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클라우드 오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는 ‘위기 관리자’라 이야기한 바 있다. 오페의 지적에는 국가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기대가 내재되어 있다.

니코스 플란차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의 역할은 변화하게 된다면서, 국가는 경제 구조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되어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다고 지적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 플란차스의 시각은 노동자들이 투표장으로 향하게 되는 것에 대한 해석일 수 있다. 한 사람이 한 표를 갖는 정치영역의 가시적 평등성은 불평등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부각시키지 않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쥐고 있는 계층은 피지배계급, 즉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조직화를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조직화를 무력화하기 위해 국가는 폭력을 동원해 왔다.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파업권은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본 벤야민의 지적처럼 노동자들의 연대는 힘의 역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국가가 노동조합 등 노동자 연대 조직에 국가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가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계급적 성격에 기초하고 있다고 판단해 볼 근거가 된다. 국가가 중재자가 아닌 자본이라는 일방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활동인 국가의 폭력행사는 국가 기구를 통해 합법적으로 국가 권력과 연계되어 행사된다. 자본가와 노동자 연대조직 즉 노동조합 사이의 역학 관계를 ‘계급지배 양식’이라 할 때, 자본이 일방적으로 ‘계급지배’ 하는 것을 ‘전제적 계급지배’, 자본과 노조가 공존하는 경우는 ‘규제적 계급지배’. 노동자의 자발적 동의에 기초한 ‘헤게모니적 계급지배’ 등 세 가지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때 전제적 계급지배에서 국가는 단결권 제약과 인신구속의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경찰, 검찰, 국가정보기구 등의 국가기구를 동원한다. 규제적 관계에서 국가는 자본과 노동조합이 공존하며 최소의 타협들이 형성되도록 하고 중립적 사법부가 존재하도록 하며, 경제, 산업담당 행정부를 동원한다.

지난 독재 및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의 노동조합은 정권과 자본의 들러리였다. 이러한 어용노조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민주노조 활동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어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일정 부분 성과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경제영역의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가 자본이라는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면서 최소한의 중재자 역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연대 조직인 민주노조를 규제하고 처벌하는 일들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1991년은 직선제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는 정치적 민주화가 확장된 시기였다. 하지만 민주노조 활동은 안기부, 경찰에 의해 감시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의문사 한 채 발견되었다.

의문사 한 박창수 위원장의 서사

1981년 8월 부산 영도구의 한진중공업 전신 대한조선공사 배관공으로 입사한 박창수씨는 평소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6년 8월 어용노조 퇴진 및 위원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파업에 참여하였고, 현장 노동자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박창수씨는 1990년 7월 94%의 압도적 지지로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 한진중공업 회사측은 노조가 민주화되자 노무관리 체제를 강화하여 근로 현황을 시간별로 점검하는 등 노동강도와 노동자 감시 체계를 높여갔다.

박창수 위원장은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협) 소속의 부산노련 부의장과 전노협 중앙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0년 12월 9일 발족한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 회의(대기업연대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조직은 정부에 노동악법 개정을 요구해 왔는데 이는 노태우 정권과 자본가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것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도 불구하고 노동현장은 전제적 계급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회사와 단체교섭이 결렬되어 조선소 내에 있는 골리앗 크레인을 점거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했다. 대우조선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가자 당시 노태우 정권과 대우측은 곧바로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대기업연대회의 소속 사업장 대표자들은 긴급하게 간부들을 소집해 경기도 의정부 다락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1991년 2월 10일 대기업노조 연대회의 수련회에서는 대우조선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파업기금을 모으자는 결의가 있었다.

이 수련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대기업연대회의 소속 노조 간부 69명은 경찰에 전원 강제 연행되었다. 경찰은 위원장급 8명에 대해 강압적 조사를 한 후 ‘제3자 개입금지’ 혐의로 구속시켰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도 이 때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창수 위원장은 1991년 5월 4일 구치소 운동장에서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1991년 5월 6일 새벽 4시 30분경 구치소 교도관이 철저히 지키는 수감상태와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박창수 위원장은 안양병원 1층 어린이놀이터 시멘트 바닥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되었다.

박창수 위원장은 안기부로부터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 탈퇴를 종용받아왔고, 이에 응하지 않자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당시 유족과 한진중공업 노조 등 동료들은 정부당국의 일방적 부검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자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은 벽을 부수고 영안실에 들어와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 부검하였다. 이 절차를 마치자 수원지검은 노동운동에 염증을 느껴 박창수 위원장이 옥상에서 투신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의문사가 되었다.

