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우리 한(韓)민족은 단일민족이다. 우리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국가적 개념을 흔드는 일부 지식인들이 있다. 현재의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의 자손뿐만 아니라 일본 혈통도 있고 중국 혈통도 있으며, 월남이나 아랍 혈통도 있고, 몽고 혈통이나 여진 혈통도 있으니 우리 민족은 잡종(雜種)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민족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다. 민족(民族)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가 단군(檀君)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면 우리는 단군민족이고 한민족이다.

흔히들 ‘단일민족’이란 단일 혈통의 민족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사전에 ‘단일민족’이란 의미는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된 민족”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은 대체적으로 20세기 중반부터 미국 유학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인종주의나 민족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생물학적으로 검토해도 문화사적으로 검토해도 엄연한 단일민족이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국가이다.

(29) 민족사관과 문중 보학의 상충

우리 민족의 민족사관(民族史觀)과 일부 씨족(氏族)의 문중보학(門中譜學)은 공존하기도 하며 상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종교적 민족사학은 혈통성으로서의 단군의 지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청주한씨’라든가 ‘행주기씨’ ‘태원선우씨’ 등등은 자신들이 기자(箕子)의 자손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학계에서 기자 동래는 허구적인 주장으로 본다. 170여 년 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기자에 대하여 회의적인 관점을 논하고 있다.

국사(國史)는 문중 보학에 앞서고 범위가 넓다. 민족에게 민족의 투쟁과 생존은 역사이고, 씨족의 성쇠(盛衰)는 잠시 오가는 물결(波濤)일 뿐이다. 사실 씨족 대부분이 국가가 성립한 이후에 발생하였다. 신화나 전설적으로는 국가보다 앞서, 또는 민족보다 앞서 출현한 것으로 주장되는 경우도 일부분 있지만, 실상은 국가나 민족이 성립된 이후에 씨족이 성립하였다.

일부에서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을 ‘환(桓)’씨의 성을 가진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러한 성씨는 후대에 만든 개념이다. 환은 ‘환하다’ 또는 ‘하늘님’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에 관한 개념을 한자화(漢字化)시키며 ‘환(桓)’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널리 확산된 성씨의 개념으로 고조선의 성씨를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한자식(漢字式) 성(姓)을 사용한 것은 고구려이고,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534~576) 때부터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학(譜學)의 입장이다.

각 씨족은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 훨씬 이후에 본관(本貫)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대체적으로 본관은 빨라야 신라말 고려초에 나오기 시작한다.

가. 우리나라의 귀화성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서문과 계대 부분면, 1476년(초간보), 3권3책,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자진 제공 - 이양재]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이 책에는 모두 약 9,000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데, 본손뿐만 아니라 외손까지도 가계를 자세히 출생순에 따라 기록하고 인적사항을 명기하였다. 1476년판 『안동권씨세보』 이전에도 족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이 급하다. 보물급.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 서문과 계대 부분면, 1476년(초간보), 3권3책,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자진 제공 - 이양재]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이 책에는 모두 약 9,000명의 인물이 등재되어 있는데, 본손뿐만 아니라 외손까지도 가계를 자세히 출생순에 따라 기록하고 인적사항을 명기하였다. 1476년판 『안동권씨세보』 이전에도 족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이 급하다. 보물급.

조선 중종 때인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씨 277개 중 거의 절반인 130여 개가 외래 귀화 성씨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외래 귀화 성씨의 절대다수는 중국의 한족을 시조로 둔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외래 귀화 성씨의 시조는 당대에 유명했던 인물을 가문의 권위를 위해 허위로 설정한 것이 매우 많았다.

족보로는 한국 성씨의 시조에 유명한 중원의 인물이 있다. 공자의 자손이라는 곡부공씨와 맹자의 자손이라는 신창맹씨 등등 많이 있다. 그러나 애초에 해당 족보 자체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 게 대다수이고, 옛날 그 당시에는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당대의 유명인을 시조로 삼는 일은 많았다.

