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옛 제주성(濟州城)의 동문 내측을 흐르는 산지천(山地川). 이 하천은 제주시의 번화가인 동문시장 입구 맞은편에 흐르는 하천이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산지천을 복개(覆蓋)하면서 환경이 오염되는 문제가 생기자 1995년도에 복원을 시작하여 2002년 맑은 물이 흐르는 현재의 산지천이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제주의 구도심을 살린다는 명제 아래 문화공간이 들어서고 문화성이 확장되고 있다. 내가 산지천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선창(船廠, 조선소)이 있었던 장소를 찾는 것과 조천석(朝天石)이다.

1. 산지천 선창

탐라왕국시대의 선창터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제주가 섬이므로 배가 없이는 어로도 해상무역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탐라왕국시대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곧 선창터를 찾는 것과 직결된다.

옛 제주성은 동쪽으로는 산지천, 서쪽으로는 한천(漢川)이 있다. 이 한천과 산지천 일대에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와 고인돌 석곽묘 제사유적 등등 고대의 생활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선사시대부터, 즉 탐라왕국 이전부터 집단 취락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지천은 땅속으로 삼성혈과 연결되는 흐름이 있는 것 같다.

201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산지천의 바다 초입(지금의 산포광장)에 중국의 난파선을 복제해 놓았었다. 무슨 기념물이나 된다고, 몇 년간 그 자리에 버젓이 서 있더니 언젠가 철거되었다. 정신머리 없는 몇 사람의 탁상공론이 불러온 사대적 허상이다.

지금 제주에 필요한 것은 선창터를 찾아내고 그것을 알리는 일이다. 제주에는 수많은 포구가 있었고, 여러 곳에 선창이 있었다. 산지천 초입에다가 중국 난파선을 복원한 것은 그곳에서 난파선을 수리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즉 그 주변에 선창(목선 조선소)이 복수로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선창 가운데 탐라국시대의 선창터를 찾자.

제주에는 제주 포구를 수십 년간 연구한 탁월한 학자가 있다. 바로 제주생활사 전문학자 고광민 교수이다. 나는 문화제주의 형성과 발전을 위하여 제주도정이 고광민 교수에게 한 중책을 맡기기를 제안한다. 정년퇴직한 그가 건강히 일할 수 있을 때 일하게 하는 것은 제주도의 이익에 부합한다. 그는 지금 제주에 필요한 전문가이다.

2. 산지천 조천석

『조천석 바위, 경천암』, 제주 산지천에 있는 이 바위 암각문에 관한 민족사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천석 바위, 경천암』, 제주 산지천에 있는 이 바위 암각문에 관한 민족사학계의 연구가 필요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산지천 조천석(朝天石) 비석은 복구한 것이다.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원래의 비석과 비교하여 보면, 웃을 정도로 원형에서 많이 변형되어 복원되었다. 최근 어느 학자가 주장한 바와 같이 조천석은 그 비석이 아니라, 복원한 비석 밑의 자연석이다. 이 자연석의 이름은 경천암(擎天岩)이라고도 한다.

지난 10월 13일 오후에 나는 조천석 바위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여기에 암각문(巖刻文)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후 31일 자로 나의 페이스북에 3장의 사진을 게재하며 “이거 문자 아닙니꽈?”라며 반응을 살폈다. 오랜 지인 김호석 화백이 “문자로 보입니다. 탁본 한번 해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라는 첫 번째 댓글을 올렸다. 이에 나는 “한자는 아니고, 탐라국 시대 것 같습니다”라는 나의 의견을 적었다.

필자의 페이스북에도 관련 사진을 올렸고, 댓글로 조언도 받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의 페이스북에도 관련 사진을 올렸고, 댓글로 조언도 받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 조천석을 검색하여 보면, 이 암각문의 존재는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다만 한국문화원연합회의 지역문화유산 설명문에는 중국 진시황 시대의 희대의 사기꾼 서불(徐市, 徐福)이 조천(朝天)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새겨 놓은 것으로 헛소리를 하고 있다. 이른바 서불이 상륙했다는 조천과 여기 산지천 조천석은 도보로 17km 거리이다. 즉 40리인 것이다. 즉, 조천에 있는 조천석이 다리라도 달려 산지천으로 왔다는 말인가? 조천석과 조천은 지리적으로 관련이 없는 장소이다.