박창수 의문사 사건 진상규명과 박성호씨의 삶

박성호씨는 남해수산고등학교 3학년 시기인 1982년 6개월 훈련과정을 마치고 대한조선공사 입사하였다. 입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를 다녀온 후 1986년 11월 재입사 형식으로 한진중공업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86년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던 김진숙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이들은 해고에 맞서 출근투쟁을 하며 근로조건 개선과 노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박성호씨가 재입사하자 해고자들은 빨갱이들이기 때문에 현혹되지 말라는 이야기들이 주위에 돌았다.

일하는 동안 그는 훈련소 동기들과 친하게 지냈다. 대부분 나이도 비슷했기 때문에 힘든 공장생활에 서로 위로가 되었다. 1987년 7월이 되자 한진중공업에도 노조 민주화운동이 더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1987년 7월 25일 여느 때처럼 박성호씨는 배를 타고 시험운행에 나갔다 들어왔다. 공장에 들어와 보니 현장은 파업에 들어가 있었고, 현장 노동자들이 신관 건물을 점거하고 공권력 투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찰 공권력이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파업하는 동료들과 함께 회사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새벽이 되자 백골단이 들어와 동료 노동자들을 연행해 갔다. 박성호씨는 간신히 연행을 피해 배로 피신하였다. 경찰들이 파업하던 지도부들을 연행해 가자 남아 있던 노동자들은 영도경찰서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항의 시위 참여 후 박성호씨는 이후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노동조합 직선제가 이루어졌고 위원장 선거가 진행되었다. 노동조합이 직선제가 되면서 현장에도 활기가 생겨 풍물패 등 소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창수 위원장은 부산기계공고 시절 밴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도 잘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훈련소를 비슷하게 마치고 소모임에서 만났던 박창수씨가 위원장에 당선되자 박성호씨는 교선부장으로 집행부를 맡게 되었다.

1991년 5월 박창수 위원장이 대기업연대회의 수련회를 간 후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5월 4일 부산역에서 강경대 열사 관련 집회 중에 박창수 위원장이 다쳐서 서울구치소에서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랴부랴 다음날인 5월 5일 안양병원에 도착했다. 수술을 받은 박창수 위원장은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었다. 그가 안정을 취하도록 잠시 얼굴만 보고 다음날 다시 오마 하고 박성호씨는 함께 갔던 노조 간부와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다음날 병원에 도착해 보니 경찰들이 많아 이상하다 생각하던 중에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정부 당국의 강제 부검에 대비해 전노협 등 수도권지역 노동자들이 속속 모였다. 하지만 유가족과 동료들의 반대하는 상황에서 벽을 뚫고 경찰이 들어와 강제로 시신을 탈취해 갔다. 상상을 초월한 방법이 자행된 것이다. 박창수 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한 정부당국은 일방적으로 부검을 실시한 후 자살로 발표하였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박성호씨는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은 자살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해 오고 있다. 진상규명 활동은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활동과 연계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랜 시간 해고가 되어 한진중공업 공장 밖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는 2001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2년 정도 박창수 의문사 사건 조사를 한 바 있다. 아직도 진상규명 과정에서 아쉬운 것은 그때 조사가 더 진척되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조사결과 1991년 5월 박창수 위원장이 구속 이전부터 안기부와 경찰은 전노협과 대기업연대회의를 탈퇴하도록 그를 집요하게 회유했음이 확인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기부 등은 박창수 위원장의 주위 동료들을 활용하기도 했다.

2022년 10월 18일 금속노조 주최 박창수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진실화해위원회 앞 집회에서 발언하는 박성호씨. [사진제공-추모연대]
2022년 10월 18일 금속노조 주최 박창수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 진실화해위원회 앞 집회에서 발언하는 박성호씨. [사진제공-추모연대]

박성호씨는 지금도 안양병원에 근무했던 간호사나 직원, 환자들 중에 누군가가 목격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구감생활과 다름없이 병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구치소 관계자, 부산 및 경기 경찰청 관련자들 중 누군가는 진실 알고 있고 이 같은 사실을 이야기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가가 적어도 자본과 노동의 매개자라면 국가기구인 안기부, 경찰, 검찰은 이 사건에 등장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들 국가 공안기구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리고 아직도 박창수 의문사 사건이 진상규명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국가가 자본가 편에서 전제적 계급지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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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조돈문‧노광표, 2004, 「국가의 억압적 노동통제와 노동자 희생」,

마틴 카노이, 2011, 『국가와 정치이론: 현대자본주의국가와 계급』, 한울.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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