20여 년 전 중국의 공씨(孔氏)들이 세계에 산재해 있는 공씨들의 유전자를 조사하여 단일 계보를 확보하려 한 적이 있다. 중국 정부의 만류로 무산되었다. 그들이 일족이라는 것을 장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역사에 여진족으로 기록된 려말선초의 인물 퉁두란(佟斗蘭), 즉 청해이씨(靑海李氏)의 시조 이지란(李之蘭, 1331~1402)을 중국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의 후손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지란은 내 모친 쪽 집안(외가)의 시조이다. 나는 이지란이 여진족임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진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초기의 여진족을 곱게 여기지는 않는다.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성씨는 현실적으로 이래서 귀화 씨족의 본관, 성씨, 시조, 족보 등은 생물학적인 계보라기보다는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 문화적인 계보로 보아야 한다.

중국 측 귀화성씨 이외에 고려 충렬왕 때 귀화한 위구르계(회교, 아랍계) 장순룡을 시조로 한 덕수장씨(德水張氏)와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이 시조로 한 화산이씨(花山李氏),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의 성을 딴 김해허씨(金海許氏)와 양천허씨(陽川許氏),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순한 일본의 무장 김충선(일본명 사야가)이 시조인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위구르계 귀화인인 설손(설장수의 아버지이며 설순의 할아버지)의 후손인 경주설씨(慶州偰氏) 등등이 있다.

우리나라에 이미 천 수백 년 전부터 수백 년 전까지 여러 귀화성씨가 있었다고 해도 우리 민족을 다민족 국가로 볼 수 없다. 그들 귀화인 일부는 도도히 흐르는 우리 민족의 혈통에 섞여 들어온 소수의 혈액일 뿐이다. 내 몸에 수혈한다고 해서 내 정신과 육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 세대마다 배수로 늘어나는 직계 선조

『광주이씨동성보(廣州李氏同姓譜)』, 1613년(재간보), 1책, 목판본.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한 족보가 없어지자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다시 편찬하였다. [자진 제공 - 이양재]
『광주이씨동성보(廣州李氏同姓譜)』, 1613년(재간보), 1책, 목판본.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한 족보가 없어지자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다시 편찬하였다. [자진 제공 - 이양재]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내 집안을 예로 들겠다. 나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중시조 둔촌 이집(李集, 1327~1387)의 21세손이다. 나는 오극(五克) 선조의 막내 이극균(李克均, 1437~1504)의 차남의 후손이므로 이제야 23세손까지 내려왔으나, 오극 선조의 장남쪽 후손은 중시조로부터 27세~29세까지도 내려왔다.

2015년 우리나라의 국세조사에서 광주이씨는 181,377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통계에는 같은 광주이씨지만 둔촌의 자손이 아닌 분들까지 포함된 숫자이다. 둔촌 이집의 자손만 16만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둔촌 이집의 외손과 외손의 외손 등 외외외외외‥‥‥손까지 합한다면 200만은 족히 될 것이다.

이제 달리 환산해 보자. 앞서 나의 모친은 여진족 이지란의 후손인 청해이씨(靑海李氏)임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나의 친(親)할머니는 고려초에 연원을 두고 있는 파평윤씨이고, 나의 외(外)할머니는 신라에 연원을 두고 있는 강릉김씨이다.

나의 1대 위는, 즉 부모 대(代)는 2인이다. 2대 위는. 즉 조부모 대는 4인이다. 3대 위는 8인, 4대 위는 16인이다. 즉 4대 위는 고조부가 8인이고 고조모도 8인인 것이다. 4대의 16인을 계보 그림으로 그린 것을 이른바 팔고조도(八高祖圖)라고 한다. 이렇게 10대가 올라가면 1024명의 조상이 있게 되고, 20대를 올라가면 104만8576명의 조상이 있게 되며, 30대를 올라가면 수치로는 10억7374만1824명의 조상이 있게 된다.

30대라면 대체적으로 800년 전인데 800년 전의 고려시대 중기(서기 1200년경)에 우리나라 인구는 1천만 명이 안 되었고, 세계인구도 10억 명이 되지를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나는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어느 특정 인물의 23세 외외손이 될 수도 있고 27세 외외손이 될 수도 있다. 고려말의 고려왕비들은 원나라의 공주들인 경우가 여럿 있었으니 충선왕이라든가 충열왕은 징기스칸의 외손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내 직계로 19세 조모는 교하노씨이다. 이 교하노씨 선대에서는 고려말기 고려 왕실의 공주와도 혼인을 가졌다.

몽고 징기스칸의 외손이 개성왕씨(開城王氏) 이외의 씨족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고려를 유린하였던 몽고족을 조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몽고족이나 여진족은 우리 민족과 같은 인종이지만, 언어라든가 식생활 풍습 등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크다.

