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가을이 끝나갈 무렵 신돌석씨는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되었다. 새로운 직업이라고 하지만 알바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단기 혹은 임시로 고용되어 일하는 비정규직을 아르바이트로 불렀다. 원래는 학업 중인 사람들이 학비 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할 때 주로 사용했는데, 그러다가 노동시장이 복잡해지면서 학생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것도 아르바이트라고 했고, 그것을 줄여서 알바라고 불렀다. 알바는 법적으로 규정된 용어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대체로 인지하고 있는 개념이다.

신돌석씨는 환갑이 되던 해인 2018년까지 금속제조업공장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다. 그해 퇴직하고 아는 사람의 소개로 공장 자재창고 관리인을 했다. 그런데 그 창고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사장은 거기로 가서 일하라고 권했지만 신돌석씨는 가지 않았다. 전라북도 어딘가로 옮긴다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 유배생활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물론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외롭다거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나마 자유롭게 노동운동을 비롯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그것이 중단되게 할 수는 없었다.

전라북도에도 운동이 있으니까 거기 가서 일해도 되지 않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생각도 했다. 그리고 신돌석씨가 아는 전북 동지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옮겨서 일하기에는 이제 나이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기회에 낮에도 뛰어다니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 동안 사장의 눈치 봐가면서 시간 비우는 것도 힘이 들었다. 신돌석씨가 그냥 안 가겠다고 결정하자 아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워낙 신돌석씨가 단호하게 말해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내도 신돌석씨가 운동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경제적인 문제가 남았다. 이제 신돌석씨 부부는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었다. 애들은 둘 다 자기들이 알아서 살아갔다. 신돌석씨와 아내 둘 다 워낙 아껴 쓰는 것이 체질이 되어서 생활비도 많이 안 들었다. 하지만 집이 없으니 전세를 올려주어야 할 때는 난감했다. 그래서 미리 모아두어야 했다. 신돌석씨보다 아내는 그런 점에서 훨씬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아내는 미싱 부업으로 돈을 벌었는데 이제 일거리가 많이 안 들어왔다. 신돌석씨가 운동한답시고 마냥 돈을 안 벌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함께 젊은 날에 같은 공장에서 해고되었던 춘자가 연락을 했다. 춘자도 아내처럼 미싱사 출신이고, 결혼을 한 뒤 애를 키우면서 봉제공장을 다녔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살면서 하청업체 등에서 일하거나 일감을 얻어서 집에서 일하곤 하였다. 춘자는 신돌석씨네와는 달리 지역을 옮기지 않고, 같은 지역에서 죽 일하였다. 그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노조활동도 하고, 지역노조도 만들고, 지역 복지센터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남편 역시 지역에서 비슷한 일을 하면서 나이가 들어갔다.

최근에 춘자는 복지센터에서 일하다 요양보호사 자격을 얻었다. 방문 요양보호사를 하다 요양원에서 일을 한다고 하였다. 이제는 들어갈 봉제공장도 거의 없고, 일감도 좀처럼 생기지 않아서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내가 춘자의 말을 듣고 자기도 요양보호사로 들어갈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손목을 다치면서 일단 그 생각은 접기로 했다. 춘자가 자기네 요양원에서 들었는데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의 주간보호센터에서 파트타임으로 운전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형부가 그 일 해보면 어떠냐고 하였다. 춘자는 아내와 친구인데도 신돌석씨를 형부라고 불렀다.

얼마 전에 신돌석씨도 인터넷을 통해 구인광고를 보다가 주간보호센터의 파트타임으로 일할 운전자를 찾는 것을 보기는 하였다. 그런데 시간 당 만 원을 준다고 해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춘자 말로는 지금 가는 곳은 12,000원을 준단다. 1주일에 세 번 아침에 두 시간, 저녁에 두 시간 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수입이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지만, 신돌석씨는 그 정도면 시간도 많이 쓸 수 있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춘자에게 연락을 했다.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신돌석씨의 새로운 직업, 아니 알바는 시작된 것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는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처가로도 장인은 일찍 돌아가시고 장모님만 계시는데 경기도 양평에서 처남이 모시고 살기 때문에 어르신 돌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돌봄노동자들이 투쟁을 할 때도 지지를 하고 지원 투쟁도 했지만, 사실 내용도 잘 모르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르신 돌봄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은 집이 드물 정도였다. 어느 사이에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자기만 무관심했던 것 같아서 씁쓸해졌다.

