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에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서 열린 취임 뒤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는 것을 전제로 경제와 민생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담대한 구상’을 제안한 것입니다.

즉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과 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과 공항의 현대화 프로젝트, △농업 생산성 제고를 위한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과 의료 인프라의 현대화 지원, △국제 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 등 모두 6개 항입니다.

지난 5월 10일 취임식에서 밝힌 ‘담대한 계획’을 구체화한 것으로 다소 장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수차례 지적했듯이 이명박 정부에서 실패한 ‘비핵·개방·3000’을 떠올리게 하는 발상과 내용이지만,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지난 7월 22일 업무보고에서 “담대한 구상은 경제뿐 아니라 북한이 제기한 안보 우려와 요구사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다르다”고 말했기에 일단 존중하고 넘어 갑시다. 그렇더라도 최소 두 개의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착각은 ‘담대한 구상’이 여전히 북한의 ‘선(先) 비핵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반도 비핵화’가 아닌 ‘북한 비핵화’에다 그것도 ‘선 비핵화’라니요. 북한은 콧방귀를 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지어 북미 간의 (합의된) 입장에서 보더라도 ‘선 비핵화’란 개념은 없습니다. 북한의 ‘비핵화’ 각 단계에 대응해 미국이 보상하는 ‘동시 행동’만 있을 뿐입니다.

이와 관련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브리핑에서 “담대한 구상은 남북이 비핵화 논의 착수와 동시에 가동될 경제협력 프로그램을 포함한다”면서 “북한과 공동 경제발전 계획을 구체화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유도할 것이고, 북한의 호응을 고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도 커다란 착각이 있습니다. “남북이 비핵화 논의 착수”라고 했는데, 북한은 비핵화 문제를 ‘한반도 비핵화’로 전제해서 남한이 아닌 미국과 논의한다는 점입니다. 이 이유 또한 간단합니다. 핵문제는 북미관계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 4.27판문점선언에는 남북 간에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표 확인’으로, 9월평양공동선언에는 ‘한반도 비핵화 추진과정에서 협력’으로 나와 있지만, 6.12북미공동성명에는 ‘북미 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 노력’과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노력’을 교환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북한 비핵화’가 아닌 ‘한반도 비핵화’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 남과 북은 ‘확인’과 ‘협력’만 할 뿐이지, ‘논의’는 사실상 북미 간에 이뤄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착각은 어쨌든 ‘비핵화’의 대가가 이른바 ‘근본 문제’가 아닌 경제협력에만 치중돼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이 말하는 근본 문제는 한미 연합군사연습이나 한반도에 핵 전략자산 전개와 같은 안전보장 문제입니다. 오는 8월 22일 한미 간 ‘을지 프리덤 쉴드’ 군사연습이 예정돼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해 미국 측에 한미 연합군사연습 연기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 안에는 최소한 ‘을지 프리덤 쉴드’ 군사연습의 연기나 중지가 들어 있어야 했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없고, 상투적이고 지나간 레코드판의 레퍼토리만 즐비합니다. 따라서 북한이 비핵화 문제를 근본 문제나 안전보장 문제가 아닌 경제 문제와 협상할 지는 요샛말로 1도 없습니다.

지지율 하락으로 곤경에 처한 윤 대통령이 모처럼 대북 제안으로 ‘담대한 구상’을 내놨는데 사실은 착각에 기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착각이 매우 큽니다. 이 정도라면 ‘담대한 구상’이 아닌 ‘거대한 착각’이라 할 만합니다. 담대한 구상이 헛물켜고, 거대한 착각만 고집한다면 민족적·국민적 불행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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