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1층을 둘러본 뒤 지하로 내려갔다. 당시 쪽방이라고 불리던 방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구로공단에는 벌집촌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는데, 작은 방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었다. 각 방마다 패션방, 문화방, 공부방, 봉제방, 추억방, 생활방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안내자가 ‘여러분들 쥐눈을 본 적 있어요?’ 라는 질문을 던졌다. 봤다는 사람도 있고, 못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안내자는 자취를 하다가 어느날 쥐와 딱 마주쳤는데 쥐의 눈이 새파란 것이 너무 예쁘더란다. 신돌석씨는 쥐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이 안 나는데 방에 들어왔다가 도망치는 쥐를 밟아서 죽인 기억은 있다. 신돌석씨 세대는 쥐와 거의 같이 살았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는 쥐를 잡아서 꼬리를 가져오라는 숙제를 받은 적도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은 쥐를 잡아서 먹곤 했는데, 그것을 손주에게 먹이려고 하고 손주는 도망가고 하던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고양이가 하도 많아서 그 많던 쥐들은 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도 격세지감일까? 제일 먼저 본 방은 약간 규모가 컸는데 비키니 옷장과 기타 등이 있었다. 그 정도 규모면 대개 다섯 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어서 본 방들은 대체로 둘 내지 셋이 누우면 꽉 찰 정도였다. 방세를 줄이려고 주야 교대하는 사람들이 한 방을 같이 쓰기도 하다가 갑자기 시간이 바뀌거나 회사를 그만두면 칼잠을 자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가 하면 방세 때문에 남녀가 동거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 이런 일은 신돌석씨도 잘 아는 일이다. 21세기가 막 시작되면서 ‘옥탑방 고양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었다고 한다. 남녀의 혼전동거를 소재로 하고 있어서 당시에 언론에서도 충격적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그런 반응에 대해 정말 어이가 없었다. 혼전동거는 공단 주변에 가면 무지하게 많았던 일이다. 신돌석씨 자신도 양말 공장에 다니던 아가씨와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동거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순덕이와는 동거는 아니었지만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 노동자들이 윤리의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방세를 감당하기 힘든 경제적인 사정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그까짓 혼전동거 불가라는 윤리를 거추장스럽게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진취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자들의 삶과 문화는 이 사회의 이른바 주류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걸 보면서 신돌석씨는 경제구조인 하부구조가 정치, 문화, 의식 등의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이 정말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공장생활 등이 남녀칠세부동석을 확실히 허물어 버렸듯이, 공단 주변에서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혼전동거 불가라는 허위의식을 깨버린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한 것은 정말 이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이 그림자 같은 존재였구나 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언론 등에서 외면을 하지 못하는 것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었나? 얼마 전에 아파트 천장에서 똥덩어리가 든 비닐봉지가 발견되었다. 8-90년대였다면 건설노동자들의 무지함, 무교양 등을 주로 이야기하면서, 중산층인 아파트 주민들의 시각으로만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화장실이 제대로 없는 건설 현장의 문제점, 노동자들의 먹고 싸는 기본권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풍토, 그렇게 해도 괜찮은 법의 미비 등을 언론에서 주로 다루었다. 이것만 해도 진전이라면 진전일 수 있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ㄷ자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들을 한 바퀴 둘러 본 뒤 출구 앞에서 안내자는 이런 방에 살면서도 꿈을 가지고 살았던 당시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도 광주 출신으로 어린 시절에 광주항쟁 때의 잔인한 진압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신돌석씨보다는 몇 살 아래인 듯하였다. 광주항쟁은 일단 진압되었지만 그것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다. 신돌석씨는 광주항쟁 직후 공장에서 광주 출신 사람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 전부 투사가 된 것은 아니지만 안내자와 같은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내자는 초등학교 졸업만 했다고 한다. 광주에서 몇 년 공장을 다니다가 서울 올라와서 큰 공장에 취업한다는 것이 대우어패럴에 들어간 것이었다. 돈이 없어서 공장에 들어갔지만 공부를 더하고 싶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간 친구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오빠와 동생은 대학까지 다녔는데 자신은 딸이라고 부모님이 공장에 가게 했단다. 안내자의 부모님이 특별히 나쁜 분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러는 것이 일반적인 풍조였다. 당시에는 산업체 고등학교라는 것이 있었다.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런데 워낙 잔업, 철야가 많다 보니 다니던 애들도 그만두는 상황이었다. 그때 찾은 곳이 야학이었다. 처음에는 검정고시를 봐서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공부하다 보니 그까짓 졸업 자격은 있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그때부터 신세 조졌다고 하면서 웃었다. 