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파스칼은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고 말했다. 자크 데리다는 이 말을 인용하여 강제 할 힘을 갖지 못하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실현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무기력한 정의는 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법을 통해 실현되는 정의는 정의의 본질적 실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 박정희의 18년 통치기간은 이런 의미에서 정의 없는 전제적 통치였다. 힘이 법을 통치하는 시대였음을 들어 혹자는 박정희식 통치를 파시즘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박정희 전제정권은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납치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정적 제거를 위한 살해의 방식으로는 법을 동원한 사형의 방식도 있었지만, 암살의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특히 암살은 사고를 가장한 의문의 죽음 형태로서 정치적 반대 행위를 중단시키는 것과 함께 정적을 동시대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의문의 죽음은 죽인 자는 짐작되나 ‘침묵의 입’을 통해 죽음의 실체적 진실이 들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의문사의 진실은 죽음의 미래, 이것의 낯설음으로 인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주도권도 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의문으로 남겨진 죽음은 미래에 속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암살 된 당시의 현재와 관계를 맺으며 진상규명이라는 미래의 시간으로 수용되면서 연결되어진다. 그래서 의문사 진상규명은 시간으로는 동시대성을 전체 관계에서는 상호성을 가진다.

의문사 진상규명 노력은 죽음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불확실성과 낯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을 당한 자와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 진실 규명을 포기하지 않는 경우 뜻하지 않게 미래에 진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에 대한 ‘암살’의 확신은 2011년 폭우로 인한 묘소의 파손, 개묘, 유해 감식의 과정을 통해 미래에 속한 죽음의 진상규명 영역이 1975년의 현재를 수용한 동시대성과 상호성을 갖는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장준하 의문사가 ‘암살’이 되기까지의 서사

장준하 선생은 일제 강점기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헌신한 독립 운동가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건국활동에 참여하였고, 독재 정권에 맞서서는 ‘사상계’ 잡지를 통해 민주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이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실시하자 ‘3선 개헌 반대 투쟁위원회’ 선전부장으로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발효 된 이후에는 유신정권에 맞서 민주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 후 선생은 1973년 12월 13일경부터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이러한 개헌운동을 금지하는 내용의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2호를 공포하였다.

선생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긴급조치에 굴하지 않고 개헌 청원운동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는데 이로 인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1974년 1월 13일경 구속되어 비상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수감 생활중 1974년 12월 4일 지병인 협심증으로 인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선생은 1975년 2월 21일 민주회복 개헌운동의 단일화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등 개헌운동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씨 등과 유신헌법과 당시 정부를 비판하는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을 준비했다.

당시 선생의 일일 동향을 파악하던 중앙정보부는 1975년 3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여 이를 와해, 봉쇄기 위한 조직 확장 세력 화산 방지를 위한 범법 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장준하 선생의 반 유신 활동은 대통령 박정희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유신반대 활동 중이던 1975년 8원 17일 장준하 선생은 호림산악회와 함께 경기도 포천군의 약사봉을 등반하던 중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 사인에 대해 의정부지청은 약 12m 절벽에서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발표 내용과 달리 선생의 죽음은 절벽 추락사로 보기 어려웠다. 특히 동행한 목격자 김 모 씨의 행적과 관련하여 중앙정보부의 사설 정보원이라는 의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장준하 선생dl 의문사 당한 약사계곡 현장. [사진제공-추모연대]
장준하 선생dl 의문사 당한 약사계곡 현장. [사진제공-추모연대]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1기, 2기 조사 활동을 했지만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하였다. 불능 사유로 위원회는 산행 동행자 김00의 진술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고, 국정원이 존안하고 있는 자료를 비협조하면서 조사기간 만료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들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고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다시 조사 신청되었다. 하지만 2010년 3월 1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중지를 결정했다. 이렇게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는 진상규명이 어려워지는 듯 했다.

하지만 2011년 8월 자연재해로 인해 진상규명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해 여름 집중 폭우로 인해 장준하 선생 묘소 뒤편 옹벽이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다. 파주시는 장준하기념사업회에 장준하공원 조성을 제안하였고, 국립 현충원 이장을 고려하던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장준하공원 이장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장 전에 37년 만에 개묘를 통해 유해 감식을 결정했다.

