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

민족사학자임을 주장하는 일부 황당사관론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민족 근대 문화의 가치를 거의 훼멸하려는 수준에 있다”라는 점이다. 그들은 한반도 남부에 있는 상당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폄훼한다. 즉 일부 황당사관론자들이 백제외 신라의‥‥‥, 심지어 고려의 건국지(建國地)도 중국 대륙으로 잡음으로 인하여 중국의 문물이 백제 및 신라와 고려의 문화재로 둔갑하며, 정작 백제 및 신라와 고려 문화재의 가치와 특성은 말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대로부터 한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 문화재의 미적 본질은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다. 중국 대륙에는 백제 고유의 문화재와 동일한 문화재는 없으며, 신라 형식의 화려한 금관도 없다. 황당사관론자들의 논리를 살펴보면, 마치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족적 예술 특성을 말살하려는 듯한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된다. 즉 그들은 우리 민족을 황당 민족으로 개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사대적 속성에 사로잡힌 조선의 유학자들이 우리 민족의 본성을 사대적으로 개조하려 하였고, 일제는 식민지 백성으로 개조하려 했다면, 황당사관론자들은 우리 민족의 본질을 산산히 분산시켜 변질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백제 첫수도와 고구려 남평양을 증언하는 지리지 『북한지』

『북한지(北漢誌)』 본문 「연혁」 부분, 1745년,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가람문고(가람古951.2)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성능 스님이 저술한 『북한지』는 1993년 12월 5일자로 범우사에서 한지(漢紙)에 원본대로 영인하여 오침 장정으로 복간하였다.
『북한지(北漢誌)』 본문 「연혁」 부분, 1745년, 목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가람문고(가람古951.2) 소장본. [사진 제공 - 이양재] 성능 스님이 저술한 『북한지』는 1993년 12월 5일자로 범우사에서 한지(漢紙)에 원본대로 영인하여 오침 장정으로 복간하였다.

『북한지(北漢誌)』라는 지리서가 있다. 24장 48면에 불과한 한적(韓籍)이지만, 나는 이 책을 상당히 주목하였다. 그 이유는 서두(書頭)에 들어있는 연결된 목판화 3장이 판화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도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주목하여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면 우선 백제의 대륙 건국을 주장하는 황당사관론자들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호외(號外) 연재에서는 이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북한지(北漢誌)』 판화 첫 부분, 3장6면에 걸쳐 북한산 판화가 실려 있다. 우리 판화사에서 주목되는 판화 가운데의 하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북한지(北漢誌)』 판화 첫 부분, 3장6면에 걸쳐 북한산 판화가 실려 있다. 우리 판화사에서 주목되는 판화 가운데의 하나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북한지』는 1745년에 승려 성능(聖能)이 북한산성의 축조와 관리에 관하여 기록하여 목판본으로 출판한 지리서이다. 저자 성능은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승려들을 총 지휘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중흥사(重興寺)에 머무르며 1745년(영조 21)까지 팔도도총섭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북한산성을 관리하였는데, 산성의 축조와 관리에 관한 사료를 모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 『북한지』를 편찬하였는데, 이 『북한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지3 「한성부」에 근거를 둔 저술이다.

가. 백제의 첫 수도

내가 『북한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3 「한성부」에서 주목하는 기록은 연혁(沿革)에 있다. 즉 “本高句麗北漢山郡 (一云 南平壤) 百濟溫祚王取之十四年丙辰 (漢哀帝建平二年) 築城‥‥‥”의 부분이다. 나는 백제의 건국조 온조왕(溫祚王)이 남하하여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아 ‘십제(十濟)’를 건국하였고, 그 ‘십제’를 ‘백제(百濟)’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이해한다. 즉 북한산성(北漢山城) 지역을 백제의 첫 수도였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에 버금가는 천혜적 요새라 할 수가 있다. 북한산성은 지금의 파주시와 고양시 양주시 남양주시 한강이북 등등 곡창지대의 중심부였다. 온조가 건국한 초기 백제의 근거지로는 손색이 없었다. 이후 백제는 세력을 불려가며 한강 이남으로 천도하였고, 차츰 남으로 남으로 영토를 넓히고 수차 천도한다.

백제가 북한산성 일대에 첫 수도를 열었다는 것은 식민사관도 사대사관도 아니다. 이는 엄연한 우리 역사에 기록된 사실(史實)이다. 이를 부정하는 행위가 곧 황당사관이다.

나. 고구려의 남진과 남평양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 394~491)은 남진 정책을 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장수왕 15년(427)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平壤)으로 천도하였다. 이후 장수왕은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차지하고 이 지역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님평양은 고구려의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의 3대 도시라는 주장도 있다. 즉 남평양은 고구려 남진 정책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중요성은 남평양이라 불리운데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은 삼한(三韓) 통일의 의지가 아니었나 여겨진다.

