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진우

벌써 30년이 좀 못 되었다. 1993년이나 4년쯤 일 것이다. 나는 서울에 자주 나오던 김 모 씨가 골동 전문 갤러리를 운영하던 미국 동부 뉴저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일주 김진우(金振宇)의 증손자라고 하기에 미국에서 그의 활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전 일이고, 그때 이후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어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를 않는다.

당시 나는 그로부터 김진우에 대하여 약간의 단편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김진우가 민족주의자인데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분류되어 국가로부터 훈장 추서를 못 받고 있다”라고 한다. 김진우는 이후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 대통령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2. 김진우의 간고한 삶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0)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인데 1883년에 강원도에서 태어났다. 강릉김씨이므로 강릉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려서부터 춘천 출신의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을 따라다닌 것으로 인하여 춘천이나 제천에서 살았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김진우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에 강원도 대표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김진우는 강원도 출신으로 보아야 하는데, 『조선연감』 1948년 판 460면에는 김진우가 강원도 영월 출생이라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강원도에서 출생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일주(一洲)라는 호 이외에 금강산인(金剛山人)이라는 호를 썼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 김진우는 12살 때부터 유인석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1842년에 춘천에서 태어난 유인석은 1893년에 춘천에서 제천으로 이사하는데, 유인석이 제천으로 이사하기 전후의 언제인가부터 김진우는 유인석을 따라다닌 것 같다. 유인석은 1896년(을미)에 의병장이 되는데, 제천전투에서 패하자 서북으로 올라가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후 유인석은 1897년 3월에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서간도로 망명한다. 그러한 유인석의 망명에 김진우도 동행하였다.

『묵죽』, 김진우, 146×230cm.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소장품.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전시작품. [사진 제공 - 이양재]
『묵죽』, 김진우, 146×230cm.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 소장품.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전시작품. [사진 제공 - 이양재]

김진우는 1915년 유인석이 사망하자 조선으로 돌아와 1917년경 서울 종로4가에 작은 서화상을 차렸다. 그 때 마침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개설하였던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에 가입 등록하여 교유(交遊)를 넓혀 나갔고, 제1회 졸업생(1918년 6월)이 되었다.” 그러나 후일 김진우 본인은 '나는 그림 스승이 없다, 감옥에서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회동서관에서는 이미 1916년도에 2책으로 된 해강 김규진의 『해강난죽보』를 출간한 바 있다. 즉 일주 김진우가 묵죽을 공부하던 1918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해강 김규진의 『해강난죽보』는 화보(畫譜)로서의 큰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진우는 1919년 3.1운동 이후 그해 7월에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로 갔다. 당시의 임시의정원기사록(臨時議政院紀事錄) 제6회 기록에 의하면 제6회 회의는 1919년 8월 18일 개원하여 9월 17일에 폐원하는데, 폐원 당일 지방별 현재 의원 명단에 강원도 대표로 이필규(李駜珪)와 김진우 2인이 들어가 있다.

만2년 동안 임시정부에서 일하다가 김진우는 1921년 6월 9일 조선으로 들어오다가 열차 안에서 신의주 경찰에 체포되었고, 7월 19일에 신의주 지청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해주감옥 서흥분감에서 3년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 안에서도 묵죽화법을 연구하고 자신의 묵죽화법을 완성하였다.

3. 조선 내 독립운동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한국전쟁 중에 사망하다

복역을 마치고 석방된 1923년 5월 이후에 그는 본격적으로 작가활동을 하는데, 1924년 11월 24일 자로 경성에서 작성된 대종교진흥회(大倧敎振興會) 취지서에 부회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일주 김진우는 출소 직후 대종교에 관계한 것 같다.

일주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등에 실릴 신년 및 기념 휘호를 도맡을 정도로 당대 서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 일주 김진우의 제자 옥봉 스님은 “김진우 화백의 밀명을 받아 1932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안창호 선생의 옥바라지를 한 것은 물론 만해 한용운 스님과 벽초 홍명희, 몽양 여운형의 연락책을 맡기도 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옥봉 스님은 불문에 출가하기 이전의 “20대 젊은 여성으로 독립자금과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만, 1933년 만주에 독립자금을 전하러 가다 남양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일주 김진우는 출소한 이후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증언이다.

