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인물사에 관심을 갖던 시기에

1978년경부터 1980년 초에 나는 우리 역사상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당시 컴퓨터 검색도 안 되고 자료 공유도 어렵던 시절, 우리 역사상의 어느 특정 인물의 자료를 조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몇 안 되는 참고 서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국조명신록』(17C, 17책)이나 『동국문헌』(1808, 3권3책), 일본 강점기에 나온 『조선명신록』(1925, 2권2책)과 『동국역대명신록』(1932, 22권11책),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인명사서』(1937, 1책) 등등이 있었다.

총독부의 『조선인명사서』는 일본어로 되어 있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인물을 재단하였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인명사전이었다.

그러던 인물사 연구의 열악한 시기에 반가운 사전이 나왔다. 1979년 3월 10일자로 신구문화사에서 『한국인명대사전』을 출판한 것이다. 나는 그 책을 1980년 초에 당시 종로5가에 있던 어느 책 도매상에서 매입하였는데, 몇 곳을 찾아 검토한 결과 『한국인명대사전』 편찬에 『조선인명사서』를 참고하여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답습하고 있었다.

2. 수원백씨와의 만남 일화

1980년쯤으로 기억한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수원에서 올라 온 수원백씨(水原白氏) 한 분을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 성보빌딩 5층에 있던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분은 백선행(白善行)이란 이름을 말하며, “백선행이 수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는 내가 백선행에 대하여 막 알아 나가던 시기였다. 나는 곧바로 『한국인명대사전』을 펼쳐 보여 주었다. 그 사전에는 백선행이 ‘평양 출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수원백씨(水原白氏)와 수성최씨(隋城崔氏)가 있기에 방문객이 “본관을 고향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방문객 수원백씨는 책이 잘못되었다며 한사코 백선행이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그 “친척 후손들이 수원에 살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백선행은 1848년에 수원에서 태어나 1935년 5월 9일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한국인명대사전』에는 1862년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그 방문객이 주장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인명대사전』 백선행 부분에 연필로 수정해 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에게 백선행에 대하여 더욱 많은 것을 묻고 기록해 놓았어야 했다.

3. 잡지 백광의 ‘백선행의 여사 약력’에도 평양 출생으로

백선행은 원래 제대로 지어진 이름이 없던 여성이었다. 조선말기의 여성들이 대체로 그랬다. 그러나 백선행은 선행으로 이름이 나 사람들이 흔히 백선행으로 불렀고, 그것이 그녀의 이름으로 고착되었다. 얼마나 선행을 베풀었으면 사람들이 백선행이라 불렀을까?

『백광(白光)』 신년특집호, 창간호, 1937년 1월 1일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중에는 『백광』 1호부터 6호까지 전책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광(白光)』 신년특집호, 창간호, 1937년 1월 1일 발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중에는 『백광』 1호부터 6호까지 전책이 소장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선행이 사망한 후 1937년 1월 1일 자로 평양에서 『백광(白光)』이라는 잡지 창간호가 나왔다. 평양의 교육사업가 백선행(白善行 1849~1933)을 기리는 기념사업으로 발행되어 6호까지 나왔는데, 판권 면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전영택(田榮澤), 주간 안일성(安日成), 인쇄인 김진호(金鎭浩), 인쇄소 한성도서(주), 발행소 백광사이다. 크기는 A5판이었고, 182면이다. 주간 안일성은 백선행의 양손(養孫)이다. 이 창간호에 「백선행 여사 약력」이 나와 있다.

그 약력에는 “백선행 여사는 지금으로부터 88년 전(1849) 음력 11월 19일 평양 중성(中城) 산골, 한 가난한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22세였다. 그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 되던 해에 평양 남문 밖에서 싸전을 하는 31세 된 안재욱(安載旭)에게 출가하여 행복하게 살았으나 16세에 남편을 잃게 된다.

그때의 어머니와 딸, 두 미망인은 슬픔을 가누지 못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는, 집을 옮겨 작은구골(현 백광사 자리)에서 청물장사(染色業者)를 시작했다. 두 모녀는 악의악식(惡衣惡食) 근검절약, 노력과 인내로써 오로지 가산을 모으는 데 힘을 다했다. 그가 44세 때,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혼자서 재산을 늘려나갔다.

