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둘째 할머니는 차에만 탔다 하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했다. 해방둥이라고 하는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도 이제 50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첫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는 당시로는 아주 드문 바리스타였다. 물론 그때만 해도 바리스타 자격이란 것은 없었고, 그저 고참에게 배워서 스스로 익히는 것이었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남편은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어 커피 내리는 것을 배웠다. 호텔 커피숍에서 일했는데 수입이 괜찮았다. 다만 남들 놀 때 나가서 일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였다. 남편이 일하던 곳은 21층이나 되는 큰 호텔이었다. 할머니도 한번 놀러 가 봤었다. 주변에는 다 5, 6층밖에 안 되는 건물들이었다. 그날따라 나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등을 떠밀어서 내보내고 애 젖 주고 잠시 졸고 있다가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어디선가 불이 났단다. 난리가 아니었다.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까지 텔레비전에서 그대로 나왔다. 남편이 다니던 호텔이었다.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아이를 둘러업고 옷도 아무거나 주워 입고 집을 나왔다. 택시를 타고 갔는데 정작 통제를 하고 사람이 많아서 호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남편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새까맣게 탄 남편 시신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뭐가 뭔지도 몰랐다. 유족들 몇이 우리가 힘을 합해서 정부나 호텔 측에 보상을 요구하자고 했다. 그 말이 나오고 바로 처음 주장을 한 사람이 어디론가 끌려갔다. 남산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유족들이 할머니를 빠지라고 했다. 할머니 남편이 호텔 커피숍에서 일했는데 거기서부터 불이 났으니 자기들 보상 협상에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울며 불며 함께 하자고 했지만 다른 유족들은 냉정했다. 결국 거기서도 빠지고 몇 달 생활비밖에 안 될 돈을 받고 끝나버렸다.

한참 동안 자신을 원망했다. 나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등 떠밀어 내보냈으니 내가 얼마나 돈만 아닌 년이냐. 그냥 미친 척하고 하루 결근해 버려도 남편 실력이면 어디서든 살았으리라. 이런 회한 때문에 정말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이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다. 보상금 받은 걸로 동네 시장통에 자그마한 식당 하나를 냈다. 살기가 너무 힘들었다. 단골손님 중에 너무나 자상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 사실상 동거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

그 사람 마누라가 거센 여자 몇과 함께 와서 식당을 박살을 내버렸다. 그리고는 지금은 없는 간통죄로 고소했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조사를 받는데 그 남자가 눈길도 주지 않더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형사가 하는 말이 상대 여자가 합의금을 주면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가게를 빼앗겨 버렸다. 알고 보니 그 부부가 상습범이었다. 그 뒤로 남자라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살았다. 아들이 성장해서 공사판을 전전하며 돈을 버는데 그 벌이도 이제 시원치 않아져서 걱정이란다. 첫날 본 남자가 바로 아들인 모양이다. 그 시간까지 집에 있으니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서울로 가서 첫 번째 집인 셋째 할머니에 대해서는 분식집 사장인 그 딸이 이야기를 해줬다. 이북에서 내려와서 육사에 들어가 군인이 된 아버지는 5.16쿠데타가 날 때까지 잘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반혁명혐의로 연행되자 이북 출신인 아버지도 함께 잡혀갔다. 당시 쿠데타 군부는 아버지에게 장도영이 반혁명 모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지식했던 아버지는 끝까지 거부했는데 장도영이 풀려난 뒤에도 징역을 살고 3년이나 지난 뒤에야 석방되었다고 한다.

불명예퇴역으로 연금도 못 받고 군 선배가 마련해준 돈으로 어머니가 시작한 자그마한 모자 공장에서 관리자 역할을 하던 아버지는 그로부터 20년이 다 된 1979년에 육사 동기인 정승화가 참모총장이 되자 동기들을 열심히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12. 12 군사반란으로 연행된 뒤에 동기들을 만나 우리가 나서서 정승화를 구해주어야 한다고 했다가 보안사에 끌려가서 후배 군인들에게 모진 고문이라는 치욕을 당했다. 풀려난 아버지는 5공화국 내내 술만 마시며 전두환 노태우 욕만 하다가 6월 항쟁 직전인 1987년 5월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공장을 하면서 사업을 키우던 어머니가 IMF사태 때 부도가 나면서 파산을 했고, 오빠와 살다가 오빠 부부가 미국으로 가면서 딸인 자신이 모신 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오빠와 올케가 미국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단다. 내 나라 놔두고 왜 남의 나라 가서 사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는 근력이 괜찮아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면서 혼자도 살 만했다고 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힘이 달리면서 결국 누군가 곁에 있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딸은 남편과 이혼한 뒤 작은 분식집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갔다. 어머니와 함께 살자고 했다. 이제 자기도 환갑이 넘어서 힘에 부친다고 했다. 어쨌든 모진 풍파 속에 살아온 어머니가 말년을 편하게 보내셨으면 하는 것이 자기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주간보호시설을 알게 돼서 어머니를 가시게 했는데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요즘은 미리 나와서 기다릴 정도로 좋아하신단다.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같은 애국 군인은 고초만 당하고, 썩어빠질 반란군 놈들은 강남에 땅부자가 되어 잘 산다고 하니 이게 뭐냐고 말할 때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넷째 할머니는 첫째 할머니처럼 연립주택에 살았다. 골목길에 있어서 차를 바짝 대야 다른 차가 지나갈 수가 있고, 게다가 약간 비탈진 곳이라서 갈 때마다 애를 먹었다. 이 할머니는 키가 상당히 커 보였다. 170이 넘어 보이는데 그 시절에는 꺽다리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다. 알고 보니 농구 선수였단다. 고교 시절까지는 농구를 했는데 박신자와 라이벌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말은 본인이 한 것은 아니고, 원장이 해준 이야기이다. 그런데 고교 시절을 끝으로 농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농구를 그만둔 것은 공식적으로는 부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코치로부터 폭행을 당해서 허리에 이상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성폭행일지도 모른다고 원장이 귀띔을 하였다. 이 말은 본인이 하지는 않았다. 이 할머니는 그저 자기가 농구 선수였다는 것, 그래도 농구할 때가 좋았다는 것 정도의 이야기만 했다. 가족들이 원장에게 해준 말에 따르면 허리를 다친 뒤 학교측에 항의를 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 말고도 여럿 그랬는데 나머지는 학교의 압력에 주장을 철회하고 이 할머니만 계속 주장하다가 농구를 그만두어야 했다는 것이다.