나는 [통일뉴스]에 올해 7월 26일자로 연재한 ‘국혼의 재발견’(25) 「탐라국을 실증하는 고문헌」과 제주의 인터넷 뉴스 [제주투데이] 2017년 9월 18일 자로 기고한 “서귀포의 ‘서복기념관’을 ‘한중고대문화교류기념관’으로 발전적으로 개편하여야”라는 담론에서 서복은 제주에 들린 바 없음을 논하였다. 서복을 제주와 관련짓는 일부 제주인들의 사고방식에 의문이 간다.

조천석 바위의 암각문, 즉 경천암의 암각문은 한자가 아니라, 고조선시대의 이른바 신지문자로서 판독 불능의 선각문자이다. 물론 이 조천석 바위의 암각문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심하게 훼손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한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는 제주도의 최고 기록물이며, 이 문자가 신지문자라면 탐라국이 고조선 유민이 세운 국가임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나는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산지천 조천석 원래의 비는 산지천 원 자리 옆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본다. 현장 인근에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여야 하며, 경천암 바위와 함께 제주도의 유형문화재로 마땅히 지정하여야 한다. 아울러 더 이상 산지천에서 인위적으로 자연석을 거두어 내지 말 것을 촉구한다. 산지천이 너무 인위적으로 변해있다.

3. 산지천과 삼성혈

글의 앞에서 나는 “산지천은 땅속으로 삼성혈과 연결되는 흐름이 있는 것 같다”라고 언급하였다. 내가 그런 예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혈은 고대 제주인들의 성지(聖地)이다. 그 삼성혈에 내리는 비는 3개의 삼성혈 지하로 스며들어 산지천과 그 인근의 샘물로 솟아 나온다. 이 자연환경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데 삼성혈의 북쪽 주변에 ‘제주 칼(Kal) 호텔’이 들어서 있다. 그 ‘제주 칼 호텔’ 건설 때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를 지하로 때려 부었다고 한다. 예측량 보다 엄청난 양이 들어갔고, 이후로 산지천 아랫마을의 일부 샘물은 말랐다고 한다.

최근 대한항공에서는 ‘제주 칼 호텔’을 매각한 것 같다. ‘제주 칼 호텔’은 삼성혈과 제주목 관아 인근에 있는 칠성단의 지하 연결을 끊어낸 형국이다. 삼성혈에서 북쪽으로 펼쳐지는 바다 조망과 하늘의 조망을 가로막는 거대한 공룡과 같은 건축물이다.

여기에 더 큰 개발을 하려는 것 같다. 상당히 제주도민들의 정신적 정서를 해치는 행위로서, 이는 중지되어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제주 칼 호텔’ 자리의 재개발을 불허하고, 이를 도가 매입하여 건물의 연한이 차도록 문화용도로 사용하다가 철거하는 것이다.

삼성혈의 민속학적 정신사적 역사적 중요성은 내가 언급하지 않아도 독자분들은 잘 알고 있다. 다만 삼성혈은 삼성혈 하나로 독립된 것이 아니다. 제주에 옛성을 쌓기 이전부터 삼성혈은 그 자리에 있었고, 곧 이것은 삼성혈의 위치를 중점적으로 하여 제주의 옛성과 관아, 칠성단 등등의 구시가(舊市街)를 잡았다는 말이 된다.

탐라국시대로부터 삼성혈은 제주의 정신적 중심부였다는 사실은 시대가 지나도 변함이 없다. 따라서 제주가 문화제주가 되려면 제주문화를 지켜야 하며, 고대로부터 제주문화의 시원은 삼성혈에 있다. 따라서 ‘제주 칼 호텔’ 지역의 재개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호텔을 허용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문화사 상에서의 패착이었고, 이제 그 패착을 걷어 낼 마지막 기회가 온 것이 아니겠는가.

복개한 산지천을 걷어내고 되살렸다. 이에 착안하여 복개한 청개천을 걷어내고 되살렸다.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내고 경복궁을 복원하였다. 제주 옛성의 완전 복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삼성혈 인근의 정비는 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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