앞서 언급한 『조선연감』 1948년 판 460면에 의하면 김진우의 학력은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1회 출신”으로 경력은 “1944년 건국동맹(建國同盟) 가맹(加盟)”하고 “1947년 현재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 감찰위원(監察委員)”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일제 패망이 다가오던 1940년대에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과 함께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1947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근로인민당 감찰위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은 여운형에 의하여 1947년 5월 24일에 창당되었으나, 여운형이 암살되자 1947년 7월 19일 해체된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했지만, 그는 남으로 피난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을 떠났던 '도강파'(渡江派) 미술가들은 인민군에 협력한 미술인들을 색출한다는 미명 아래 미술가 부역자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잔류 미술가들에게 반공의 잣대를 들이밀었다. 결국 독립운동가 일주 김진우는 도강파 미술가들의 무고로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1950년 12월 24일 68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쓸쓸하고 억울하게 숨을 거둔다.

일주 김진우는 극렬 좌파라기보다는 사회주의 성향의 민족주의자로서 남로당의 박헌영(朴憲永, 1900~1955) 세력과는 대립했던 해방공간의 인물이었다.

4. 김진우 사군자에 대한 평가

일주 김진우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살펴보자. 잡지 『동광』 제21호(1931년 5월 1일 발행)에 게재된 「조선화가총평(朝鮮畵家總評)」에 김진우 화백을 소개한 부분이 있다. 즉 “김진우씨(金振宇氏), 일주(一洲) 김진우씨(金振宇氏)는 사군자(四君子)에 잇어 일가(一家)의 경(境)을 지키고 잇다. 사군자(四君子)란 서화(書畫) 중간에 잇어 동양미술(東洋美術)의 정신을 어느 것보다도 완고(頑固)하게 지키고 잇는 것이니, 사군자(四君子)의 대가(大家)가 없다는 것은 동양화(東洋畵)에 대가(大家)가 없다는 말이 된다. 정진(精進)하시는 분 중에 하나이요, 수효적은 사군자(四君子) 전문의 한 분이시니 씨(氏)에게 우리는 대성(大成)을 바라지 안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이다.

김진우에 대한 남과 북에서의 회화사적 평가를 살펴보면, 남에서는 1991년에 와서야 그의 예술세계에 관한 연구가 나왔다. 『간송문화』 40호 39~73쪽에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소장은 “그의 묵죽은 대나무가 아니라 예리하고 강인한 금속제의 도검과 창날, 도끼 등 살상용 병장기를 집합시켜 놓은 듯 삼엄하다”고 평했다.

『참대(묵죽)』, 김진우, 1934년작, 149×234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 『조선미술박물관』 도록 104번째 수록 작품, 조선화보사(동경) 발행, 1980년 10월 10일. [사진 제공 - 이양재]
『참대(묵죽)』, 김진우, 1934년작, 149×234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 『조선미술박물관』 도록 104번째 수록 작품, 조선화보사(동경) 발행, 1980년 10월 10일. [사진 제공 - 이양재]

반면에 북에서는 김진우가 민족주의 성향의 진보적 독립운동가이며 예술가라는 사실에서, 그 작품을 남측보다 일찍이 주목하였다. 1980년에 발행한 『조선미술박물관』 도록 104번째 작품이 김진우의 작품 『참대(묵죽도)』 (149×234cm, 1934년작)이고, 북의 『조선미술사』에서도 그를 의미 있게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2006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북녁의 문화유산』전에 86번 작품으로 전시된 바 있다. 전시 도록에는 북의 국보(국가보존작품)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북에서는 김진우의 약력의 많은 부분이 잘못 알려지고 있다. 북의 미술평론가 리재현은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재판본 223면에 김진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그 소개에는 ‘김진우가 ①1868년생으로, ②제천탄광에서 일하였다는 것, ③192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는 것, ④일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⑤서울로 압송된 후 15년의 징역형을 받고 ⑥서대문형무소에서 영어 생활을 하였다’라는 것은 아주 틀린 기술(記述)이다.

‘김진우는 ①1883년생이며, ②제천에 있었던 것은 유인석을 따라간 것이며, ③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④신의주 경찰에 체포된 후, ⑤신의주 법원에서 3년 형의 징역형을 받고, ⑥해주감옥 서흥분감에서 옥고를 치렀다’라는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2006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북녁의 문화유산』전에 86번 작품 설명에는 김진우가 1882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한 것으로 오기(誤記)되어 있다.

5. 김진우 묵죽화의 계보와 예술 정신

김진우의 제자로는 지난 2010년 입적한 동학사 주지를 역임한 옥봉(玉峯, 1913~2010) 스님이 있다. 옥봉 스님은 1913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계룡산 동학사에서 인정(仁貞)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옥봉 스님 역시 독립운동을 하던 선승으로 1931년부터 김진우 선생에게 묵난과 묵죽을 배우며, 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한다.