스포츠 폭력 문제는 지금도 고질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특히 남성 코치가 여성 선수에게 가하는 성폭력, 성추행 따위가 문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참고 넘기지 않는 선수들이 많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거기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제기를 하고 나섰고, 그러자 더욱 폭행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까지 그만하게 된 것이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한다고 해서 평생이 달라질 수 있는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닐까?

할머니는 운동을 그만둔 뒤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시는 운동선수라면 공부를 시키지 않고 훈련만 하게 하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만 공부한 게 거의 없었다. 그리고 키가 너무 큰 것도 당시에는 흠이었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띄었다. 남자들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에서 천덕꾸러기 비슷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하는 구멍가게에서 가게를 보다가 오빠네 애들 봐주면서 젊은 날을 보내 버렸다. 지금은 시집 안 간 조카와 둘이서 그 연립에서 살고 있다.

다섯째 할머니도 본인 말과 원장을 비롯한 요양보호사의 말을 함께 듣고 여러 가지로 판단을 해야 했다. 이 할머니는 지금은 금천구가 된 구로공단 터에 살았다. 당시는 시흥시였다고 한다. 원래 고향은 강원도였는데 이곳으로 시집온 것이었다. 시집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가에 땅을 강제로 빼앗겼다. 구로공단이라고 불리는 수출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하면서 강제 징발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 군부는 못할 일이 없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처음에는 법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대법원에서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런 법원 판결도 별 힘이 없었다. 중앙정보부가 동원되어서 서류가 위조되었다고 오히려 땅 주인인 농민들을 잡아넣었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배상 요구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남편이 잡혀갔고,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시청, 구청 등을 뛰어다니며 시위를 하였다. 그때마다 경찰에 끌려가고 정말 개 패듯이 하는 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할머니는 자기가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이 나면 항상 앞장섰다. 동네 사람들을 설득해서 싸움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다 포기들 하고 떠났다. 남편도 포기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시집에서는 이제 그만하라고 할머니를 나무랐다. 할머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싸우다가 결국 구속되었고, 집행유예로 나와 보니 남편이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찍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에는 할머니에게는 아무 소유권도 없는 땅이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쫓겨난 뒤 성남으로 가서 움막집 같은 곳에서 살았는데 광주대단지 사건이 일어났다. 거기에서도 앞장서다 구속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다시 서울로 온 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데 가는 곳마다 재개발이 되었다. 도화동, 목동, 봉천동, 난곡까지 재개발되는 데 가서 살게 되고, 그때마다 철거가 되어서 나서서 싸웠다. 정보과나 기동대 경찰은 이제 낯익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헤어져 살았던 아들이 찾아와서 이곳에 방을 하나 마련해 주어서 살고 있는데 여기도 언제 철거될지 몰라서 불안하단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서 앞장서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자기 성질에 그냥 참고 앉아 있지는 않을 텐데 걱정이란다. 아들이 가끔 찾아와서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제발 엄마 조용히 지내라고 당부한단다.

얼마 전에 대법원에서 구로공단 터 땅을 빼앗긴 농민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렸다. 할머니도 그걸 알고 있었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자기 집은 이미 쥐꼬리만 한 보상을 받아서 받을 수도 없단다. 어이가 없었다. 결국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괜히 억울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원망스러웠다. 끝까지 싸우면 50년이 지나도 뭔가 성과가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왜 그런 압력에 굴복하고 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권이 나쁜 놈들이지.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 잘못일까?

첫째 할머니가 당한 집단학살, 둘째 할머니의 대연각 화재, 셋째 할머니의 군사쿠데타, 넷째 할머니의 스포츠 폭력, 다섯째 할머니의 구로공단 터 강제 탈취 등은 신돌석씨가 이전에 대체로 알고 있던 내용들이었다.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할머니들을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됐다니 정말 스스로 놀라웠다. 하지만 어딘들 이런 분들이 없으랴. 그리고 우리가 글자나 영상으로만 된 과거사를 박제화해서 봐서는 안 되리라 여겨졌다.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서 고통을 당하신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가슴이 저며왔다.

주간보호시설에서 송영하는 일 때문에 만난 할머니들이지만 우리 현대사의 여러 굴곡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가난이 게으르거나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할 줄 아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신돌석씨의 시각으로는 너무나 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등쳐 먹는 사회가 바로 이 사회였다. 이제 이 할머니들이 평안하게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도 아마 못 받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의 고생이 다른 이들에게 되풀이되지는 말아야 하겠지.

평년 기온보다 높은 가을 날씨가 지속되다가 이제 정말 겨울이 오는구나 실감할 정도로 추위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고 눈이 내리면, 그리고 얼음이 얼면 어르신들의 거동이 걱정이 된다. 신돌석씨는 어머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르신을 제대로 모셔본 적이 없는데, 이 분들을 잘 모시는 것이야말로 내 직업에 충실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사의 고통을 감내해 오신 이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마지막 코스에서 할머니를 내려드리고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핸들을 힘껏 쥐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