그리하여 사회를 위해 많은 재산을 내놓게 된 것이다. ‘광성(光成)보통학교’ ‘숭현(崇賢)여학교’ 지방의 ‘창의(彰義)학교’를 재단법인으로 세웠으며, ‘숭인(崇仁)상업학교’에도 2만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했다.

여사는 하고 싶은 교육사업을 이루어놓고 1933년 5월 8일에 영면하시니 향넌 85세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상여 뒤를 따른 이가 무려 수만이었다고 한다. 지금 대동강반에는 ‘백선행기념관’이 서 있고, 또 평양 유지의 뜻을 모아 동상이 세워졌다.”고 기록돼 있다.

4. 백선행에 대한 남과 북의 평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백선행이 1848년에 “경기도 수원에서 백지용(白持鏞)의 장녀로 출생하여 어려서 평양 중성(中城)에 옮겨 살았다. 7세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편모 김씨(金氏) 슬하에서 자라며 효행이 남다른 가운데 14세 때 안재욱(安裁煜)과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궂은 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청상과부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백선행은 굴지의 평양 갑부가 되었고, 1908년 첫 공익사업으로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객산리(客山里) 솔뫼다리(松山橋)를 돌다리로 새로 부설하여 ‘백선교(白善橋)’라 이름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19년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1924년 모든 재산을 사회사업에 바치기로 공식 발표한 뒤, 이어서 1925년 광성소학교(光成小學校)에 1만4000여 평과 숭현여학교(崇賢女學校)에 전답 2만6000평을 기증하여 재단법인의 기초를 세우고, 1927년 미국선교사 모펫(Moffet, S. A., 馬布三悅)이 설립한 창덕소학교(彰德小學校)에도 부동산을 내놓아 교육재단을 만들도록 주선하여 기백창덕보통학교(紀白彰德普通學校)로 발전시켰다. 이처럼 민족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의 사회활동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보람 있는 봉사사업의 소망을 품고 일본인들의 공회당인 평양 ‘부민관’보다 큰 대공회당(大公會堂)을 신축하기로 하고, 1927년 3월 10일에는 연광정(練光亭)이 올려다보이는 대동문 가에서 ‘백선행기념관’ 기공식을 하였다. 이 기념관은 3층의 화강암 건물로 지었는데, 이듬해 9월에 준공하였고, 1929년 5월 7일 성대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백선행기념관은 “329평 대지 위에 연건평 총 324평의 백선행기념관 1층에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회당, 2층에는 500명 수용의 집회실과 응접실 회의실 오락실 시설을 하고, 3층에는 도서관 시설도 완비하였다.”라고 한다.

북의 『백선행 반신상』과 남의 『백선행 전신상』, 남의 반신상은 북의 반신상을 참고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북의 『백선행 반신상』과 남의 『백선행 전신상』, 남의 반신상은 북의 반신상을 참고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1931년 12월 동상 건립이 추진되어 기념관 앞에 백선행 동상이 1932년에 세워졌고, 이 무렵 숭현여학교와 광성보통학교에도 기념비가 세워졌다. 백선행은 86세로 타계했으며 여성으로는 최초의 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백선행에 대한 평가는 남북이 공히 같다. 북에서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백선행이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막대한 투자를 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백선행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바친 생을 소중히 여겨 백선행기념관을 개건 보수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 한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5. 수원에도 백선행기념관을