즉 한반도에 살거나, 한반도 밖에 사는 우리 민족은 하나의 굵은 혼맥(婚脈)과 혈맥(血脈)의 기둥이다. 우리 민족의 본체에 외부의 수혈을 한다고 해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육체가 다민족(多民族)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기본적 정의를 다시금 상기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민족(民族)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인식하면 우리는 단군민족이고 한민족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광주이씨 씨족에 속한 단군민족의 구성원이다.

다. 역사를 이루는 주민들의 본체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545년경(초간보), 1책, 목판본. 임진왜란 이전에 발행한 족보는 희소하다. [자진 제공 - 이양재]
『청송심씨족보(靑松沈氏族譜)』, 1545년경(초간보), 1책, 목판본. 임진왜란 이전에 발행한 족보는 희소하다. [자진 제공 - 이양재]

고구려가 망한 후에 많은 사람이 당나라에 사로잡혀 갔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 땅에 남아 30년 후에 그 고구려의 영토 위에 발해(渤海)를 세웠다. 발해가 망한 후에 많은 사람이 고려로 넘어왔지만, 더 많은 사람이 그 땅에 남아 료나라와 금나라 백성으로 흡수되었고, 그 후손들이 청나라의 여진족으로도 내려왔다. 료나라나 금나라, 그리고 청나라의 정신적 실체는 우리 민족이라 할 수가 없다. 이미 우리 민족의 정신, 즉 정체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정한론파 사학자들은 조선과 만주(청) 몽고를 하나의 혈통으로 보았다. 그것을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로 묶어 세워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이며, 이는 동북아 침략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삼국시대나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에 한반도에 살던 많은 사람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문화를 전수하였고, 소국을 건설하거나 지방 토호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후손이 조선을 침략하고 정벌하기 위하여 정한론을 만들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 행위에 그들이 같은 만족이라는 허울 아래 우리가 동조할 수는 없다.

조선을 침략한 그들은 이미 우리의 동족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히 잊은 우리의 적이다. 일본의 정한론파 국수주의자들은 이미 우리 민족이 아니라 일본 민족이 된 것이다. 일본왕이 자신에게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고백에 우리 국민들이 환호할 필요는 없다. 일본왕의 그 많은 조상 가운데 한두 명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일지라도 일본왕의 정체성은 일본 극우의 핵이 심어있기 때문이다. 일본왕이 자신에게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고백에 환호하는 행동 자체가 동족과 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조선족 가운데는 우리 민족정신이 투철한 분들도 있지만, 완전히 중화민족화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도 똑 같다. 또한 120년전 멕시코나 쿠바로 간 대한제국시기 이민자들의 후손들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잘 지키고 있는 경우도 본다. 우리의 말과 글은 몰라도, 조선인 또는 대한국인이라는 자각이 있는 그들에 대한 민족적 정책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임을 자각한 자는 그 혈통에 외래의 피가 섞여 들어와 있어도 우리 민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고구려 유민(遺民)의 후손으로서 당나라의 장수가 된 고선지(高仙芝, ?~755)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고선지보다는 당에 반기를 들고 한때 제나라를 건국한 이정기(李正己, 732~781)와 그 후계자들을 고선지보다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일본의 작위를 세습한 이완용의 아들보다는, 국내에서 조선총독부의 고관으로 활약한 자들보다는, 중국에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동북항일연군을 세우고 항일전쟁을 시도한 독립 열사들을 더 치하(致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식민지시대의 친일파들은 우리 민족의 구성원임을 자의로 포기한 자들이다. 그들 중에는 해방된 조국에서 애국지사의 암살을 주도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인으로 삶을 마친 자도 있다. 현재 한국 국적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는 현대 친일파들은 이미 우리 민족의 구성원임을 스스로 포기한 자들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그들을 국외 추방할 수는 없을까?

라. 최동을 소개한다

해방후 우리 민족사학계에는 스스로 민족사학자임을 주장하는 두 인물이 출현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최동이고, 두 번째 인물은 문정창이다. 둘은 모두 골수 친일파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유립이 등장한다.

