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이래로 ‘연대’는 역사적 특수성을 가지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초기 산업화 시기 급속한 자본주의화는 공리주의, 개인주의, 경쟁, 공격성을 최고의 미덕처럼 여기게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자본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는 생산 노동의 분업 구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산업구조의 부속품으로 전락시켰다. 노동자 연대는 이러한 구조를 노동자 공동체적 관점으로 사고를 바꾸게 하는 전환점이었다.

노동자들 스스로 서로를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며, 잘못된 구조를 바꾸려는 실천까지 아우르는 노동자연대의 기본은 나와 다른 노동자에 대한 관심과 헌신이었다.

노동자 연대는 결속이었고 분열, 고립을 끊어내기 위한 노동자들 사이의 무상적 관계였다. 그래서 돌봄, 자선, 상호성에 기반한 의무적 자유주의적 연대와 노동자 연대는 역사적으로 차이가 있다.

혹자는 특정한 경제적, 사회적 구조에 의존하는 연대의 한계를 지적한다. 하지만 함께 비를 맞는 노동자 연대는 관계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구조에 의존하지 않는다.

노동자 연대는 노동의 소외와 억압을 불가피한 운명적인 결과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이다. 그래서 노동자 연대는 국경을 넘어 확장되어져 왔다. 1990년 이후 30년 간 나카무라 다케시씨는 한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의 이런 연대를 위해 활동해 오고 있다.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의 일본원정 투쟁 서사

일본 섬유회사인 ‘스와니’는 1978년 한국에 일본자본 100%를 들여 ‘아세아 스와니’를 설립하였다. 아세아스와니는 외국자본에 편의를 제공한 수출자유지역 특례를 이용하여 이리(현재의 익산)에 공장을 설립했다. 아세아스와니 공장은 대부분 16세에서 19세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야간 학교를 다닐 목적으로 근무를 하였다. 장시간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 산업 재해 발생, 비민주적인 부당노동행위들이 있었지만, 야간학교를 마치고자 마음먹은 노동자들은 이러한 근로조건에도 참고 일을 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흐름이 지나가던 1989년 4월 22일 아세아스와니에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처음 노조의 조합원은 28명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조 설립을 마친 아세아스와니노동조합은 회사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협상을 위해 조합원 총회를 통해 파업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9일간 파업을 진행하여 단체협약의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노조설립 5개월이 지난 1989년 9월 22일 회사는 노조와 아무런 협의 없이 팩스 한 장으로 폐업을 통보했다. 이날부터 노동자들은 200일간 철야농성을 하며 공장을 지켰다. 전노협의 지원, 지역 평민당 국회의원의 방문 등 정치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움직임이 없었다.

이러한 회사의 태도에 아세아스와니노조는 일본인 사장과 교섭을 위해 일본 원정투쟁단을 구성하였다. 양희숙 노조위원장을 포함한 5명의 일본 원정투쟁단은 비자 등 여러 실무적 어려움을 해결한 후 1989년 12월 22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한국에 남은 노동자들은 지역 연대 투쟁에 결합하며 지속적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일본에 도착한 원정투쟁단은 전항만, 고려노련 등 ‘오사카부민공동투쟁회의’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에서 집회와 스와니 본사 항의 농성을 지속했다. 일본 현지 공동 행동과 연대집회 과정에서 원정 투쟁단은 1990년 2월 2일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원정 투쟁단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고려노련 김희원 위원장이 이 사고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아세아 스와니 원정투쟁단은 이러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투쟁을 이어갔고, 마침내 1990년 3월 13일 노동자들은 회사와 합의서를 작성했다. 노조는 회사의 사죄문을 받아냈고 해고 통보를 철회시켰으며, 퇴직금을 지급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 3월까지 노동자들에게 임금이 지급되었고 생존대책 기금이 지급되었다. 또한 원정투쟁 비용과 야간 학생들의 학비도 회사가 전액 부담하였다. 폐업 자체를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대로 이루어졌다. 원정투쟁단은 3월 28일 일본에서 환송집회를 마친 후 귀국했다.

나카무라 다케시씨의 삶

아세아 스와니 원정투쟁단은 ‘오사카부민공동투쟁회의’의 지원 속에 투쟁을 했다. 이 공동투쟁회의 소속 단체 중 전항만 노조 간부였던 나카무라씨도 함께 연대하고 있었다.

