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활동적 삶’을 위한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생계를 위한 생물학적 활동으로서의 노동, 인간의 실존과 관계된 비생계 활동인 작업, 그리고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인 행위로 설명될 수 있다.

아렌트는 특별히 행위와 관련하여 ‘살다’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다’로 ‘죽다’는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로 표현되는 로마인의 언어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행위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활동적 삶을 위한 노동, 작업, 행위를 습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생활한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다수 사람이 영위하고 있는 이 단순한 활동적 삶을 살지 못한 경우도 있다. 바로 장애가 있는 경우이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최근 20여 년간 끊임없이 국가와 사회에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노동, 작업, 행위의 문제를 직접 제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단순한 경구가 사전적인 의미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에 대한 어떠한 평등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노동에 접근할 수조차 없는 조건, 작업과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애인들에게 평등은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의 문제였다.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노동할 권리 등의 기본 조건을 충족한 후에야 작업, 행위 등의 활동적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들이 ‘0’에서 시작한다면 장애인은 ‘-5’에서 시작한다는 말처럼 장애인에게 평등은 활동적 삶의 조건이 아닌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러한 장애인 당사자들의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그중에는 1995년 아암도에서 의문사한 이덕인씨도 있다.

아암도 앞 바다에서 의문사 당한 이덕인씨

이덕인씨는 1967년 12월 14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아버지 이기주씨는 1983년 가족을 데리고 인천으로 이사했고, 이덕인씨의 인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1995년 6월부터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당시 노점은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와 ‘전국노점상연합’이 함께 장애인 자립 생활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아래 장자추)를 만들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취업 등 노동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성인 장애인들은 당시 생계를 위한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장자추는 이를 위해 만들어졌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2인 1조를 기본으로 당시 청계천 도깨비시장 등 여러 곳에서 노점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덕인씨는 이 단체의 인천지역 총무를 맡으며, 인천노점상연합회 아암도 지부 총무로도 활동했다. 당시 인천 굴업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서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투쟁에 동참했다. 이외에도 서울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등 많은 집회 시위에도 참여했다.

그러던 중 1995년 11월 24일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의 노점상을 철거하기 위해 수억 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비리로 악명 높은 용역업체 ‘무창’을 고용해 강제 철거를 자행했다. 이덕인은 아암도 노점상 철거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무자비한 노점단속에 항의하며 1995년 11월 24일 아암도에서 망루 농성을 시작했다.

망루 농성장 주변은 외부 지원 세력 차단을 빌미로 경찰의 원천봉쇄와 용역업체 철거반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초겨울 강추위에 소방차를 동원해 망루에 물을 뿌리고, 식품과 의약품 차단했다. 이로 인해 농성하던 노점상들은 추위와 배고픔, 건강 악화 등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망루에서 내려올 경우 법적 처벌을 감내해야 했다. 바다 위에 떠 있던 망루 농성장은 외부에서 생존을 위한 물품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덕인씨는 외부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강제 철거가 시작된 다음 날인 11월 25일 망루에서 내려오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사흘 후인 11월 28일 손목에 밧줄이 엉킨 상태로 아암도 앞바다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2002년 8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씨의 죽음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라고 결론 내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구체적 사실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경찰, 행정관청 등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라는 사실은 인정한 결론이었다. 아암도는 송도 국제도시로 알려진 송도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덕인씨 의문사는 송도 개발과 연계되어 있다. 개발 이권을 둘러싼 세력들에 의해 이덕인씨는 사회적 타살을 당한 것이다.

1995년 11월 28일 이덕인 열사가 인천 아암도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뒤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활동가들이 김영삼 정권 규탄 집회에 참석한 모습.(뒤쪽 모자와 목도리를 한 이가 김종환씨) [사진제공-김종환]
1995년 11월 28일 이덕인 열사가 인천 아암도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뒤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활동가들이 김영삼 정권 규탄 집회에 참석한 모습.(뒤쪽 모자와 목도리를 한 이가 김종환씨) [사진제공-김종환]

이러한 사회적 타살 결론에도 이덕인씨 의문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은 26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덕인씨의 의문사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2021년 3월 노동, 시민, 인권, 장애, 빈곤 단체 등이 이덕인열사 의문사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이덕인공대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이덕인공대위를 구성하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하는 과정에 많은 역할을 한 활동가 중에 김종환씨가 있다.

김종환 씨의 삶

김종환 씨는 1995년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소속으로 이덕인씨와 함께 활동했다. 이덕인씨가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할 당시 김종환씨는 서울의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을 했다. 둘은 큰 집회가 있을 때 만나곤 했다.

