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이란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러 활동에서, 시간적·공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발전의 모든 사실을 심리적인 인과관계 및 그때그때의 사회적 가치와 관련되는 인과관계에서 구명하고 또 서술하는 과학이다.”

베른하임(E. Bernheim, 1850-1942)이 말하는 역사학의 정의다. 역사 사실에 대한 심리적 인과관계 및 사회적 가치의 인과관계를 중요시하고 있다. 특히 심리적 인과관계가 역사가의 가치판단의 함수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역사가의 가치관과 직접 맞닿는 말이다. 역사학에서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와 사회적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문제 역시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 역사학이 사실의 문제를 넘어 가치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어떠한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리고 어떠한 순서와 전후 관련 속에서 이야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역사가인 것이다”라고 외친 카(E.H. Carr, 1892-1982)의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한 역사학이 살아있는 역사학이요 인간을 외면치 않는 역사학이다. 역사가를 과거로 향한 예언자라 칭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하다.

분명 과학적 역사학은 필요조건이지만 역사학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무한한 역사적 사실들을 일정한 기록을 통해 재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학을 신주처럼 떠받드는 역사학자들에게 월쉬(W.H. Walsh, 1913-1986)는 이렇게 충고했다.

“역사에 있어서 본질적 중요성에 관한 판단이 실재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부인하기 힘든 일로 보이며, 만약 이것이 옳다면 완전히 과학적인 역사학이라는 교리(敎理)는, 사실들로부터 이러한 판단을 읽어낼 수 없다는 명백한 이유 때문에 내 던져 버려야 한다.”

월쉬가 말하는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이란 바로 역사가의 가치다. 그는 역사가들이 신앙처럼 떠받드는 과학적인 역사학을 내 던져 버리라 했다. 본질적 중요성에 대한 판단을 외면한 역사학은 이미 기록 주체로서의 인간을 외면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민중의 빈곤으로부터 찾았던 미슐레(J. Michelet, 1798-1874)도 “현재에만 자신을 닫아두려는 사람은 현재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상기시켰다. 과거와 부단한 교감을 통해 현재를 올바로 보라는 의미일 듯하다. 까닭에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인간에 속한 역사가의 눈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금방 눈에 뜨이는 풍경이나 연장·기계 따위의 너머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차디차게 식은 듯한 문서나 그것을 확립해 놓은 자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제도의 너머에서, 역사학이 파악해 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기껏해야 생명력 없는 잡다한 지식을 다루는 엉터리 학자에 머물고 말 것이다. 훌륭한 역사가란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食人鬼)와 흡사하다. 인간의 살냄새를 맡게 되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사냥감이 있음을 그는 아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학에서는 자연과학과 달리 객관적 역사 그 자체보다 역사를 보는 쪽의 주관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의식의 문제가 역사연구와 해석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영국 역사가 루이스 네이미어(L.B. Namier, 1888-1960)의 다음 경구를 되새겨 보자.

"역사학의 최고 성취는 역사의식이며 그 최종 결론은 직관적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인간의 현실관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고도의 역사의식을 성취하는 일은 개인이나 집단(민족·국가)의 경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의식을 담지 않은 기록의 나열은 무가치한 연대기나 해적이[年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지적도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의식의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저항과 순응이라는 가치 충돌은 그 시기 역사학 형성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나아가 주인과 노예, 애국과 매국, 항일과 친일의 경계도 여기에서 나뉜다. 전자가 양심, 자율, 책임에 무게를 실었다면 후자는 비양심, 타율, 무책임으로 기울어졌다.

빼앗긴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역사관도 극명했다. 나를 잃어버린 데 대한 반성과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한 역사학, 그것이 우리의 민족주의역사학이다. 반면 남을 부정하면서 남을 지배하기 위한 역사학, 그것이 일제의 식민주의역사학이다. 전자가 반중화(反中華)와 항일의 현장에서 움튼 역사학이라면, 후자는 일제의 관학(官學)에 부용(附庸)·공생(共生)하며 성장한 역사학이었다.

그러므로 김교헌(金敎獻)·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그 항일의 에너지를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찾고자 노력하였다. 박은식이 ‘우리 역사의식에서 발생하는 동력이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 아래 내용이 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우리 대한은 아시아 동부의 옛 나라이다. 옛날 신인(神人)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연 때부터 드디어 대동(大東)을 소유하였다.…(중략)…우리의 독립정신은 일찍이 이로 말미암아 이지러지거나 파괴된 일은 없다.…(중략)…또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은 최근 30년 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우리의 연면한 역사에서 독립운동의 명분과 동력을 찾은 것이다. 그 중 김교헌은 대종교에 참여하면서 모든 기득권을 버린 인물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역사학의 정리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대종교의 2세 교주를 맡아 포교를 통한 항일투쟁과 더불어 수많은 학교를 개척했다. 그곳은 학교이자 독립운동의 근거이며 대종교의 교당 역할을 한 삼위일체의 공간이었다.

당시 대종교는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으며 대종교의 교주는 곧 항일집단의 우두머리였다. 특히 그의 『신단민사(神檀民史)』·『배달족역사(倍達族歷史)』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독립운동 단체 및 사관학교 등에서 역사교재로 쓰이며 항일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반면 일제식민지역사학의 관점은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에 실린 역사관을 망설(妄說)로 매도하며 식민지역사학의 완성을 위한 지침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 보인다.