백선행에 대한 관점이 남북이 공히 같으나, 하나 다른 것은 ‘남에서는 백선행을 수원 태생으로 북에서는 평양 태생으로 본다’라는 점 정도이다. 그것을 일부 수구가 “북에서 백선행이 평양 태생으로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하는데, 백선행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과거의 거의 모든 기록은 백선행을 평양 태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1979년에 니온 『한국인명대사전』에도 평양 태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선행이 어디 태생이고 어디애서 자선사업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민족교육을 위한 백선행의 선한 행실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1980년경에 만난 수원백씨로부터 “백선행이 1848년에 수원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1849년에 평양으로 갔다”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수원 출신의 백선행이 평양에서 선행을 하였다는 것을 수원시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백선행기념관』, 평양. 북에 있는 개인 기념관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선행기념관』, 평양. 북에 있는 개인 기념관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씨선행기념비』, 평양. 기념비의 형태로 보아 비의 지붕과 받침은 근래에 만든 것이고, 비의 본체는 예전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씨선행기념비』, 평양. 기념비의 형태로 보아 비의 지붕과 받침은 근래에 만든 것이고, 비의 본체는 예전 것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평양에 백선행기념관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기념관은 북에 있는 개인을 기리는 유일한 기념관으로 보인다. 나는 수원시에서도 당연히 백선행기념관을 세우고 그를 기려야 한다고 믿는다. 백선행기념관을 세우기 어려우면 수원의 어느 한 문화 시설을 백선행관(白善行館)으로 명명해도 좋다.

나 사는 제주에는 ‘김만덕기념관’이 있다. 김만덕(金萬德, 1739~1812)의 나눔 정신이나 백선행(白善行, 1848~1933)의 나눔 정신은 동일한 것이다. 남북간의 정세가 호전되지 않더라도 제주의 김만덕기념관과 평양의 백선행기념관이 상호 교류하였으면 한다. 봉건사회이던,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김만덕이나 백선행은 우리 단군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몸소 실천한 분들이다. 시대와 체제를 떠나 어찌 존경스럽지 아니한가?

6. 『동광』에 실린 백성행의 고난과 일생

잡지 『동광(同光)』 1931년 1월호(통권 제17호) 45쪽에서부터 48쪽에 「사람」이라는 제하의 무호정인(無號亭人)의 회고 수기에서 백선행을 소개하고 있다. 동광은 당시 흥사단에서 발행하던 잡지로서, 글을 쓴 무호정인은 오기영(吳基永, 1909∼?)이다. 무호정은 황해도 배천온천 근처 명승지로, 오기영은 1909년 황해도 배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부터 평양, 신의주 등지에서 근무한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아래에 오기영이 1930년 11월 11일에 써서 잡지 『동광』에 기고한 백선행의 입지전적 소전(小傳)을 전재한다.

「鐵窓속의 白善行 - 女流事業家의 致富秘話」 - 無號亭人

철창 속의 白善行이라 제하에 매우 괴벽한 감이 없지 안타. 그러나 필자는 꼭 이러케 제하고 싶은 괴벽한 고집을 버릴 수 가 버릴 수 없다. 독자는 호의로써 해석하기를 바라 둘 뿐이다. 白善行 여사는 과연 근대 朝鮮이 가진 봉사적 인물이다. 여사 7세에 그 父를 잃고 출가 8개월만에 그 남편을 사별하야 16세의 소녀과부로서 청상과부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신 님이 남기운 가난과 고독 속에서 七顚八起, 천만가지의 수난을 감내하야 그가 사회의 公財로 삼은 30 수만원의 거금을 축적하기까지는 인생의 가장 귀하다할 30當年부터 백발이 성성하기까지 철창 속의 불안한 꿈을 꾸엇다는 致富秘話. 때로는 사람을 울기까지 감격케 하고 또는 그의 堅忍不拔의 魂膽이 듣는 사람을 통쾌케 하는 그 중에서 여사의 80평생을 일관한 그 高潔無垢한 인격이 근대 朝鮮立志傳中의 한 사람을 맨든 것이다. 필자는 여사의 致富를 중심 삼아 그의 과거를 써 보고저 한다.

지금부터 50년 전 平壤 구골(甎九里) 白 과부의 집안에서 일어난 문중의 재산 쟁탈전에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제는 白 과부의 친모가 남기고 간 유산을 죽은 이의 무남독녀인 白 과부와 양자가 분배하자는 데서 발단 되엇다. 유산이래야 현금 천여량과 백쉰량짜리 집 한 채다. 이 집 한 채와 천여량 현금을 싸고도는 비극부터 써 볼 필요가 잇다...