나는 ‘국혼의 재발견’ 제26회에서 「이유립과 『환단고기』, 『다물구음』」을 다루며 문정창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으며, 사진으로 최동(崔棟, 1896~1973)의 저서 『조선상고민족사』를 소개한 바 있다. 그 사진 설명에서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의 서문은 제1기 민족사학자 장도빈(張道斌, 1888~1963)이 1960년에 썼고, 저자는 권두언을 1963년에 썼으나, 이 책의 초판본은 1966년에 나왔다.

제2기 민족사학자 최동은 일본이 만주국을 세웠을 때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滿蒙)문제』(1932)를 자비 출판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한 전력이 있는데, 해방후 그는 이 저술을 발표하였다. 당시 최동은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滿蒙) 문제』(1932)를 자비 출판할 때부터 “만몽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일선 만몽 및 한인을 융합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라고 보았고, 그는 각 민족의 조상이 같은 계통이며 서로 혈연이 가까우므로 각 민족간 융합은 쉽게 촉진시킬 수 있다”라고 보았다. 이 책은 제2기 후반부의 유사 역사가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 책의 근저에는 그러한 일제의 만선사관의 영향이 일부 보이고”있다고 언급하였다.

이제 최동에 대하여 살펴보자. 1896년에 태어난 최동은 유년기를 순천에서 보냈다. 가톨릭교단에서 운영하는 동경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 입학하였고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이후 도미하여 캘리포니아주립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약 1년간 수학 후 귀국하였으며, 1917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해부학교실 조교로 있다가 중국 북경협화(北京協和) 의과대학에서 기생충학을 1년간 연구하고, 캐나다 토론토대학(University of Toronto) 병리학교실에서 2년간 연구하였다.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1931년∼1934년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였다. 1925년부터 기생충학을, 1931년부터는 병리학을 강의하다가 다시 일본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의학교실에서 2년간 연구하다가, 1935년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최동은 이 시기부터 급격히 친일로 기울어진다.

그는 1936년 3회에 걸쳐 ‘재만조선인통신’에 「조선 문제를 통해 보는 만몽 문제」를 기고했는데, 3회분에서 재만조선인통신사는 최동이 “조선 민족과 야마토 민족과의 동종동근의 역사적 실증을 들어 참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당당하게 주장했다”라고 소개했다. 최동은 그 글의 말미에서 “대민족주의의 구심적 국책을 확립해서 그 궤도 내에서 조선 민족의 원심적인 해방‧발전에 경제적 원조를 부여하는 일이 제국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하고, 동아의 평화를 지키며 세계의 안녕질서를 확보하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총명한 위정자는 깨닫고, 현명한 국민은 인지하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사상적 친일파로 변신한 것이다.

최동은 1938년에 기독교계가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39년 2월에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 취임했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하여 민족과 양심을 판 것이다. 이후 1941년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그런 그가 해방후에 다시 세브란스의전 교장을 지냈고, 의과대학으로 승격한 뒤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최동은 자신의 친일행위와 신사참배를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해방후에도 친일 속성을 그대로 지니게 되었다.

마. 최동의 정신머리는 무엇인가?

1936년 3회에 걸쳐 ‘재만조선인통신’에 「조선 문제를 통해 보는 만몽 문제」를 기고했는데, 그 기고문을 모아 자비를 들여 소책자를 발행하여 일본 조야애 뿌린다. 문제는 최동의 그 글이 일본의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과 만몽사관(滿蒙史觀)을 담고 있다는 점이고, 그러한 최동의 1936년도 친일 사고가 1966년에 발표한 『조선상고민족사』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동은 이 책의 「권두언」에서 1936년에 발표한 「조선 문제를 통해 보는 만몽 문제」를 전혀 비판 의식없이 언급하고 았다.

