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아르헨티나의 전직 해군 대위 실링고(Adolfo F. Scilingo)는 1995년에 자신이 해군기술학교의 수용소에서 근무하며 저지른 추악한 사체 유기를 고백했다. 그는 1976년부터 1978년 동안 사회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고문 등으로 살해당했거나 의식을 잃고 수감되자 이들을 한 번에 15-20명씩 비행기에 태워 바다에 던져 버리는 끔찍한 업무를 수행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처리한 이들은 대략 1,750여명에 이르렀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이렇게 정권에 저항하는 국민을 고문하고 죽이는 ‘추악한 전쟁’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는 이들 ‘실종’에 대한 과거청산을 통해 가해자들을 사법처리 했다. 군 장교들 수 십 명이 법정에 세워졌고 실형이 선고되었다.

실종은 직접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과거 사건으로 치부되기 어렵다. 그래서 실종은 가족과 관련자들에게는 과거가 아닌 현재도 진행되는 사건이며, 이들에겐 국가의 부정의가 더 큰 사건으로 인식되게 된다.

3만 명에 달하는 아르헨티나의 ‘실종’에 대해 이들을 찾기 위해 1976년부터 모였던 ‘오월광장 어머회’의 실종자 어머니들은 최근까지 실종된 자식의 사망신고를 거부한 바 있다.

1987년 발생한 KAL 858기 사건 희생자 가족들도 시신을 확인하지 못하자 실종으로 보고 사망신고를 거부한 바 있었다. 그러자 당시 한국 정부는 직접 나서서 희생자들을 사망으로 처리한 바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도 실종 사건이 존재한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에 실종된 안치웅, 노진수, 박태순의 의문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행히 박태순씨는 실종 10년 만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무연고자 처리되었던 유골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안치웅씨와 노진수씨는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실종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의 ‘실종’은 의문사 사건과 사건 발생의 배경이 비슷하다 보니 동일시되고 있지만, 실종과 의문사는 다른 성격의 국가 폭력이다.

서울대 학생운동 참여 후 졸업과 함께 실종된 안치웅 실종 사건

안치웅씨는 1982년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월에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과 학생회, 단과대 학생회, 서울대 학술동아리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다. 1983년 광주항쟁 관련 유인물을 소지하고 11월 학생의 날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가 관악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985년 3월 28일 부평역 가두시위로 연행되어 구류를 살았다. 같은 해 4월에도 노동운동 탄압 규탄대회에 참여했다가 연행되어 구류를 살기도 했다.

학생이면서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주로 했던 안치웅씨는 1985년 6월 29일 구로공단 내 노동조합의 동맹파업과 관련하여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의 농성에 참여하였다가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에도 그는 교도소 내 순화 교육을 거부하고, 서적 반입 금지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1986년 7월 4일 그는 일 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만기로 출소했다.

안치웅씨는 1987년 복권되어 9월 특례로 서울대에 복학하였다. 그리고 1988년 2월 졸업하였다. 그는 졸업 후인 1988년 5월 26일 오전 교회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어머니가 운영하던 광주식당을 나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교도소 출소 이후에도 공안 당국은 그를 사찰하였다. 그는 서울 강동경찰서로부터 중점관리 대상자로 찍혀 동향관찰을 받았다.

그의 실종에는 안기부 등 다른 공안기관의 내사 또는 수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내사와 수배자 검거를 위한 강도 높은 공안 기관들의 압박이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안치웅씨의 어머니는 실종되기 전 그가 지하철역에서 함께 활동했던 지인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진행된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 참가한 남택범씨(흰색 마스크 쓴 사람). [사진제공-추모연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진행된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 참가한 남택범씨(흰색 마스크 쓴 사람). [사진제공-추모연대]

선배의 실종을 알고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남택범씨

남택범씨는 한국이 유엔 ‘강제실종 방지협약’에 가입하기 위한 국회 비준 동의를 마친 것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 협약에 한국이 가입함으로써 안치웅씨 실종의 진실규명에 한 발 더 다가간 것이라며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 보안사에 근무한 윤석양 이병이 양심선언 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내용에는 서울대생 380여 명에 대한 사찰내용이 별도로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는 남택범씨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3‘ 언어학 4년 제적, 민민투 위원장, ...전국 ’애투련‘ 위원, 건대 애학투 농성 사건 강제해산 규탄 집회 주동, ...자취방에서 학습, 86. 12. 19. 구속 송치, ...9. 3. 토의, 독산동 코카콜라 시위대비 인문대 과회장 모임”

그에게 안치웅씨와의 인연에 대해 물었다. “치웅이 형이랑은 광주 숭일고등학교 선후배로 만났어요. 학교에 입학하자 치웅이 형이 먼저 나를 찾아왔어요.”

1983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그는 3월 안치웅씨와 처음 만났다. 안치웅씨는 그에게 “이제까지 멍청하게 살았으니 같이 사회에 대해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선배의 말이니 그러자고 동의했고 이후 안치웅 선배를 따라 1학년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들어갔다. 언더서클 활동이었다. 공부모임은 점차 사회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실천하는 활동으로 옮겨갔고 그는 학생시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국 사회는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국회의원 선거 등 정치 변화가 있었고, 전두환 군부정권에 대한 민주화운동으로 학생운동가들은 정치활동과 함께 노동자들과도 연대 활동을 병행하며 해나갔다. 남택범씨도 이러한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86년 11월 3일 그는 신민당 점거 농성 중에 연행되어 일 년간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학교에서는 이미 제적된 상태였다. 출소 후에도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다행히 제적 학생들에 대한 복교 조치가 이루어져 학교에 복학하였고, 학교는 마칠 수 있었다.

그는 학교 졸업 후에는 IT업계에 일하며 같은 과였던 박종철기념사업회 창립에 참여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로 활동하며 여러 추모단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던 2005년 경, 그는 안치웅씨의 어머니를 통해 선배 실종 사건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었던 치웅이 형의 실종은 1988년 실종 이후부터 2005년까지 지속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안치웅씨의 실종에 대한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2009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조사에 대한 진전을 못하고 있자 다른 의문사 사건들과 함께 농성에 참여했다.

2011년 안치웅씨에 대한 초혼장이 서울대에서 치러졌다. 초혼장 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묘소도 마련했다.

의문사 진상규명 공동 투쟁 ‘밀정 김순호 파면하라’,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남택범씨. [사진제공-추모연대]
의문사 진상규명 공동 투쟁 ‘밀정 김순호 파면하라’, 정부 서울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남택범씨. [사진제공-추모연대]

그는 지금 안치웅 추모모임 대표로 활동하며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1년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안치웅 실종 사건을 진정하고 진상규명 활동을 하며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당시 치웅이 형을 사찰했던 서울 강동경찰서 경찰의 진술도 있는데, 이것에 대해 직접 불러다 진술도 받고 조사를 했으면 좋겠어요. 국가가 사찰도 하고 했잖아요. 그러면 국가가 나서서 찾아주던지 당시 상황에 대한 진실을 알려줘야지 언제까지 가족들이 요구만 해야 해요.”

유엔 강제실종 방지협약에 한국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입했기 때문에 안치웅 실종 사건에 대해 국가가 더 나서서 밝혀주기를 그는 바라고 있다.

아르헨티나 등 남미지역의 ‘실종’은 진실을 밝히고 가해자를 처벌하는데 25년이 걸렸다.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의 실종은 아직 진실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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