과부 어머니, 과부 딸

白 과부는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때 그 부친은 가난과 그 딸을 안해에게 물려주고 세상을 떠낫다. 白 과부의 모친은 청상의 몸으로 어린 딸을 각구기 7년 白 과부 나이 열네살 때 洞里 安氏의 아들과 약혼하야 16세에 남편을 맞으니 이는 그 어머니 되는 이가 사위에게 모녀의 일생을 의탁하려 함이엇다. 그러나 그 의탁은 더욱 그 모녀에게 아픔과 고독을 주엇을 뿐이다. 白 과부가 남편을 맞은지 8개월 안에 원래 병약하든 남편마자 세상을 떠낫기 때문이다. 홀로 된 어머니도 일즉된 과부여늘 그 딸마자 16세에 남편을 만난지 겨우 8개월에 과부가 된 것이다. 그들 두 모녀에게는 오직 가난과 고독과 과부라는 이름이 남앗을 뿐, 어머니 과부는 과부 딸이 아직 나이 어리매 그를 개가시킴으로써 팔자가 고칠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앗으나 20전의 과부는 세 번 남편을 갈지 않으면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미신이 주는 공포와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더욱 고독할 어머니 자신을 돌아볼 때 그러한 용기가 없엇다. 그래서 두 과부 모녀는 늙기까지 떠러지지 않기로써 맹서하엿다. 우선 먹을 것이 구차한 이들은 「청대」(염료의 일종)치기와 간장(醬)장사 뵈(麻)짜기... 등으로써 糊口의 策을 삼앗다. 그들은 아침에 밥을 지어 저녁까지 먹고 해 짧은 겨을에는 하로 한끼로써 지나치는 때도 흔하엿다. 이것이 나무 한뭇 한 톨이라도 아끼자는 뜻이다. 이러틋 먹지 않고 입지 않고 飢寒에 잘 참는 두 과부 모녀에게도 한닢 두닢의 모디움어 잇엇다. 이것이 10년후 어머니 과부가 세상 떠난 때에 남은 현금 천여량과 백쉰량짜리 집 한 채 엿엇다.

養子派에게 遺産을 뻬앗겨

그러나 세상에는 억울한 일이 많다. 과부 어머가 세상을 떠나매 그의 喪轝뒤를 따를 상제가 없는 것이 문제엿다. 그래서 멀리 조카벌 되는 사나이를 죽은 이의 양자로 삼아 그의 상제를 삼은데서 유산의 쟁탈이 일어낫다. 출가외인이라니 白 과부는 그 어머니와 죽기로써 저축한 현금 천여량과 그 집을 상속할 권리가 없엇다. 이것은 양자가 상속함이 당연하다는 것이 죽은 이를 장사한 후의 양자의 주장이엇다. 白 과부는 여기에 끝까지 반항하엿다. 그러나 양자의 배후에는 유산을 논하먹기로 약속한 문중 뭇사람의 策應이 잇엇다. 결국 끝까지 반항한 값으로 소녀 과부로 개가치 않고 어머니를 모시어 임종한 것이 기특하다는 이유로써 그가 쓰고 잇는 백쉰량짜리 집만은 白 과부의 소유가 되엇고 현금은 문중의 5, 6인이 논아먹고 말앗다 - 논아먹은 발기를 아직 白善行 여사가 보관하여 둔 것은 그가 얼마나 그때에 억울하엿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더 없을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그는 고행 10년에 축적한 재물과 그 모친을 일시에 잃고도 오히려 용감하엿다. 재산을 빼앗은 양자 일파가 그의 집을 떠날 때 콩을 뿌리어 전송한 白 과부는 다시금 굳은 결심이 가슴에 일어낫다. 문깐에 콩을 뿌리는 것은 악귀가 들지 못하는 예방법 이엇엇다.

이제부터 다시금 그야말로 혈혈 단신의 이 불행한 과부의 고행이 시작되엇다. 그는 어머니의 생전에 하는 「청대지기」 뵈짜기, 간장 장사를 게속하엿다. 여전히 쓰지 않고 먹지 않고 입지 안는 것은 그 생활의 표어엿엇다. 거기에 여유가 잇을 것은 필연한 사실이다.