최동의 여러 상황을 돌아보면, 최동의 만몽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일(日) 선(鮮) 만(滿) 몽(蒙) 및 한인(漢人)을 융합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각 민족의 조상이 같은 계통이며 서로 혈연이 가까우므로 각 민족간 융합은 쉽게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들이 원래 하나의 종족에서 유래했다는 증거로 최동은 만주족, 몽고족, 서장의 주민 대부분, 남러시아 타타르족, 구라파까지 침입한 터키 및 일본 조선족 등은 그 언어 계통이 동일하고 문법 및 단어의 유사성에 적지 않다는 점을 들어 동조동근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풍습도 유사한 점이 많고 과거 종교도 비슷한 점 등을 생각하면 그들이 먼 과거에 혈연적 관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동은 자신이 1936년에 이 소책자를 저술한 진짜 이유는 만몽문제를 통해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최동이 보기에 조선문제의 연장이 만몽문제이며 동시에 만몽문제의 근저에 조선문제가 있으므로 이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만몽문제 에서 말하는 조선 문제의 핵심이 조선 민족의 해방이나 조선의 독립은 아니었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최동은 두 민족의 문화가 하나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으로도 그 근원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에서 분명하고 언어, 풍속 및 고고학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다수는 동일 계통의 조선(祖先) 민족에서 분기하였는데 이는 일본 고대민족에 대한 고고학적 관찰, 일본과 조선 고대 신화의 유사성으로 충분히 논증된다고 보았다. 혈연이 상통하는 조선과 일본 민족은 고대에 서로 합심하여 이민족인 아이누 및 남방 도래 왜인을 위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각자의 영토에서 소통이 없이 지내고 왜구에 의한 피해와 임진왜란 한일합방 등의 역사적 사건을 거치면서 두 민족이 서로 반목하게 되었으나 양 민족의 장래를 볼 때 보다 대국적인 견지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한다고 최동은 생각했다. 마치 조선말기와 대한제국기의 일부 역사학자와 친일파들이 일제에 속아 넘어간 것과 같은 일이 최동에게 일어난 것이다.

최동은 당시 일본인은 과거 30년간 20만이 안 되는 농업이민만이 만주지역에 있었던 반면 조선인 농업이민은 당국의 도움 없이도 같은 기간 100만에 이른 것을 지적하며, 그는 일본인들은 봉천 이남의 비교적 따뜻한 관동주를 본거지로 하여 점차 북방으로 뻗어나가게 하고 조선인은 북만주 지방을 개척하여 남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즉 최동은 조선인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에 만몽이민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았던 것인데, 이는 우리 조선 민족 자체를 이용하여 만주를 일본에 복속시키자는 주장이었던 셈이다.

결국 조선문제에 대한 최동의 견해는 “대일본주의(몰골로이드)의 구심적 국책을 확립하여 그 궤도 내에서 조선민족의 원심적 해방발전에 경제적 도움을 주는 일은 제국의 기초를 튼튼하게 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고 세계의 안녕질서를 확립하는 근본적인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대민족주의란 타타르계 몽고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틀 안에서 조선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당시 현단계의 만몽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철저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동북아 식민정책의 골수를 보여주는 주장이다. 이랬던 친일 인물이 바로 최동이다.

바. 최동은 민족사학을 왜곡했는가?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권두서」, 최동(崔棟, 1896~1973), 최동은 권두서에서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1966년 동국문화사 발행. [자진 제공 - 이양재]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권두서」, 최동(崔棟, 1896~1973), 최동은 권두서에서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문제」에 대하여 언급한다. 1966년 동국문화사 발행. [자진 제공 - 이양재]

최동은 해방후 그러한 친일적 사고를 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그의 상고사 연구는 친일을 반성하고 우리 민족주의를 내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에서의 일제의 동조동근론을 민족사학과 일치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하는 회의를 갖게 한다.

최동은 1966년 1,300여 쪽에 달하는 대저 『조선상고민족사』를 발표하였다. 그는 이 책의 권두언에서 이와 같은 연구를 시작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최동은 1936년에 앞서 언급한 「조선문제를 통하여 보는 만몽문제」라는 책을 자비로 출판하였다. 최동이 이 책을 저술한 진의는 당시 일본의 중요한 국가적 관심사였던 “만몽문제를 빙자하여 조선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출판한 다음해 일본에서 “민과 관의 인사들에게 조선민족 해방의 필요성을 대국적 견지에서 역설한바 있다”고 한다. 그는 만주 몽고 조선의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중에 이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이 지역에 얽혀있는 현안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조선상고민족사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최동은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친일파로 시작된 최동의 조선상고민족사에 대한 연구는 30년간 그대로 이어지며 1,3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로 나오게 된 것이다.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목차」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 「목차」 부분. [사진 제공 - 이양재]

최동의 저서 제목은 ‘조선상고사’가 아니라 ‘조선상고민족사’이다. 책의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에 대한 이유를 최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역사가가 아니다. 한 의학도로서 과거 병리학과 법의학을 전공한 교육가이다. 과거 장기간에 걸쳐서 나의 시간과 노력을 경주한 까닭은 역사학 자체에 대한 취미에서가 아니라 실은 조선민족 자체연구의 필요성에서 출발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최동의 여러 문제는 육당 최남선의 것과 유사하다. 최동이나 최남선이나 모두 기독교인이다. 최동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민족의 태고문화는 바빌론 문화의 동천(東遷) 문화였다. 따라서 희랍문명 이전에 소멸된 동방문화를 그 종교 사상 예술 등의 방면에서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고대조선민족사를 연구 하는 것이다.

