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1891~1950) 선생은 1891년 8월 7일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석탄리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에 실종된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이다.

보훈처에서 권덕규에 관한 관심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하여 매우 늦어 2019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김포군은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이다.

1. 권덕규는 누구인가

애류 권덕규는 1913년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조선광문회에서 6년간 한글을 연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장지연(張志淵) 이인(李仁) 등과 제휴하여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후 휘문‧중앙‧중동 등 여러 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으며,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1940년에 발병한 중풍으로 인하여 1942~3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의 칼날을 피하며 불구속 입건되었다.

해방되자 임시정부의 귀국을 촉구하고 환영하기 위한 ‘국민대회취지서 국민대회준비회선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해방을 맞아 출감한 이극로 김윤경과 함께 국사국어상습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0년 3월 5일 흑석동 자택에서 외출한 후에 돌연 행방불명되었고, 당시 여러 언론에서는 그의 실종 소식을 보도하였다. 당시는 극우들이 백색 테러가 횡행하던 시기여서, 민족주의자 권덕규의 실종은 극우의 백색 테러였을 가능성이 있다.

권덕규의 저서로는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乙支文德)』 등이 있다.

2. 한글학자 권덕규

애류 권덕규는 제1기 민족사학자이다. 1859년생인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이나 1880년생인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보다는 나이가 많이 어려 활동 시기가 늦기는 하였으나, 그의 업적은 조선어 연구에서는 매우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6)과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 산운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애류 권덕규(權悳奎, 1891~1950)와 민세 안재홍(安在鴻, 1891~1965), 그리고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2~1950) 등등은 각기 한두 살 차이로서, 조선왕조의 끝자락을 잡고 태어난 이들은 당시에는 신교육을 받은 신청년이었다.

이들 제1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우리 말과 문자에 대하여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인물은 당연히 『조선어문경위』를 저술한 권덕규이다. 1923년 광문사에서 출판한 이 책은 단순히 국어 교과서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책이다. 저자 권덕규는 국어문법 및 국어학사의 독특한 견해와 주장을 교과서의 형식을 빌려 이 책을 저술하고 있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한다. 남과 북의 우리 민족은 우리 나랏말로 생각한다. 나랏말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되었다. 애류 권덕규를 위시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위하여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분이다.

특히 권덕규는 김윤경(金允經, 1894~1969)에 앞서 고조선시대에 신지문자 등 옛 조선에 여러 종의 고대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한 한글학자이다.

3. 권덕규의 역사서 『조선유기』를 입수하다

애류 권덕규는 대종교인으로 조선어학회 관련자이다. 권덕규의 역사관은 박은식 신채호를 잇는 대종교의 단군을 중시하는 민족사학이다.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박사 역시 권덕규의 경우와 같이 대종교인으로 조선어학회 관련자이다. 두 분 모두 지병으로 일제의 조선어학회 사건시에 불구속 입건된 바 있다. 즉, 권덕규와 안호상은 대종교에서 만나 조선어학회를 거쳐 해방 후까지 교유가 있었던 셈이다.

한국 최초의 철학박사이던 안호상 박사가 후일 민족사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권덕규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권덕규 특유의 논리를 안호상 박사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안호상 박사가 1978년경에 어느 특강에서 단군을 역사적 실존 인물로 다룬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권덕규의 『조선유기』를 잠깐 언급하였다는 정도이다. 그럼으로써 권덕규란 인물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당시 나는 그의 『조선유기』를 입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시중에서 매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조선유기』는 다른 민족사학 저서보다 독자들의 관심이 없어 정부수립 이후 재판되지 않았다.