貪吏의 禍, 盜賊의 變

또 다시 10년이 지낫다. 이 때의 白 과부는 10년전의 白 과부가 아니엿다 궤ㅅ속에는 20여석 추수의 땅 문서가 들어 잇엇다. 여사의 재산은 이때부터 기름 부은 불꽃처럼 일기 시작하엿다. 해마다 여전한 근검과 저축은 추수하는 벼가 다시 땅쀀¬는 미천이 되군 하엿다. 10년 고행에 모은 돈을 양자 오라비에게 빼앗긴 白 과부, 이제는 다시 탐관 오리의 黑手가 그의 머리를 엎눌럿다. 그의 재산이 幾百石으로써 探問한 平壤府尹 彭翰周는 여사를 잡아다가 하옥하엿다 - 이것이 아마 지금부터 30여년 전, 여사 이미 40고개를 넘은 후다 - 그에게는 별별 누명도 씨워젓엇다. 당치 못할 곤욕과 협박도 加하엿다. 그러나 옥중 10여 일에 그는 고개를 숙인 법이 없다. 그의 강직하고 긔운찬 성격이 이런 때 發露된 것이다. 府尹으로서도 이 과부의 재산은 후일을 기약하고 그를 방면할 수밖에 없엇다.

여사의 뒤ㅅ머리와 앞니마에는 아직도 남아잇는 상처가 잇다. 이것은 여사가 두 번 강도의 침입을 받앗을 때 입은 상처다. 과부라 업수이 보아 침입한 강도로서도 거의 대담한 기백에 눌리워 그를 구타에 그칠뿐, 목적한 奪金은 하나도 성공치 못하엿다. 이때부터 白 과부의 집은 鐵杖으로써 든든한 도난 방비가 시작되엇다. 대문, 중문, 방문, 부억문, 들창, 장지 할 것 없이 외인의 침범이 염려되는 個所는 모든 굵은 철창으로써 가로 질러 막앗다. 여사가 이러케 철창 속에 지내기 20여 년 - 그는 궤ㅅ속에 가치움이 된 암사자와 같다는 險口도 잇음즉한 일이다. 15년 전 집을 새로 지을 때에 비로소 四面에 질리윗든 철장을 빼어버리고 여간한 곳은 모도 함석으로써 장식되엇다.

無用之地에 세멘트 工場이 서

그러나 근검 저축이란 거부까지 되기는 힘들다. 어떤 비약적 사실이 잇어야 한다. 여사는 오늘날 30여 만원을 축적한데도 그러한 사실이 잇다.

이것은 지금부터 15, 6년 사실이다. 江東郡 晩達山 부근 일대는 薄土로써 유명하야 땅 한 평에 일전 이하엿다고 식한다. 이것을 여사가 중개자에게 속아넘어서 매평 7, 8전 주고 이천평 가차히 삿다는 소문을 당시 平壤에 일대 화제가 되고 돈모기에 專心한 白 과부에게 과연 치명적 조소거리가 되엇엇다. 이것은 전화위복 될 줄은 누구나 꿈도 꾸지 못한 일일 것이다. 여사가 이 땅을 산지 2, 3년 후 거기서 세멘트 원료를 발견한 일본인은 이것을 극비에 부치고 부근 토지를 매평 3, 4전에 매수하엿다. 白 과부에게도 토지 매매의 交涉이 되엇다. 이 때 白 과부의 머리속에는 번개 같은 판단이 지나갓다 - 흥 내가 이 땅을 사고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엇거든 나보다 눈 밝은 일본 사람이 이 땅을 살라는 것은 必有 곡절이 아니냐 - 그는 댓바람 팔지 안는다고 거절하엿다. 이 땅을 사지 않고는 세멘트 공장은 도저히 세울 수 없는 형편이엇으니 거절 당하는 사람은 딱하지 않을 수 없엇다. 여사의 곁에 잇는 사람들이 어서 팔기를 권하엿다. 그러나 그는 - 내 평생 누구의 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내 맘대로 할테야 - 내땅 내가 안 판다면 그뿐이지 누가 뭐래? 땅값은 매일 올라갓다. 매평 30전! 다른 사람보다 10배의 가격이다. 그러나 여사는 오히려 不應하엿다. 마침내 平壤 府尹이 이것을 알선한 결과 협정 가액은 매평 70전! 그 땅 본전의 10배다. 말하자면 여사의 재산은 일약 7,8배의 부를 더한 것이다. 지금은 그곳에 백년대계를 세운 세멘트 공장이 대규모로 시설되어 잇다.