그런데 자기는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 농담으로도 이런 말 안 한다고 한다. 자기가 야학에서 공부해서 세상 보는 눈이 생기지 않았으면 죽도록 일만 하고 살았을 거라고 한다. 그때 같은 공장에 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재단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일을 한다. 안내자 생각에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사람이 이제 70이 넘었는데 일을 해야 한다면 애시당초 노동자가 열심히 일한다고 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밖에 나와서 순이네 집 옆에 있는 ‘가리봉 상회’라는 가게에 들어갔다. 지금 장사하는 상회가 아니라 체험관의 연장으로 구로공단 시절의 구멍가게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선반에 간장, 라면, 소주 등을 진열해 놓았다. 여기도 옆에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익숙한 영화들의 포스터가 있었다. 신돌석씨 일행이 나오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체험관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무리를 지어서 체험관을 탐방하는 모양이다. 안내자는 가게 안을 한번 둘러보게 하고는 앞에서 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야학을 통해 각성된 안내자가 결국 가게 된 길은 깨어 있는 노동자들과 의기투합하여 노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조를 만드는 데 여러 힘이 합해졌다. 당시 그 작업장에는 70년대 민주노조에서 간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고, 학생 출신 활동가도 있었다. 산선에서 교육받은 사람,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도 있었다. 이들이 힘을 합해서 노조결성준비위를 만들었다. 정권이나 자본, 그리고 수구언론들이 왜곡하듯이 이럴 때 학생 출신들이 주도하고 조종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물론 그들은 이론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고, 당시에 학생운동을 통해서 조직 훈련을 했기 때문에 조직적인 점이 있지만, 경험 등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더 풍부했고, 외부와 연결하는 것은 종교단체 쪽 사람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안내자의 설명은 신돌석씨의 경험과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수긍이 갔다. 다만 신돌석씨 현장은 조철구라는 탁월한 학생 출신 활동가가 큰 역할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부 주도하거나 한 것은 아니고, 조종한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안내자는 노조를 만든 데는 정말 일하는 시간에 비해 쥐꼬리만큼 받는 임금도 문제이고,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도 문제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동력이 되었다고 하였다. 노조를 만들기 얼마 전에 여성 노동자 한 사람이 남한산성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노조가 문제를 삼을 텐데 당시에는 언론도 통제되고 노조도 없어서 그냥 쉬쉬하면서 지나가 버렸단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노동자들은 대개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때 공장 내에 의무실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회사 간부들이 여공들을 불러서 성추행하는 곳이었단다. 회사 간부들이 여공 중에서 맘에 드는 사람을 찍어서 의무실로 부르면 의사와 간호사는 자리를 피해주면서 협조했단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도 생기고, 그냥 체념해 버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한산성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사람도 그런 비인간적인 일을 당하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든가, 아니면 저항을 하다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였다. 노조결성을 하기 위해 소모임을 하던 사람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존엄성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굳게 결의를 하고, 준비위 결성을 위해 다른 노동자들도 접촉을 했는데, 뜻밖에도 그러한 소모임이 꽤 많이 회사 내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워낙 탄압이 심해서 보안을 유지하다 보니 서로 존재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가리봉 상회에서 나와서 한참 걸어갔는데 꽤 낯익은 거리로 왔다. 대형 의류판매업체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신돌석씨도 아내와 함께 몇 차례 와 본 적이 있던 곳이었다.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안내자 말로는 여기 바로 구로공단 공장들이 있었고, 구로동맹파업에 참가했던 공장들의 대부분이 이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대형업체 옆 대로변에서 멈추었다. 당시 업체에 대한 소개, 노동자들의 생활, 구로동맹파업을 소개한, 청동으로 만든 듯한 기록비가 있었다. 사람 키 절반 정도 되는 높이였다. 여기 이렇게나마 기록을 해두었다고 안내자는 설명하였다. 자기네 공장이 이 건너편에 있었고, 여기는 효성물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각선 쪽으로 빵공장이 있었는데 항상 배고팠던 노동자들이 빵공장에서 날아오는 빵 냄새에 환장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 콜라공장이 있었단다. 그 공장의 기사들이 당시 구로공단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괜히 멋있어 보였단다. 다시 길을 건너서 하나의 대형업체가 몇 개의 별관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 보니 커다란 조형물이 있었다. 신돌석씨도 이곳을 지나면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공장 굴뚝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였다. 그런 조형물이 3개가 설치되어 있고, 옥상에 1개가 있었다. 소비의 중심지로 된 이곳에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린 공장 굴뚝 조형물이 있다니 놀라웠다. 