그러나 고구려의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국내성보다는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고구려의 대륙 영토를 등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신라와 연합한 당(唐)이 남쪽으로부터 북상 침략하는 길을 열어 주어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고구려는 국내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평양 천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 ‘서울’이란 의미

고려는 건국 후에 수도를 개경(開京)에서 서경(西京, 平壤)으로 천도하려 하였다. 그것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그러나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풍수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1394년 수도를 개경(開京, 開城)에서 한성(漢城)으로 옮겼다. 한성부(漢城府)는 지금의 서울에서 한강 북부의 거의 전부를 관할하였다. 한성이란 북한산성과 그 남부지역을 포함한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즉 고구려의 북한산군에서 나온 명칭이다.

현재의 서울은 초기 백제의 수도였고, 고구려 중흥기의 남평양이었으며 현재의 수도 서울이다. 서울이란 한자로 ‘경(京)’이라 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한성의 사대문안 중심부를 경성(京城)이라 물렀다. 우리 민족이 지금의 경주(慶州)를 서라벌(徐羅伐)이라 하기도 하였고 동경(東京)이라 하였다.

서라벌이나 동경이란 서울이란 내용이 내포된 단어이다. 평양(平壤)이나 낙랑(樂浪)이란 지역명도 서울이란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다. ‘서울’이란 말(단어)은 순 우리말로서 그 말의 뜻이 한자로 변환되어 만들어 진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각 왕조의 수도로 여겨진다. 서울에서 울은 울타리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울’이란 ‘하늘(天)’의 의미이며 서는 시(市)를 의미하니 신시(神市)가 곧 서울이란 말을 한자로 만든 단어일 수도 있다.

라. 신시는 시장 경제의 시작이자 민족의 시작점

신시(神市)가 곧 단군시대의 시장(市場)으로서의 경제 중심부이자 정치 중심부인 것이다. 그러나 신시시대에는 화폐가 없었다. 화폐를 만들 주조술도 없었다. 따라서 화폐를 갖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정체성을 규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화폐가 없던 시절의 가치 척도는 제일이 곡물이었고, 제이가 포목(布木)이었다.

원시사회에서는 조개껍데기를 화폐로 쓰기도 하였다. 그것은 위조도 쉬었지만 일정한 가치를 지닌 화폐로 인정한 것은 고대인들의 약속이자 신뢰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화폐의 유통은 전국적이지를 못하였다. 즉 위조가 어려운 주화(鑄貨)가 주조되기 이전의 경제 단위는 자급자족할 만한 크기의 지역이라는 지역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지방 호족(豪族)이 국가 형성과 유지의 기본 세력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경제성을 근거로 한 부족국가가 형성되고, 이러한 부족국가가 연합한 부족연합국가로 발전되어 온 것이다. 부족연합국가가 민족이라는 신념적 정신적 문화적 혈통적인 단일 체제를 갖춘다. 우리는 이것을 민족이라 부른다.

고려초에 주물로 화폐를 주조하기 이전에 후기신라까지 우리 민족국가들이 주조한 화폐는 없었다. 발해가 화폐를 주조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아직 발해 화폐의 진품은 발견된 바 없다. 중국 한대(漢代)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지만, 그 한대의 화폐가 무역에서는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고구려나 백제 신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마. 맺음말

황당사관론자들에게 고려의 상감청자나 금속활자는 대륙 고려의 지방정부의 산물일 뿐이다. 이를 검토해 보면 대륙의 고려(?)가 한반도에 지방정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것은 대륙의 송원(宋元)이 고려를 지방정부로 가지고 있었다는 중국의 춘추사관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황당사관론자들은 조선 세종조에서 만든 『훈민정음』 문자가 단군시대 가림토 문자를 개량한 것이라는 허구를 주장한다. 그들은 조선왕조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민중이 창작한 모든 예술은 하찮은 것으로 치부한다. 우리 민족의 근세 문화 예술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든가 『평양지』는 파지(破紙)의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문화유산의 말살 의도는 곧 사대사관과 식민지사관에 궤를 같이하는 망동이다.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로 부정하는 것만이 식민사관이 아니다. 단군을 뻥튀기하여 그 실체를 황당하게 만드는 것은 더 심각한 우리 민족 역사를 우롱하는 반민족적인 반역이다.

바. 추기(追記)

필자는 지난 제30회 연재의 끝에서, 전시 준비로 두 주일의 연재를 건너뛴다고 ‘양해의 말씀’을 올렸다. 전시 준비가 지지부진하던 중에 힌남호 태풍도 오고, 14일자로 40년 지기도 타계하셨다. 부랴부랴 만사를 지쳐놓고 15일 상경하여 꼬박 1박 36시간 넘게 조문을 마치고 귀가하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나니 또한 문제는, 또 다른 태풍 난마돌의 영향권으로 사전에 예약한 이사짐 업체마저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달리 이사짐 업체를 수소문하여 19일 오후에야 가까스로 내 노형동 사무실의 진열장을 도남동 KBS의 전시장으로 옮겼고, 15일 개막 예정이던 전시도 사정상 일주일이나 뒤로 밀리고 있다.

그러나 본 연재를 9월 20일에 재개하겠다는 약속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하여 이번에는 짧은 호외(號外) 연재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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