『조선유기(朝鮮留記)』, 권덕규, 1924년(초판본), 경성 계동 79-10,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朝鮮留記)』, 권덕규, 1924년(초판본), 경성 계동 79-10,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朝鮮留記)』, 권덕규, 1928년(재판본), 경성 화동 70번지,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朝鮮留記)』, 권덕규, 1928년(재판본), 경성 화동 70번지,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朝鮮留記)』 중권, 권덕규, 1926년(초판본), 경성 화동 70번지,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朝鮮留記)』 중권, 권덕규, 1926년(초판본), 경성 화동 70번지,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 권덕규, 1946년 3월 30일 발행(해방후 초판본), 한성시 본동정 163,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유기략(朝鮮留記略)』, 권덕규, 1946년 3월 30일 발행(해방후 초판본), 한성시 본동정 163, 상문관 발행. [사진 제공 - 이양재]

내가 권덕규의 『조선유기 (상고사)』 초판본(1924년) 1책을 입수한 시기는 20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고서경매를 통해서였다. 이후 2022년 1월에 『조선유기 (상고사)』 재판본(1928년) 1책과 『조선유기 중 (근세사)』 초판본(1926년) 1책을 고서경매에서 입수하였고, 곧이어 『조선유기략』(1929년 저술)의 해방 후 판본 1책(1946년)도 고서경매에서 입수하였다.

그런데 이 4책을 입수하고 보니, 상문관은 권덕규가 자신의 저술을 출판하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만든 출판사였음이 드러난다. 『조선유기 (상고사)』 1924년 초판본 판권면에 저작 겸 발행자는 권덕규이며 권덕규의 주소와 상문관의 주소는 ‘경성부 계동 79-10’로 동일하다.

또한 『조선유기 중 (근세사)』 1926년 초판본과 『조선유기 (상고사)』 1928년 재판본의 판권면 역시 저작 겸 발행자는 권덕규이며, 권덕규의 주소와 상문관의 주소는 ‘경성부 화동 70번지’로 동일하다.

이를 보면 권덕규는 자신의 처소를 상문관이라 이름하며 책을 저술하고 출판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조선유기략』 1946년 판본 판권면에는 권덕규의 주소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상문관의 주소가 ‘한성시 본동정 164’로 되어 있다.

계동과 화동은 현재 종로구 북촌(北村) 지역이다. 본동정 164는 현재 동작구 본동으로 9호선 노들역 5번 출구 앞이다.

이를 보면 상문관(尙文館)은 곧 권덕규의 당호(堂號)로 보인다. 즉 권덕규는 자신의 역사 저술 일련의 『조선유기』 3종을 자비 출판하여 분포한 것이 확실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1970년대 후반 당시에 안호상 박사에게 1948년 8월 정부수립 이후 권덕규의 행적에 관하여 묻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4. 『조선유기략』 해제

『조선유기략』은 환웅(桓雄)의 신시시대(神市時代) 이후 1910년 국권강탈까지의 한국사를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체계화한 통사적 개설서이다.

체재를 5편(篇)으로 나누었는데, 제1편은 상고(上古) 6장, 제2편은 중고사(中古史)로 상(上)에 삼국시대 12장, 하(下)에 남북시대 7장, 제3편은 근고사(近古史)로 고려시대 11장, 제4편은 근세사(近世史)로 이조시대 22장, 제5편은 부표(附表)로 전세도(傳世圖), 역대연호(歷代年號), 당색도(黨色圖)가 첨부되어 있다.

제1편 제1장 「조선의 지리(地理)와 종족(種族)」에서는 조선의 활동 범위가 한반도와 만주에 걸쳐 있었으며, 태백산(太白山, 白頭山)을 중심으로 환(桓)이라는 ‘조선 겨레’가 3,000단부(團部)로 나뉘어 있었다고 하여 조선의 영역을 한반도에 국한하는 일본관학자들의 식민사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하였다.

또, 환웅의 「신시시대」와 「단군조선」에서는 환웅과 단군의 활동이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었음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이 해외로 진출하여 중국에도 많이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제2편 상 「삼국시대」에서는 고구려의 수‧당에 대한 전승을 강조하였다. 제2편 하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에서는 발해와 신라를 각각 북국과 남국이라 하여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지양하고 발해까지를 우리의 역사 범주에 포함했다.

그런데 남북국에 대한 이해는 유득공(柳得恭)과 김정호(金正浩) 등 실학자 이래 근대역사학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주목되는 역사 인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발해의 강성과 신라의 쇠미」라는 장에서 보듯이 상대적으로 발해에 역사적 비중을 두고 있다.

