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이순신의 함경도 근무

남에서나 북에서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지금의 함경북도 라선특별시에 한동안 배치되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국토(國土)를 지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30대 초반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

1980년대 중반에 충무공 이순신 연구가로 활동하였던 애서가 이종학(1927~2002, 독도박물관 설립자) 선생으로부터 배운 사실이다. 이종학 선생은 강단에는 서지 않았으나 역사정신에 밝았으므로 우리 애서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침 금년 11월 23일(수)이 이종학 선생의 20주기 기일이다. 이에 이번 17일(목) 연재는 그의 기일에 앞서 그를 기리며 이 글을 쓴다.

『충무공 이순신』, 김순규(북) 작, 유화, 180×400cm. 10여 년 전에 북경에서 매입한 필자의 소장품(所藏品)이다. 조명으로 인해 화면 밝기가 고르지 못하다. 작품이 커서 액장을 할 경우 이송이 어려워 둘둘 말아서 보관중이다. 이러한 역사 주제화 대작과 독립운동가 관련자료를 전시하고 보관할 기념관을 세웠으면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충무공 이순신』, 김순규(북) 작, 유화, 180×400cm. 10여 년 전에 북경에서 매입한 필자의 소장품(所藏品)이다. 조명으로 인해 화면 밝기가 고르지 못하다. 작품이 커서 액장을 할 경우 이송이 어려워 둘둘 말아서 보관중이다. 이러한 역사 주제화 대작과 독립운동가 관련자료를 전시하고 보관할 기념관을 세웠으면 한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순신 장군은 1587년(43세시) 1월 함경도 경흥 두만강변의 조산보 만호(造山堡 萬戶)가 된다. 8월에는 조산보 근처의 녹둔도(鹿屯島)의 둔전관(屯田官)을 겸임한다. 1587년에 여진족이 쳐들어와 그 해와 그 이듬해에 (두 차례) 전투가 벌어지고 이순신 장군은 크게 활약하여 전공을 세운다. 당시 충무공의 여진(女眞) 토벌은 역사상의 여진 토벌 중에서 그 전과가 가장 빛나는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지금의 라선특별시 두만강역(豆滿江驛)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2. 『이충무공승전대비』와 『비각』

『이충무공승전대비 비각』. 1914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찍은 유리원판 사진 가운데 『이충무공승전대비 비각』 사진1(소장품 번호 ; 건판 2993호)과 『이충무공승전대비 정면』 사진2(소장품 번호 : 건판 2991호), 『이충무공승전대비 뒷면』 사진3(소장품 번호 : 건판 2992호) 등 3점이 있다. 이 비각이 있던 옛 주소는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조산동이니, 곧 조산보(造山堡) 인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충무공승전대비 비각』. 1914년 조선총독부박물관에서 찍은 유리원판 사진 가운데 『이충무공승전대비 비각』 사진1(소장품 번호 ; 건판 2993호)과 『이충무공승전대비 정면』 사진2(소장품 번호 : 건판 2991호), 『이충무공승전대비 뒷면』 사진3(소장품 번호 : 건판 2992호) 등 3점이 있다. 이 비각이 있던 옛 주소는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조산동이니, 곧 조산보(造山堡) 인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충무공승전대비 정면』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충무공승전대비 정면』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충무공승전대비 뒷면』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충무공승전대비 뒷면』 [사진 제공 - 이양재]

1914년도에 사진이 찍힌 이 ‘승전대비각’과 ‘승전대비’가 아직 남아있는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보니 KBS 김석 기자가 2021년 3월 24일자로 취재한 기사가 나온다. 아울러 그 기사에는 북의 조선중앙TV에서 2015년에 보도한 1분17초 분량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동영상에서 보이는 비(碑)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한 1914년도 유리사진원판의 비 모습을 비교하여 보면, 현재의 ‘승전대비각’과 ‘승전대비’는 1762년에 세운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언젠가 복원이나 복제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914년도 유리원판사진에 보이는 비신(碑身)은 손상되어 있지만, 조선중앙TV에서 2015년에 방송한 동영상에 보이는 비신은 손상된 흔적이 없고, 비 뒷면의 비문도 필획이 명확하지 않으며, 석질(石質)도 달라 보인다. ‘승전대비’의 실물을 보아야 복원품인지 복제품인지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가능하다.

3. 『이충무공승전대비』 원문

현재 중앙조선TV 동영상을 보면 현재 ‘승전대비’의 비문 뒷면은 자획이 명확하지 못하다. 이에 아래에 비문 뒷면의 원문을 제시한다. (■ 부분은 비문이 손상되어 판독이 안되는 부분이다.)

