하고, 이후 2023년부터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공개한다"고 되어 있다.

공개시기와 범위를 정하는 것은 기존 훈령상 예비심사위원들이 권한 범위를 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일부는 12월 28일 문서 비공개 예외조항과 관련된 훈령 부칙 제2조를 1981년까지의 회담 사료는 2023년까지 공개하고 2024년부터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개정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같은 조치는 남북회담 문서공개의 본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통일부의 정보공개 취지는 '국민들의 알 권리와 대북 정책 추진의 투명성 제고'를 위한 것.

이를 위해 통일부는 1월 1일 관련 훈령을 제정했지만 취지와 달리 '알리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숨길 것은 가리는 행태가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회의록을 포함해 남북적십자 △본회담(제1~7차, 1972.8~1973.7) △대표회의(제1~7차, 1973.11~1974.5) △실무회의(제1~25차, 1974.7~1977.12) 진행과정이 망라되어 있다. △제4권(1,081쪽)에 남북적십자 본회담(제1~7차)과 대표회의(제1~7차) 진행과정, △제5권(920쪽)에 남북적십자 실무회의(제1~25차)와 회담 중단 및 재개 노력, △제6권(1,027쪽)에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남북 양측 언론보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총 3,028쪽 중 417쪽은 전체 비공개로 먹처리되고 상당 부분은 비공개를 했다. 이를 포함해 이번 공개율은 86% 수준이다.

공개 문서는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국립통일교육원 △북한자료센터 등 3곳에 마련된 '남북회담 문서 열람실'에서 열람할 수 있으며, 문서공개 목록과 열람절차 등은 남북회담본부 누리집(https://dialogue.unikorea.go.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통일부는 앞선 보도참고자료와 관계자 사전 설명을 통해 해당 기간 남북적십자회담에서는 당시의 남북관계에서 접근이 쉽고 해결이 용이한 측면도 있지만 당위론 차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양측이 상반된 입장과 견해차를 노정하는 중에도 남측이 제안한 설·추석 고향방문단 상호교환, 노부모 생사확인 및 면회 등이 중단되기 전까지 회담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고 1985년 첫 이산가족 교류로 이어지게 되었다며, 남측 제안이 적용가능하고 실효적 대안이었다는 방증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북측이 적십자회담 중에도 김대중납치사건, 남침 땅굴과 판문점 도끼사건 등 국내 및 남북관계 주요사건을 거론한 것 등을 상기시키며 적절치 못하다는 취지의 언급도 이어졌다.

윤석열 정부가 줄곧 북측에 이산가족 생사확인과 상봉 문제 등을 제안하고 호응을 기대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없지만 7.4남북공동성명을 필두로 한 남북 당국회담 경과가 제외된 것은 아쉽다. 

지난 5월에 이어 연내 두 차례의 문서공개가 있었지만 여전히 1972년 7월 4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골간으로 하는 남북 당국간 접촉과 대화 등 본격적인 내용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마치 '앙꼬없는 찐빵'이라고 할만하다. 

남북은 1972년 7월 16일부터 10월 6일까지 4차례의 '남북공동위원장 회의'를 위한 실무자 접촉을 진행했고, 3차례(1972.10.12, 11.2~3, 11.30)의 남북공동위원장 회의에서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안에 간사회의와 5개 분과위원회, 조절위원회 공동사무국을 판문점에 두기로 합의했다.

이후 3차례(1972.11.30~12.2 서울, 73.3.14~16 평양, 6.12~14 서울)의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와 3차례(1973.3.10, 4.24, 5.23)의 간사회의, 그리고 10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회의(1973.12.5~75.3.14)와 3차례(1979.2.7, 3.7, 3.14) 변칙대좌 등 분단극복을 위한 당국간 대화를 진행했다.

그리고 1979년 박정희 저격(10.26) 이후인 1980년 2월 6일부터 8월20일 사이에 '남북총리간 대화를 위한 남북실무대표 접촉이 10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5.18쿠데타를 전기로 북측은 더 이상의 접촉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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