나카무라씨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노동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노조에서 법률관련 업무를 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아세아스와니노동자들과의 인연은 전일본항만노조 활동 중에 맺어졌다. 처음 그는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1990년 초 시코쿠에서 개최되는 원정투쟁단 연대 집회에 참가하는 정도였다. 아세아 스와니 원정 투쟁단에 법률적 지원이 필요해졌고, 전항만노조 간사이지본 건설지부의 법률대책 사무국장이었던 그는 노조위원장의 제안으로 원정 투쟁단의 법률 지원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세아스와니 30년 기념 행사 사진. [사진제공-나카무라 다케시]
아세아스와니 30년 기념 행사 사진. [사진제공-나카무라 다케시]

그는 원정투쟁단과 지낸 3개월 동안 골치 아픈 많은 법률적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사고방식이 다른 일본과 한국의 노동자들은 투쟁 방법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한국의 원정 투쟁단 노동자들은 공장 밖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면 항상 공장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일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희숙 위원장이 주거침입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양희숙 위원장을 일본 경찰로부터 빼내기 위해 경찰서에 항의하였다. 아세아스와니 원정 투쟁단은 오사카 지역에서도 하고 외곽지역 시고구지방에서 주로 투쟁을 했다. 시고구지방 경찰들은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했다. 그는 일본 경찰들로부터 “한국 노동자들 대단하다. 무섭다.” 이런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가 맡은 법률 지원 범위는 한국 노동자들의 일본 체류 연장문제, 경찰 및 검찰 대응에 대한 지원 등이었다.

그는 원정투쟁단과 함께 하면서 일본 노동자들과 다른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 방식에 매력을 느꼈다. 동시에 마음속에 생각했던 일을 하는 투쟁에 같은 노동자로서의 시원함도 갖게 되었다.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을 만나기 전, 그는 한국 노동운동에 대해 이론적으로 전태일 열사, 청계피복노조 투쟁 정도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 대해서도 그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 노동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단과의 인연으로 동시에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력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의 힘이 교류와 연대를 통해 일본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한‧일 노동자 연대가 지속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의 원정투쟁이 끝난 뒤인 1990년 7월 28일 나카무라씨는 오사카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3일간 전북지역 노동조합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1991년 12월 전노협을 방문했고, 1992년 6월에는 독립기념관과 마산, 창원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방문했다. 특히 1992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처음 참가한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방문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2019년 이전까지 매년 한국의 노동자대회 집회에 참가했다.

그는 매년 11월 노동자대회에 참가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 노동자 방문단과 함께 전북지역 노동자를 비롯한 투쟁하는 노동자들 농성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대회에 참석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청계피복노조를 방문하였으며, 이소선어머니를 만났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유가족들을 방문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집회에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한국과 일본 노동자들의 연대는 2005년 일본에 ‘일한민주노동자연대’가 만들어지는 성과를 가져왔고, 이 노동자연대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현재 민주노총 전북본부 명예지도위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지금 일본과 한국 노동자들의 연대는 직접 방문 대신 영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제공-나카무라 다케시]
문정현 신부와 함께. [사진제공-나카무라 다케시]

그는 전태일 정신에 대해 “전태일 정신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힘들어도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그 정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2020년 전태일 50주기에 1978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소선어머니 영화 DVD를 어렵게 찾아 한국의 전태일재단에 기증하였다. 한국에서는 이소선어머니 영화가 1970년대에 일본에서 만들어져 일본 전역의 극장에서 상영되어진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던 시기였다.

이소선어머니 영화 찾기는 그가 활동하고 있는 일한민주노동자연대의 사무국 성원 중 한 사람이 한통련이 1978년과 1979년 상영운동을 했다는 기사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도쿄에 있는 단체에 연락하여 DVD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비매품으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복사를 하여 이를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요즘 나카무라씨는 한국 노동운동 관련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정신을 일본에 더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30년 전 느꼈던 것을 지금의 일본 노동자들에게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한 일이다.

그는 한국의 사회운동은 전태일을 통해 연대의 폭이 넓어진 측면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태일 3법 개정’을 위해 한국의 수백 개 노동조합과 노동단체가 모이고, 민중대회 등을 통해 노동자를 비롯한 농민, 빈민 등 다양한 계급계층이 만나고 함께 집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운동의 힘이라고 느낀다.

한국의 사회운동가들에겐 전국의 노동단체가 한데 모여 집회를 하고, 더 나아가 노동자 농민, 빈민 등 계급적 연대가 가능한 민중대회가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나카무라씨가 생각하는 노동자연대는 전태일 정신이었고, 그것은 헌신과 더 어려움에 처한 계급 연대의 정신이었다.

-------------------------------------------------

<참고문헌>

「나카무라 다케시 인터뷰 및 이메일 자료」, 2020년 9월 1일부터 2022년 10월 25일까지.

오사카민주노동자연대‧한일민주노동자연대전북본부, 2015, 『한일노동자 연대운동 15년사』.

앤서니 엘리엇‧브라이언 터너 지음/김정환 옮김, 2015, 『사회론: 구조, 연대, 창조』, 이학사.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