김종환씨는 1967년 태어나 옥수동에서 살았다. 돌이 되던 시기 그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부모님은 다리 수술을 위해 그를 삼육재활원에 보냈다. 다리 수술 후 그는 학교로 돌아왔으나 친구들은 이미 3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후배들과 학교에 다녀야 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쾌활하던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실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민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김종환씨는 1988년께 ‘명휘원’이라는 장애인시설에서 목공예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이듬해 직원이 20여명 되는 경기도 성남시의 조각 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 다니면서 그는 ‘열린터’라는 성남의 야학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89년 그는 자신이 다니던 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직원이 많지 않았던 공장에 노조를 만들자 사장은 바로 위장폐업했다. 그리고 조합원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노조 탈퇴를 종용한 사장에 의해 노동조합은 와해했다.

노조 결성 실패라는 아픔을 겪었던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썼던 경험을 살려 장애인복지신문사에 기자로 취직했다. 장애인 언론사의 기자로 생활하며 장애인들의 삶을 취재하던 그는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아래 장청)이라는 청년단체가 추진한 전국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주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던 그는 결국 운동단체 상근활동을 위해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장청과 통합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아래 전장협)에서 편집홍보국장으로 일했다. 이때가 1995년이다. 그는 전장협 활동을 하며 장자추 활동을 겸하다가 청계천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그는 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천냥백화점’이라는 노점을 했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당시 장자추는 청계천에 이어 아암도에서도 사업을 펼쳤다. 아암도의 포장마차 노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때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 노점을 강제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에 저항하던 이덕인씨를 비롯한 노점상들이 망루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덕인씨가 의문사한 채 발견된 것이다.

이덕인씨의 사인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싸움이 지속되었다. 장애인 단체와 노점상 단체들이 시신이 안치된 길병원을 매일 지켰다. 개발 사업을 밀어붙였던 인천시, 연수구는 경찰과 함께 시신이 안치된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벽을 뚫고 들어와 장례식장을 짓밟으며 시신을 탈취하고 강제 부검했다.

김종환씨는 오래전 서울대학교에서 2박 3일 동안 열린 범민족대회에서 이덕인씨와 나란히 앉아 나눴던 이야기들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인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해 활동했던 장자추 활동은 장애인 고용촉진을 요구하는 농성 등 장애인 노동권 문제로 이어졌다. 지금도 장애인 단체들은 ‘중증장애인 맞춤형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며 장애인 노동권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장애인 노동의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에 ‘노동’에 대한 사회 인식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200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투쟁에 정태수 열사와 함께 참여한 김종환씨. 정태수 열사는 이듬해 장애인청년학교 모꼬지 도중 심근경색 등의 증세로 숨졌다. 김종환씨는 15년째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실무 일을 담당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종환]
200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투쟁에 정태수 열사와 함께 참여한 김종환씨. 정태수 열사는 이듬해 장애인청년학교 모꼬지 도중 심근경색 등의 증세로 숨졌다. 김종환씨는 15년째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실무 일을 담당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종환]

전동휠체어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는 장애인 이동권 요구가 사회적 의제로 부각되고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김종환씨는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기관지 ‘공간이동’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이동권연대에 이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이 만들어지자 그는 전장연 기관지 ‘저항하라’의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10년께 그는 비마이너라는 장애인 언론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고 6년여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김종환씨는 1989년 성남지역 열린터 야학에 다니며 노래패 ‘아우성’에서 노래를 했다. 아우성은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노래들을 카세트테이프 음반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상 ‘꽃다지’로 발매된 음반은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노래는 그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2010년께 노동가요 작곡과 김호철씨 등과 ‘장애인문예창작단’에서 활동하며 직접 곡을 만들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고 부른 ‘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저항하라’, ‘봄날’ 등은 투쟁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다. 2018년에는 6곡의 자작곡이 포함된 1집 음반 ‘새길을 간다’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장애인 부모들의 투쟁을 북돋는 노래 ‘장애인부모연대가’를 만들었다. 아울러 김종환 씨는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와 ‘장애해방열사_단’에서 활동하며 먼저 가신 장애해방열사와 희생자를 추모하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처음 노동운동으로 시작해 장애인운동, 문예운동, 언론분야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해온 것에 대한 생각을 그에게 물었다. “장애인운동도 결국에 인간의 생존 문제이고 노동의 문제 아니겠어요, 서로 통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는 장애인 문화예술운동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추모라는 ‘노동’ 활동을 하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작업’활동을 하며 이를 사람들과 소통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활동적 삶에서의 세 가지 조건 노동, 작업, 행위에 대해 장애인들도 평등하게 살아가는 그날까지 그는 지금의 활동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불평등의 문제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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