勇斷力잇는 그의 氣魄

그는 가난에서 나서 가난 속에 자라난 한낫 무식한 과부이면서 돈을 다루는 데는 어느 남자가 따를 수 없는 能이 잇다. 白善行기념관 건축 당시 請負학자에게 지불한 금액이 다섯 번에 매번 만원에 가까운 돈이엇건만 근친자들도 아지 못하게 이 80노파의 손으로 기약된 시간을 한번도 어김이 없엇다는 것은 그 能을 잘 말하는 것이다. 또 그는 일즉 80평생을 돈 모기에 專心하엿건만 한번도 그 이자의 高低를 막론하고 빗놀이를 한 일이 없엇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사람을 도모지 믿지 안는 다는 것은 찰아리 그 일생이 모든 주위의 속임이 많은 탓이리라 마는 그는 또 누구의 말을 듣는 일이 없다고 한다. 옳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든 할 것이면 하고야 만다. 그러나 한번 머리를 흔든 일이면 다시 더 變通이 없다. 그는 딱 잘라매는데 아무 주저도 없다. 이렇듯 그의 勇斷力이 잇음은 平安道 여자로서의 기백을 엿보게 되려니와 이 무식하고 일생을 돈만 아는 줄 알앗든 이 노파의 가슴에 뜨거운 봉사적 사업열이 끓고 잇는 것은 찰아리 일대 경이적 사실이라 안할 수 없다. 세상에는 명예를 위하야 혹은 과거의 罪過를 贖하려는 뜻에서 나오는 종종의 사업가가 잇다. 그러나 이 노파에게도 털끝만한 야심도 욕망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그는 돈을 사회에 쓰는 것이 옳다니까 썻을 뿐이다. 왜 유익하고 어째서 그것이 옳은지도 아마 모르는 듯 싶다. 일즉이 그의 입으로 사회를 위하야 돈 썻다는 말이 나온 적이 없다. 그저 남겨두고 죽어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욱 그를 순진케 하고 더욱 그 인격을 높이는 것이다. 그에게 남은 돈은 白善行 기념관을 지은 후에는 4만여 원에 불과하엿다. 그를 지금 모시고 잇는 먼 친척의 손자를 위하야 그것은 다시 쓰지 않도록 근친자들은 권하엿다. 그랫더니 이번에는 아무에게 말 한마듸 없이 崇仁商業學校財團法人期成에 13,000원을 喜捨하엿다.

- 나는 생전에 누구 말을 들은 일이 없다. 내가 하구픈 일이면 하고마는 것다 - 餘財 2만5천여 원 그것은 이제 또 어떻게 써질는지 여사의 늙은 가슴속에 經倫되는 일을 알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1930, 11월 11일)

7. 여적(餘滴)

1933년 5월 9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소개한다. 이 기사를 보면 백선행이 5월 9일 기사에 실렸다는 것은, 5월 8일자에 사망하였음을 의미한다.

“白善行女史가 平壤府衙廳里 自宅에서 別世하다. 白善行女史의 葬儀는 22個 團體가 참가하여 社會葬으로 白善行記念舘에서 거행되다.

白善行의 履歷

一. 開國458年 11月 19日에 平壤 中域에서 白持庸의 長女로 出生
一. 7歲에 失父, 14歲에 安載煌에게 出嫁
一. 16歲에 亡夫, 親家로 돌아가다.
自手로 모은 돈 32萬 7千餘圓을 左와 같이 社會事業에 寄附하다.
一. 1914年 3月에 大同郡 容山面 容山橋架設에 3千圓
一. 1924年 3月 23日 財團法人 光成高普에 13萬6百88圓80錢
一. 1925年 崇實女學校에 1萬4千2百65圓
一. 1928年 大同郡 彰德學校에 1圓
一. 平壤公會堂 白善行紀念館建築基金14萬6千圓
一. 1928年 平壤 崇仁商業學校에 1萬3千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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