<비문 원문>

“嗚呼此卽故忠武李公舜臣破蕃胡之所也萬曆丁亥公以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蕃」
胡見屯田秋熟率其衆來圍木柵縱兵大掠公登鎭北三里許高峯以禦之分伏奇兵於賊」
路日暮邀其歸放砲鳴■擊殺傷甚多賊大■■不敢近後人名其峯曰勝戰臺 宣廟壬」
辰倭▨大擧蕩我境 乘輿播越 宗社陷沒公首起討賊一破 於唐浦再破於■山三破」
於鳴梁公雖卒以身殉而賊勢挫■不復振我東之得有今日實公之力也公忠誠貫日月」
功烈銘■鼎■爾一片之臺不足爲公之重輕而公之出奇殲賊巳自小官始且朝廷之知」
公用公 終樹不世之勳者實權輿於此有不可泯沒公之五代孫觀祥今爲關北節度■治」
石千里走書■余記其陰嗚呼殆古所謂水不忍廢地不忍荒者歟」
嘉義大夫咸鏡道觀察使趙明鼎述」
壬午 月 日立」”
(유형구 판독)

<비문 번역문>

“오호라, 이곳은 고 충무(忠武)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변방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다. 만력(萬曆) 정해년(선조 20, 1587년)에 공께서 조산 만호 겸 녹보둔전관(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왔다. 변방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공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돌아가는 것을 맞이하여 포를 쏘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크게 두려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후인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

선조 임진년(선조 25, 1592년) 왜구가 대거 우리 강토로 쳐들어오자 임금이 수레를 타고 파월(播越 : 임금이 도성을 피해 피난함)하매 종묘사직이 무너질 형편이었다. 공이 맨 먼저 기병(起兵)하여 적을 토벌함에 당포(唐浦)에서 처음 적을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에서 두 번째로 격파하고 명량(鳴梁)에서 세 번째로 격파하였다. 공이 마침내 전선에서 목숨을 잃긴 하였으나 적의 기세가 꺾여 다시 떨치지 못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오늘까지 유지된 것은 실로 공의 덕택이다. 공의 충성(忠誠)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공렬(功烈)은 이정(彛鼎 : 조정에서 제사에 쓰던 예기(禮器))에 새길 만하니, 작은 한 조각의 대(臺)는 공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한 것은 소관(小官)부터 시작해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공이 마침내 불세출의 공훈을 수립한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는지라 사라져 없어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5대손 관상(觀祥)이 이제 관북절도사(關北節度使)가 되어 천리 길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음기(陰記)를 써 줄 것을 요구하니, 오호라, 옛적에 이른바 물길은 차마 없어지게 놓아둘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가의대부(嘉義大夫)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명정(趙明鼎)이 기술하다.

임오년(영조 38, 1762년) 월 일에 세우다.” (이기영 번역)

『이충무공승전대비』의 2015년도 현재 모습.
『이충무공승전대비』의 2015년도 현재 모습. [사진 제공 - 이양재]


4. 북과 남에 제안한다.

『동여도(東輿圖)』의 「경흥」, 김정호(金正浩, 1886~?), 19C 중반, 필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10340-v.1-23). 녹둔도가 완전한 섬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동여도(東輿圖)』의 「경흥」, 김정호(金正浩, 1886~?), 19C 중반, 필사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청구기호: 奎10340-v.1-23). 녹둔도가 완전한 섬으로 그려져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일로국경부근지도(日露國境附近之圖)』, 1911년 9월 일제가 실측해 그린 지도. 122.5㎝ × 79.5㎝,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품. 녹둔도에 모래톱이 쌓여 러시아 측 육지에 붙어 있다. 녹둔도는 현재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일로국경부근지도(日露國境附近之圖)』, 1911년 9월 일제가 실측해 그린 지도. 122.5㎝ × 79.5㎝,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품. 녹둔도에 모래톱이 쌓여 러시아 측 육지에 붙어 있다. 녹둔도는 현재 러시아령으로 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과거의 함경북도 경흥은 북과 러시아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금의 라선특별시이다. 라선특별시는 북동쪽으로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와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하산스키 군 하산에 접하는 북의 경제개혁을 목표로 한 항구도시이다.

한반도 정세가 평화로 돌아온 후에, 이 라선특별시와 전남의 완도군, 그리고 경남의 충무시가 충무공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젊은 세대가 나서서 추진했으면 싶어 남과 북의 다음 세대에 말한다. 남과 북의 역사는 하나이고, 민족도 하나이다. 한반도의 최북단 라선특별시와 한반도의 최남단 완도군과 충무시의 젊은 새대 만이라도 이충무공의 민족수호정신을 본받아 민족공영을 위한 길로 솔선수범하여 함께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나는 북에 제안한다. 북은 조속히 한반도 최북단 기차역 두만강역 앞에 ‘충무공이순신공원’을 조성하고, 『이충무공승전대비각』 인근에 ‘이순신기념관’을 만들기를 권고한다.

5. 나의 장탄식

슬프다. 1592년 4월 13일(음력, 양력 5월 2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꼭 430년후 2022년 11월 6일 남측의 해군이 일본의 욱일기에 경례를 하였다. 정말로 참담하도록 부끄러운 남측 해군 지휘부이고 군부이다. 한국에는 보수파가 없다. 친미 친일의 수구만이 있다. 오늘은 이런 현상을 본다면 반드시 호통쳤을 민족주의자 이종학 선생이 더욱 더 그립다. 지금 남한의 정치 정세가 정말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워 순국선열의 영전 앞에 멍 때리게 한다. 정말 못난 정치 정세의 몰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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