제3편 「고려시대」에서는 활자 창제 등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였고, 제4편 「이조시대」는 제1장에 「조선의 창업과 골육의 상잔」을 두어 조선왕조의 부정적 측면을 내세우면서도 문화의 우수함과 울릉도와 백두산 정계(定界) 등의 영토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개항 이후의 역사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란과 일본의 간섭」, 「국호의 개칭과 일로전쟁」 등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부표의 전세도는 단군조선의 「단국전세도(壇國傳世圖)」를 비롯하여 부여(扶餘), 예맥조선(濊貊朝鮮, 箕朝鮮). 위씨조선(衛氏朝鮮), 동부여, 북부여, 갈사(曷思), 비류(沸流), 양맥(梁貊), 감문(甘文),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駕洛), 대가야, 발해, 고려, 조선의 순서로 왕계(王系)를 도표화하였다.

「역대연호」에서는 역대 왕조 외에도 묘청(妙淸)이 반란할 때 내세운 연호를 대위(大爲)라는 국명 아래 싣기도 하였다. 또한 정안(定安), 흥료(興遼), 대원(大元) 등의 국명과 그때의 연호도 함께 기재하였다. 「당색도」는 각 붕당(朋黨)의 분기와 함께 당의 주요 인물을 당파 아래 부기하였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5. 국가보훈처의 뒤늦은 권덕규 추서

애류 권덕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위하여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분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하여 확인해 보면, “국가보훈처에는 표지에 ‘조선어학회’ 관련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문서철”이 있다. 그 문서철에는 1963년 7월 자 「탄원서」, 1966년 7월 자 연명 날인된 「진정서」, 「호적등본」 등이 편철되어있다.

그러나 권덕규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관심은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하여 매우 늦어 2019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7월에 탄원서를 보낸지 56년 후에 서훈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왜 그랬을까?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애류 권덕규가 널리 알려진 것은 장지영‧김윤경 등과 함께 2021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그 행적이 널리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중에 국가보훈처의 보훈 행정에 대하여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헛웃음을 짓게 된다. 권덕규의 보훈이 늦어진 것을 미루어 보면, “국가보훈처의 보훈행정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푸념하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김포시에서 그를 기리고, 그의 기념관이 그의 고향 김포시 하성면 석탄리 인근에 세워지기를 권고한다. 그의 고향에서 그를 중요시하고 기리지 않으면 국가는 그를 기리지 않는다.

6. 장탄식(長歎息)

지금 돌이켜 보면 1980년대 이유립에 의하여 출현한 황당사관의 결정판 위서(僞書)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우리 민족의 제대로 된 모든 민족사관학자들을 들러리로 내세우고 민족사관을 왜곡 및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1990년대 이후로 『환단고기』 출판과 논쟁에 휩쓸려 우리 민족의 제대로 된 민족사학 저술들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간파하기에는 『환단고기』는 20세기 말 일본 극우가 정한론(征韓論) 사료로 삼고 있으며, 그들은 이를 통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황당한 사상누각에 세우고 있고, 우리의 민족문화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백암 박은식이나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애류 권덕규 등등의 저서를 알기보다는 허상의 『환단고기』에 매달린 작금의 자칭 민족사학 추종자들을 볼 때, 식민사학의 피해도 크지만, 황당사학의 피해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민족사학으로 위장한 황당사학은 반북적(反北的) 반민주적 사고에서, 북의 주체사학에 대한 반동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이유립은 해방전의 친일행적이 있으며, 해방후 그는 북에서 탄압을 받고 월남한 이력을 보아 그는 반북적 인물이며, 5공 신군부에 기웃거린 반민주적인 행적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한 이유립에 의하여 제1기와 제2기 민족사학의 자존은 크게 훼손되었다.

나는 권덕규와 같은 제1기 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기념하는 일은 진정한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본다. 이에 나는 김포시 지방 정부에 ‘애류 권덕규 기념사업’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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