“조선인은 여타의 식민지의 야만미개한 민족과 달라서, 독서와 문장에 있어 조금도 문명인에 뒤떨어질 바 없는 민족이다.…(중략)…혹은 한국통사(韓國痛史)라고 일컫는 한 재외조선인 저서 같은 것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않고 함부로 망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중략)…그러나 이를 절멸시킬 방책만을 강구한다는 것은 도로(徒勞)에 그치는 일이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전파를 장려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옛 역사를 강제로 금하는 대신 공명적확한 사서로써 대처하는 것이 보다 첩경이고 또한 효과가 더욱 클 것이다. 이 점을 조선반도사 편찬의 주된 이유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서적의 편찬이 없다면 조선인은 무심코 병합과 관련 없는 고사(古史), 또한 병합을 저주하는 서적만을 읽는 일에 그칠 것이다.…(중략)…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조선인동화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조선반도사편찬요지(朝鮮半島史編纂要旨)」)

일제의 역사관이 조선인의 동화를 통한 영구식민지의 완성에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은 학문의 과학성·합리성·객관성으로 포장된 실증주의(實證主義)를 내세워, 우리 민족주의역사학을 비학문적 관념사학으로 매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지침에 충실했던 학자군(學者群)이 이병도(李丙燾)와 같은 부류들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도 건재를 과시한 인물이다. 1945년 이후의 해방 공간, 1950년 6월 이후의 전쟁 기간, 1953년의 휴전 이후의 상황, 1960년의 4‧19혁명, 1961년의 5‧16군사쿠데타 등 격변의 시기마다 시의(時宜)에 영합하는 민첩한 행동으로써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한국사학계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상황이 되었을 당시는, 즉시 군사정권의 최고 기관지 역할을 하는 『최고회의보』에 쿠데타의 역사적 정당성을 밝히는 글도 올렸다. 대의명분과는 상관없었던 이병도의 이러한 처세는 서울대 교수(1945년)를 기점으로 하여, 학술원 종신회원(1954년),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장(1955년), 진단학회 이사장(1956년), 문교부장관(1960년), 학술원 회장(1960년), 국정자문위원(1980년) 등등의 감투를 쓰며 한국사학계에 군림하였다.

더욱이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그의 학문적 선택을 순수학문의 길로 호도하며 행세했다. 엎어진 세상이 오면, 그것을 바로 선 세상으로 환각하며 살아온 그로서는 당연한 변명일 듯하다. 이것은 식민지의 현실을 외면했던 생명파(인생파)나 청록파(자연파) 문인들이, 당시의 계급문학에 대항하며 순수문학을 견지하려 했다는 자기변명에도 훨씬 못 미치는 억설일 뿐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이병도 만큼 총독부 주변을 서성거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교헌은 부귀영화를 스스로 버리고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나라사랑의 길로 독립운동의 험로였다. 그 수단의 하나로 택한 것이 실증을 통한 민족주의역사역학이다. 그의 역사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 쓰인 동시에, 만주 독립군들의 정신적 지침서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항하는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곳도 독립운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는 그를 평가하지 않았다. 다시 우리가 주인이 된 해방의 공간에서 그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가 바로 김교헌이다.

반면 이병도는 중국 경극(京劇)에 등장하는 변검(變臉)의 달인인 양, 시류의 변화에 너무 잘 적응한 인물이다. 일제관학자들에게 감명 받아 역사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한 인연을 토대로 식민의 그늘에서도 늘 양지에 발을 딛고 살았다. 실증사학‧순수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선사편수회에 부용하며 식민주의역사학 확립에도 공헌하였다.

한편에서는 청구학회‧진단학회라는 허울을 쓰고 어쭙잖게도 민족사학의 맥으로 대접받았고, 광복 후에는 다시 변신하여 늘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일제 관념(식민)사학의 아류밖에 안 되는 그가, 한국 실증사학의 태두로도 자리 잡았다. 그에게는 나라사랑은커녕 명분도 염치도 없었다. 오직 변신을 통해 온존해 온 지식인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저 기득권에 빌붙으며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것이 실력이요 능력으로 대접 받았다. 과거의 친일은 적당한 변명으로 호도할 수 있었고, 일제에 부용했던 지식인들은 민족의 어정쩡한 우상으로도 변신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춘원 이광수다.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하며 “천황어명과 독법(讀法)을 같이하는 씨명(氏名)을 갖기 위해서”라고 자랑한 사이비 한국인이다. 일제강점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환각한 아류 일본인이다. 스스로 일등국민이 되고자 우리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고, 우리의 역사를 미개와 전근대로 타락시킨 무뢰한이다. 해방 이후 그가 늘어놓은 변명은 더 가관 아닌가. 자신이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순교자적 자세로 대신했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언어적 수사를 통해 스스로의 친일 행적을 교묘히 변명하고 호도하였다.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노예적 지식인의 형해화(形骸化) 된 몰골이 이광수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주인과 노예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것의 붕괴는 정체성의 와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의식은 과거의 잠꼬대로 구축되었다. 반면 일제에 부용하며 왜곡한 정치사학(政治史學)은 현재의 기득권 학문으로 행세 중이다. 주객이 전도된 우리 역사학계의 추한 자화상이다.

그러나 주인은 불행을 도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행복을 구걸하는 일도 없다. 그것이 진정 주인된 역사의식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풍찬노숙·삼순구식하면서도 항일의 길을 걸었다. 개인의 함포고복(含哺鼓腹)을 위해 대의와 명분을 묻어버린 일제의 주구(走狗)들과는 천양지차다.

회색지대에 서있는 우리의 앞길도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곡학아세(曲學阿世)로 세상을 속이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다. 꼭 사필귀정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더 이상 사이비 역사의식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의식을 내몰기는 힘들 듯하다. 역사의식의 망각은 곧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의 말처럼, 역사의식이 결여된 집단은 내일을 기약하기 힘들다.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는 루이스 네이미어의 명언을, 광복절을 보내면서 다시금 되새겨본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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