요양원에 계시는 분이 신돌석씨 아는 사람 중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돌석씨의 몇 안 되는 가까운 친척 중 하나였던 고모가 벌써 몇 년째 요양원에 계신다. 하지만 아무래도 덜 신경을 쓰게 되었다. 춘자에게 이야기 들으니 요양원이 있고 요양병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방문요양이 있다. 재가라고도 한단다. 요양원에서도 주간보호가 있고, 주야간 보호가 있다. 공생이란 것도 있다. 아홉 명이 있는 아주 작은 곳이다. 시설은 자기 건물이어야 하는데, 공생은 아니어도 된다. 주간보호와 주야간보호를 동시에 하는 곳도 많다. 신돌석씨가 일하게 된 요양원이 그런 곳이었다.

춘자는 신돌석씨에게 설명을 죽 하고는 이제 형부는 들어갈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르신 돌봄에 대해 공부 좀 하라고 농담 반 진담 반식으로 웃으며 말했다. 신돌석씨가 나는 절대로 그런 데 안 들어간다. 차라리 누워 있는 한이 있더라도 집에서 죽을 거라고 했더니 마누라 고생 그 정도 시켰으면 됐지 늙어서까지 그러냐고 막 뭐라 그런다. 그 말에는 좀 기가 죽었다. 하긴 그렇다. 누워 있으면 누가 수발을 들려나. 둘이 나이 차이가 좀 나고 남자가 일찍 늙으니 아내가 수발 들어야 할 게 뻔한 일이다. 춘자의 말에 신돌석씨는 괜히 울적해졌다.

신돌석씨가 일하게 된 요양원에는 주간보호시설이 있고, 어르신 12명이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 중 3명은 자식들이 모셔다 드리고 모셔 오곤 하였다. 나머지 9명이 문제인데 차 두 대로 모시고 오고, 모시고 가야 하는데, 그것을 송영이라고 했다. 그 중 한 대는 원장과 시설장인 원장 아들이 번갈아 한다고 했다. 나머지 한 대를 요양보호사와 간호조무사가 하는데 이 사람들이 연차일 때 등에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운전할 줄 아는 요양보호사를 뽑았는데 번번이 조금 하다 그만두곤 해서 아예 알바를 구하기로 했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처음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다. 스타렉스 같은 걸로 한꺼번에 송영을 하면 되지 왜 번거롭게 두 대로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 차 살 돈이 없나? 그런데 알고 보니 스타렉스 같은 차로는 차를 돌리기 어려운 곳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이 분들 중 상당수는 걷기가 불편해서 집 앞에 바로 대야만 하는데 큰 차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운전하던 요양보호사들이 조금만 해보고 그만두곤 했단다. 되도록 운전 경력이 많은 남자 중에서 찾았는데 그러다 보니 신돌석씨에게 차례가 오게 된 것이었다.

원장을 만나 인사를 한 뒤 그 아들이라고 하는 시설장과 코스를 두 번 돌았다. 일단 두 명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와서 내려주고, 나머지 세 명을 다시 모시러 가야 했다. 그런데 이 요양원은 서울과 경계선이 되는 곳 가까이 있었는데 어르신 세 명은 서울에 살았다. 그래서 거리는 얼마 안 되더라도 두 개 광역자치단체를 넘나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저녁에는 그 중 한 명은 늦게 귀가해서 원장이 모셔다 드린단다. 나머지 네 사람을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이때는 한꺼번에 태워서 가야 했다.