옥봉 스님의 제자로는 제주 출신의 화가 강법선(康法善, 현 제주국제협의회 이사장) 화백이 있다. (강법선 화백에 따르면 “옥봉 스님에게서 한때 묵죽을 배운 제자로는 고 유승희, 고 도관 스님, 한영희, 구계순 씨가 있다”라고 하지만, 큰 활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묵죽』 6푹 병풍, 김진우, 이 작품은 김진우 묵죽의 화맥을 이은 제주 출신의 묵죽화가 ‘강법선’ 화백이 2021년 ‘몽양여운형기념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수작(秀作)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묵죽』 6푹 병풍, 김진우, 이 작품은 김진우 묵죽의 화맥을 이은 제주 출신의 묵죽화가 ‘강법선’ 화백이 2021년 ‘몽양여운형기념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수작(秀作)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앞서 언급하였듯이 김진우는 해강 김규진(金圭鎭)에게서 사군자를, 특히 묵죽과 묵란을 배웠다. 해강 김규진은 소호 김응원(金應元, 1855~1921)과 함께 석파 이하응(李昰應, 1820~1898)에게 드나들었다. 석파 이하응은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로부터 묵난(墨蘭)의 대가(大家)라는 인정을 받았다. 물론 추사 김정희는 글씨뿐만 아니라 「부작란」과 같은 묵란을 그렸다. 필자의 기억에는 추사의 묵죽 소품도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조선말기 추사 김정희의 예술정신은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과 운미 민영익으로 이어진 뒤 해강 김규진을 거쳐 금강산인 김진우의 묵죽까지 내려온 것으로 본다.

우리 말에 사사(師事)라는 말이 있고, 사숙(私淑)이라는 말이 있다. 사사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하며, 사숙이란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도(道)나 학문을 본받아서 배우는 것”을 일컫는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학파의 분류에서는 사사뿐만 아니라 사숙한 사람도 제자로 인정한다. 만약 김진우 사군자의 계통을 세우자면, 추사 김정희로부터 석파 이하응과 해강 김규진을 거치는 것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주 김진우의 묵죽에 나타난 정신은,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염원, 그리고 예술과 행동으로서의 일제의 강점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한 치열한 항일 애국정신은 일주가 그림을 사사한 김규진을 비롯한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에게서는‥‥‥, 그리고 그 이전 선대(先代)의 다른 예술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주 김진우는 '나는 그림 스승이 없다, 감옥에서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주 묵죽의 특징은 대나무 잎을 칼(劍) 같이 그리는 것에 있다.

6. 영월이나 강릉에 ‘금강산인 김진우기념관’을

일주 김진우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독립운동에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였으니 다작(多作)을 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작품이 많다. 리재현이 편저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재판본에 의하면,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8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라고 한다. 북의 한 박물관에만 무려 80여 점이 몰려 있으므로, 북의 미술사학계에서 일찍이 그를 주목한 것 같다. 일주 김진우의 작품은 남쪽의 미술시장에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그러나 크게 호가(呼價)하지는 않는다. 모으려면 많은 경비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술계에서 친일했던 미술가에 비하여 그 수는 적지만, 독립운동을 했던 화가분들이 몇 분 있다. 조선화가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문인화가 일주 김진우(金振宇, 1883~1950), 유화가 최덕휴(崔德休, 1922~1998) 등이다. 이분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한 분은 일주 김진우이지만, 기념관이 있는 분은 광복군 출신의 미술가 최덕휴가 유일하다. 「최덕휴기념관」은 경기도 용인시가 2003년에 건립하였다.

일주 김진우도 『금강산인 김진우기념관』을 세울 만한 예술가이다. 그의 고향 강원도 영월이든, 그가 강릉김씨이므로 강릉이던‥‥‥, 아니면 그가 한때 살았던 서울의 어느 지역에도 좋다. 별개의 기념관을 세울 수 없다면, 그가 사망하였던 서대문형무소의 방을 확인하여 ‘금강산인 김진우 추모실’로 만들어도 좋겠다.

남에서 금강산인 김진우를 기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북에서 나서서 금강산 초입에 『조선미술박물관』의 분관으로 『금강산인 김진우기념관』을 세우는 것이 빠를 수도 있겠다. 미술가로서의 독립운동가가 몇 분 안 되기에 일주 김진우의 존재는 더 돋보인다. 민족주의 성향의 미술애호가로서 어찌 그를 추모할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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