이곳에 옷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이나 할까? 그리고 그 건물 벽으로 가 보니 뭔가 작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공장들 이름이었다. 당시 구로공단에 입주해 있던 공장들이란다. 안내자가 자기는 해고된 뒤 블랙리스트 때문에 이 근처에는 얼씬도 못했고, 구로공단이 없어진 뒤에는 돈이 없어서 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안내를 하면서 제대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다시 걸어서 건물 뒤로 갔더니 토끼들을 기르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뭔가 커다란 조형물이 있는데, 그것은 와이셔츠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노동자의 손으로 생산되던 대표적인 물건을 조형물로 만든 것이란다. 잠시 멈추어서 건물 뒤편에서 건너편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들로 눈을 돌렸다. 안내자는 사람들한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 물었다. 이렇게 거대한 건물들 건너편에 저렇게 납작하고 허름한 건물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거대한 건물들은 모두 10여 층이 되는 것들이었는데 거기에는 2층짜리 그것도 곧 폐건물이 될 듯한 것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신돌석씨는 이곳을 차로 지나다니면서 본 것 같은데 별 문제의식을 못 느꼈었다. 안내자 말로는 그곳은 개발에 합의가 안 된 개별업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협동봉제라고 부른단다. 1층은 아직도 봉제공장들이 있고 2층은 저렴한 가격으로 옷을 파는 아울렛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안내자는 이 구로공단 지역이 박정희 정권이 이곳에 살던 농민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곳이라고 하였다. 땅 주인들은 정부에 호소도 하고, 탄원서도 내고, 재판도 했는데 얼마 전까지도 정부는 묵살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 때는 심지어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이들을 협박하고, 잡아가서 혼쭐을 내주기도 했단다. 그런데 얼마 전에 땅 주인들이 소송에서 이겼단다. 얼마나 원통한 세월이었을까? 그래도 뒤늦게나마 되찾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이것도 민주화가 낳은 소득이 아닐까? 그곳에서 조금 멀리 보니 고가도로가 보이는데 수출의 다리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차로 건너본 적이 있다. 지금은 디지털단지 내에 있는 고가도로인데 이전에는 구로공단에서 만든 제품들을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운반하기 위해 만든 고가도로이다. 디지털단지 5거리나 철산대교 사이에 있어서 교통체증이 매우 심한 곳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니 대형 아울렛 옆에 야외카페 같은 곳이 있었다. 거기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다. 안내자는 노조를 만드는 과정도 매우 극적이었다. 노조를 만들기로 하고 노조결성준비위를 띄웠는데, 안내자가 기숙사에서 거의 80% 정도의 노동자들에게서 노조 가입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결성 당일 공장 외부에서 결성식을 하는데 눈치를 챈 회사측에서 밖에 못 나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건너편 공장에 갈 일이 있다고 구실을 만들어 낸 뒤 빠져 나와서 당시 영등포에 있던 섬유노조연맹에 가서 노조결성식을 했단다. 1984년 6월의 일이었다. 신돌석씨도 노조 결성식을 신림동에 있는 금속연맹에 가서 007작전을 하듯이 했었다. 그때 일이 떠올랐다. 감시에도 불구하고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회사도 놀라고 노조결성준비위도 놀랐다. 그리고 바로 노조가입을 받기 시작했는데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며칠 사이에 가입을 하였다. 1공장과 3공장 거의 대부분이 가입한 셈이었다. 더욱 힘이 나게 한 것은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 등에서 잇따라 노조가 결성된 일이었다. 신생노조들은 임금협상을 비롯한 여러 활동을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70년대 민주노조들이 막강한 조직력과 뛰어난 지도부가 있었음에도 각개 격파당한 것을 거울삼아 공동투쟁, 공동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측이나 공안당국 역시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구사대를 조직해서 회의장에 난입을 하는 등 공격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5년 4월에 신생노조들이 시기를 맞춘 임금협상에서 노조는 거의 모든 요구조건을 관철시키는 승리를 맛보았다. 그러나 전두환군사독재정권이 이러한 노조를 그대로 둘리가 없었다. 두 달쯤 지난 6월에 느닷없이 위원장, 사무장, 조합원을 연행하였다. 안내자도 이때 연행되었는데 며칠 동안 면회 오는 조합원 하나 없어서 대단히 서운했다고 한다.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분개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동맹파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일상적인 투쟁과 활동을 공동으로 했던 노조들이 드디어 함께 파업을 하였고, 이 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있었던 동맹파업이었다.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킨 10. 26이 그해 8월에 있었던 YH노동조합의 신민당사 점거농성에서부터 불이 붙었다면, 전두환 정권을 후퇴시킨 6.10민주항쟁은 구로동맹파업부터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구로동맹파업의 현장에 와서 바로 그 주역에게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돌석씨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70년대 민주노조들처럼 각개격파당할 수는 없다는 결의로 동맹파업을 했던 노동자들은, 아마 그때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라는 심정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가사로 시작되는 ‘파업가’는 아쉽게도 신돌석씨가 알기에 그 당시에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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