시설장과 코스를 돌아봤는데 되게 헷갈렸다. 요양원에서 세 블록을 내려온 뒤 좌회전하고 또 좌회전해서 낡은 아파트 담벼락 길 건너에 작은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거기가 첫 집이었다. 아파트는 너무 낡아서 담벼락에 무너질지 모르니 기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길이라고 해야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이었다. 연립주택이 아파트 담벼락과 직각으로 있었는데, 그 앞에 차 두 대가 세워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차 한 대가 이미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차를 세우고 내려주어야 했다. 그리고 함께 연립주택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가는 길에 골목마다 부동산이 있었다. 왜 이렇게 부동산이 많은가 궁금했는데 시설장 설명이 이 동네는 하도 이사를 들락날락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신돌석씨 동네도 부동산이 적지 않게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만큼 이사를 많이 가는 모양이었다. 강남이나 신도시에도 부동산이 많은데, 거기는 주로 아파트 거래를 한다. 십억 대를 호가 하는 거래이다. 여기는 여기 나름대로 전월세가 자꾸 들고 나고 하기 때문에 많다는 것이었다. 부동산이 이전의 복덕방처럼 어르신들이 장기 바둑 두는 곳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이 불꽃 튀듯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또 흥미롭게 느껴진 것은 그 좁은 동네에 수영장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지금 폐업이라고 하던데 요즘은 어렵게 사는 집도 애들 수영을 가르친다고 해서 한때는 상당히 잘 됐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유행 때문에 갑자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는 격세지감이다. 신돌석씨 어릴 때는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부잣집 애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집 애들은 개울이나 계곡, 혹은 강에 가서 그냥 수영을 해서 익혔다. 물론 그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못하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반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잘 걷지를 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축해주려고 하면 질색을 한다고 하였다. 혼자서 꼿꼿하게 걸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차를 세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다시 돌려서 빼는 것도 일이었다. 후진을 해서 돌려야 하는데 좁은 골목이라 뒤에서 차가 오지 않을 때를 기다려서 해야 했다. 시설장 말로는 지금은 낮이라 차가 많지 않은데 저녁 시간에는 차들이 많이 다녀서 차를 넣고 빼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여기 와 보니 신돌석씨 동네가 운전하기 불편하다는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으로는 죽 나가서 좌회전하고 다시 우회전해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이 아파트도 낡았는데 아까 봤던 아파트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그런데 차들이 많이 세워 있어서 들어갔다 나올 때 차 돌리기가 역시 어려웠다. 이 집 할머니는 몸은 성한데 아침마다 늑장을 부린단다. 어느 때는 아침에 고기 구워 먹으면서 함께 먹고 가자고 한단다. 거기에 맞춰 주다가는 한나절 걸릴 거라고 한다. 그럴 때는 무조건 요양보호사한테 전화를 하란다. 신기하게도 요양보호사 말은 잘 듣는다고 한다.

그리고는 서울로 넘어갔다. 대로변으로 나가 20분 정도 달리니 요양원 있는 곳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동네가 나왔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민이라 하지만 경기도민과 거기서 거기일 것 같았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작은 분식점이었다. 거기 사장의 어머니인데 식당에 나와서 기다리면 모시고 가면 된단다. 이 할머니는 돌아올 때는 늦게 와야 해서 원장이나 시설장이 모시고 온단다. 이어서 간 곳은 유턴해서 나간 뒤 대로를 가로질러 가서 골목으로 들어간 뒤 있는 어느 연립주택이었다. 거기 역시 입구에 차를 바싹 대어야 했다. 그 집도 2층인데 따라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단독주택이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죽 늘어 있었다. 이 지역은 재개발을 한다고 하고는 계속 미뤄지는 곳이란다. 3층짜리 단독주택의 지하에 할머니가 사신단다. 신돌석씨가 사는 집과 구조가 유사했다. 이웃 동네에 아들이 사는데, 모시고 살려고 해도 할머니가 한사코 싫다고 한단다. 이 할머니는 성질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라서 한번 화가 나면 동네가 다 떠나간단다. 좀처럼 싸우지 않지만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기면 말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런 점을 미리 알아 두란다.

두 번을 돌았지만 사실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시설장이 운전해서 돌고, 또 한 번은 신돌석씨가 몰고 시설장이 옆에서 말해 주는 대로 갔다. 차에 네비가 없었다. 오래된 중형차였다. 핸폰으로 네비를 키고 해야 할 모양이었다. 차를 가지고 와서 하면 안 되냐고 하니까 할머니들 보험 문제가 있어서 요양원 차로 해야 된단다. 그렇게 실습을 하고, 다음 주부터 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인데 요양보호사나 간호조무사가 연차를 쓰는 날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돌석씨가 하는 날도 일정하지 않았다. 2주 전에 통보받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로 까다로웠다.

이렇게 해서 신돌석씨의 새로운 직업, 아니 알바는 시작되었다. 조금 부담되는 면도 있었지만 사실 운전을 몇 십 년 해왔고, 그것도 골목길에서 주로 해온 신돌석씨로서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수입이 적다는 것, 일정이 불규칙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4일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었다. 게다가 잘 하면 낮시간도 쓸 수 있었다. 어쨌든 수입 한 푼 없던 지난 몇 달에서 벗어나서 용돈이라도 벌 수 있고, 그러면서도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신돌석씨는 가벼운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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