최동에 따르면, 이들 고아시아족의 일부가 시베리아 남단을 동쪽으로 횡단하여 북만주의 송화강 연안 평야에 정착하였으며 이들은 하얼빈 지역 근처에서 번성하였다. 이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한족의 조상인 황제가 동이족의 수장인 치우를 격퇴한 것이 기원전 2,600년경이므로 이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보았다.

이들 알타이족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져 이동을 하는데 그 중 한 갈래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여러 민족이 되고 다른 한 갈래는 서쪽으로 이동해 흉노족이 되었고 마지막 한 갈래가 남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오는 동이족이 된 것이다. 이는 육당 최남선의 주장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필자가 보기에 최동의 『조선상고민족사』에 나타난 역사관은 기독교적 역사관과 일본의 만몽사관을 바탕으로하여 우리 민족사관을 접부친 결과물로 보인다. 결국 이는 민족사관의 뼈대를 바꿔치기하고 살과 가죽만 우리 민족으로 바꾼 것과 같다.

이에 현혹되어 같은 친일파 부류인 문정창이 민족사학의 탈을 쓰고 나오게 되었다. 최동과 문정창의 언필칭 민족사학은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안재홍, 권덕규, 문일평, 장도빈 등등 제1세대 민족사학이나 안호상 박사의 대종교적 민족사학과는 골(骨)과 체(體)가 다르다. 이를 하나로 묶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사. 결어

이번 회 연재에서는 민족사관과 상충되는 문중보학의 생물학적 논리적 허구를 검토해 보았다. 또한 민족사학으로 위장한 만몽사학과 정한론파 조선식민사학의 면모도 살펴 보았다. 일본의 임나일본부를 주장한 정한론파 조선식민 사학은 지난 31회 연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미 대한제국시기에 우리나라 사학계에 침투해 들어왔으나, 이는 차츰 대한국민교육회 소속의 유성준(兪星濬)이나 현채(玄采) 등등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격퇴되었으며, 1909년 대종교가 중광되며 민족사학이 확산한다.

『단기고사』를 가장 잘 활용한 언필칭 민족사학자가 바로 최동이다. 그러나 그는 정통적인 우리 민족 정신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고, 친일적 사고를 바탕으로하여 우리 민족사관을 더럽힌 인물이다. 이후 문정창이 등장하고, 끝내 일본인 국수주의자 카시마 노보루(鹿島曻, 1926~2001)에게 이용당한 이유립까지 등장한다.

원래 카시마 노보루와 박창암은 상당히 밀접한 사이였다. 카시마 노보루가 방한하였을 시에 박창암과 이유립 등등이 회동한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한통속으로 일을 벌인 것이 『환단고기』 일본 출판이었는데, 거기에 이유립이 이용당한 것이다.

일제식민지시대의 조선에서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는 세 부류가 있었다. 첫째 부류가 반일적인 대종교 계열이고, 둘째 부류가 정훈모 등이 주도한 친일적인 단군교 계열이며, 셋째 부류가 비교적 온건적인 단군 숭배 계열의 군소 종교였다. 일제의 침략은 역사학 뿐만 아니라 종교에도 깊이 시도되었다. 단군을 숭배하였다고 해서 모두 독립운동가는 아니며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단군 반신상’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 1책. 1910년. 서울 화봉문고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단군 반신상’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 1책. 1910년. 서울 화봉문고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제1회 연재에서 소개하였듯이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기 직전에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려고 서울 안암동에 조선 신궁을 지어서 고조선의 시조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함께 봉안하려 시도했다.” 그 목적으로 1910년에 출판한 『신궁건축지』 목판본에 「단군천황(檀君天皇)」 어진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단군에 천황(天皇)을 붙여 숭배할 이유도 신궁에 합사(合祀)할 이유도 없어졌으므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토록 일본이 단군을 이용하려 했음은 경악스럽다. 그렇다. 단군 관련 문헌이라고 해서 모두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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