유해감식은 서울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서 이루어졌다. 유골 정밀 감식 감정단장 이정빈 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추락사가 아닌 외부 가격에 의한 타살임을 결론 내렸다. 2012년 10월 19일 발족한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는 이러한 사실을 대국민보고회를 통해 밝혔다. 이를 통해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는 암살사건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활동을 통해 의문사에서 암살로 규명되는 과정에 이준영 장준하기념사업회 전 사무국장이 있다.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활동을 이끈 이준영의 삶

이준영씨에게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 일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1984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어요. 사회학을 선택한 이유는 한완상 선생님 영향이었는데, 어느 날 신문에 의학은 몸의 병을 고치는 학문이고 사회학은 사회의 병을 고치는 학문이라는 글을 읽고 사회학과에 들어갔어요.” 신입생이던 1984년은 전두환 집권시기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사회 문제 의식은 당연히 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학생운동에 몸담은 사람들이 그랬듯 학교를 길게 다녔다. 학생운동에서 연대 사업을 맡으면서 빈민운동, 노동운동과 함께 하기도 했다. 그 중 1986년 상계동 철거민 지원투쟁과 청계피복 노조와의 연대활동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수배 기간 중에는 창신동 전태일 열사기념관(평화의집) 문간방에서 한 달 동안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1988년 안기부에 연행되어 고처를 겪었고, 군대도 다녀오느라 12학기만인 1992년 8월에야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신문로 포럼’에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 단체는 장준하 선생과 인연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던 중 1998년 권유에 의해 장준하 선생이 쓴 책 ‘돌베개’를 읽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 듣기만 했던 장준하 선생의 삶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1998년은 IMF로 인해 사회 전반적이 침울하던 시기였다. 특히, 청년들은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1944년 조국독립의 전망이 없다고 낙담할 때,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했고, 박정희 독재가 유신을 통해 더욱 파시즘화 되었을 때 개헌 국민운동을 전개했다. 힘든 사회에 장준하의 정신은 어려움 속에서 더 빛났다. 이준영씨는 장준하의 정신이 각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자마자 마음 맞는 사람들을 불렀어요, 광화문 근처 곱창 집이었는데 장준하 선생이 걸었던 중국의 6천리를 대학생 56명과 함께 걷기로 결의했어요, 그게 ‘곱창 전골집 결의’예요. 결의 후 계획서를 만들고 사업을 추진했어요. 이 과정에서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장준하기념사업회가 발족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이때부터 대학생들과 ‘아! 장준하 구국장정 6천리’를 매년 두 차례 개최했다. 이렇게 참여한 학생 청년들은 ‘청년등불’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청년등불은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니들과 연대하고,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까지 천리 길 걷기를 12박13일간 다니기도 했다. 자연재해가 나면 봉사활동도 했다.

장준하 선생 추모식 후 김희숙 여사, 청년등불 대원들과 함께. 김희숙 여사 왼쪽이 이준영. [사진제공-이준영]
장준하 선생 추모식 후 김희숙 여사, 청년등불 대원들과 함께. 김희숙 여사 왼쪽이 이준영. [사진제공-이준영]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초기에 그는 진상규명활동보다는 장준하 정신의 계승과 기억을 위한 사업을 중심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당시 국가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기구에 의한 진상규명이 불가능해지면서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규명 활동은 기념사업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11년 폭우로 인해 이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장하는 과정에서 개묘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유해감식을 통해 사인규명을 하기로 결정한다. 장준하 선생의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 규명 국민대책위원회’가 2012년 10월 19일 발족하게 된다. 국민대책위가 발족하기 이전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청와대에 암살의혹 규명 진정서를 제출하고 암살의혹 규명을 위한 연대 기구를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법의학 감정을 통해 타살 즉 암살이 확실시 되었다. 이러한 유해 정밀 감식 결과는 2013년 3월 26일 대국민 보고대회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후 대책위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조직으로 개편되어 ‘장준하특별법 제정 시민행동으로 전환되었다. 장준하 특별법은 19대 국회와 재대 국회에 발의되었다. 하지만 202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개정되면서 법안의 성격상 병합되어졌다. 2021년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되어 조사 중이다. 이준영씨는 현재 장준하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그만 두고 진상규명 영역에 한정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준영씨에게 장준하 선생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물었다. “비전을 제시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주목할 것은 청년기의 사람들이 장준하 선생의 활동을 통해 배울 점인데, 깜깜할수록 새로운 시작을 했던 분이라는 거예요. 조국 독립의 어둠에도 광복군 활동을 했고,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분이죠. 청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이예요. 인생에 추천할 만한 선배라고 생각해요”

장준하 선생의 삶은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고,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한 정의는 정의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이 틀렸음을 실천으로 증명한 삶이었다. 그러한 인생 선배 장준하의 삶은 돌베개라는 책을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 그쳤을 수도 있었으나 그 순간, 장준하의 삶을 현실화 하여 청년들과 함께 실천했던 사람이 이준영씨라 할 수 있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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