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습니다.
자연의 봄은 시간이 되면 오지만 역사의 봄은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하지만 역사의 봄이 오는 데 함께 했던 사람들은 괜히 들뜨지도 않고, 쉽게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저는 꽃샘추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물론 며칠 만에 끝나는 꽃샘추위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여곡절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민족은, 민중은 의연한 발걸음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맨 앞에 서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 뒤꽁무니를 따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신돌석씨의 삶을 새로 발견하고, 함께 알리고, 서로 배우는 이야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세 사람이 노래방에 들어섰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래주점이었다. 보통 노래방보다 시설이 좋지만 가격이 꽤 비쌌다. 그리고 이런 곳은 으레 도우미를 불러야 했다. 그리고 그 도우미들이 2-30대의 늘씬한 여자들이었다. 말하자면 간이 룸싸롱이라고나 할까? 신돌석씨도 이런 곳에 처음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함께, 또 직장 사람들과도 몇 차례 왔다. 그런데 너무 비싸서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직장 사람들과 술 마시고 갈 때는 열 명 이상이 갈 적이 많았는데 도우미가 없어서 열 명에 도우미 두세 명인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는 도우미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 젊은 시절 매미집에서 작부 놓고 서로 자기 옆에 앉히겠다고 했던 것이 연상되었다. 신돌석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상황에서는 그냥 노래만 불렀다. 왜들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창석이 들어서면서 카운터에 있는 사람에게 세 사람이라고 말하고 도우미 셋 부르라고 했다. 이곳이 황창석에게는 꽤 익숙한 곳인 듯하였다. 황창석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오주석이 부르지 말라고 했다. 황창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는 사이 오주석과 신돌석씨는 안내해주는 방으로 들어갔다. 황창석이 조금 있다가 뒤따라 들어오면서 도우미도 없이 무슨 재미로 노래를 부르냐는 둥 오주석이가 이제 맛이 간 것 같다는 둥 투덜댔다. 그리고는 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황창석이 처음 부른 노래는 이수만이 부른 ‘모든 것 끝난 뒤’였다. 고2 때 셋이서 정말 많이 부른 노래였다. 황창석이 이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은 이수만보다 더 잘 부른다고들 했었다. 그해 5월 수학여행 갔을 때 해운대에 있는 호텔 앞마당에서 노래자랑대회가 열렸다. 그때 사회를 본 친구는 나중에 유명한 진행자가 되었다. 그 친구는 연예인으로 살아서 그런지 좀처럼 늙지를 않았다. 직장에서 점심 시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그 친구가 나와서 신돌석씨가 고교 동창이라고 하니까 젊은 노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럴 때마다 ‘작업복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곤 했었다. 그날 셋이서 이 노래를 부르자고 했는데 반장이 커트를 시켰다. 창석이 혼자 나가서 불러야 우리 반이 1등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대에 올라보려다가 잘린 경험이 있다. 황창석은 셋이 아니면 안 나가겠다고 했다가 둘이서 설득하니 나가서 불렀는데 정말 잘 불렀지만 팝송을 부르는 친구에게 밀려서 2등을 하였다. 1등을 한 친구는 나중에 가수가 되었다고 하던데 별로 유명해진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그 친구가 작곡 작사한 노래가 꽤 알려진 노래가 많다고 들었다.

첫 노래를 부르고 나자 종업원이 들어왔다. 양주 한 병과 이런 데서나 볼 수 있는 작은 병맥주 10병 그리고 과일 안주를 가져왔다. 황창석이 뒤에 들어오면서 시켰던 모양이었다. 신돌석씨와 오주석은 양주를 얼음에 타서 마셨고, 황창석은 그냥 스트레이트로 마신 뒤 우유를 한 모금씩 마셨다.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요 한 세기라고 할 만큼 남인수부터 아이유까지 되는 대로 불렀다. 황창석은 아이유 노래를 불렀다가 잘 안 되니까 이제는 자기도 은퇴해야 되겠다고 하였다. 오주석이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를 골라서 셋이 신나게 불렀다. ‘고래 사냥’도 불렀다. 그리고는 한숨 돌리려고 앉아서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었다는 이야기를 오주석이 꺼냈다. 신돌석씨도 어디선가 들었었다. 도대체 왜 금지곡인지 모르겠다. ‘고래 사냥’이야 반항적인 점이 있어서, 사실 그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금지곡일 수 있다 쳐도, ‘길가에 앉아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창석이가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하는 장면에서 길가에서 뽀뽀하는 것을 떠올린 모양이라고 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가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상상해서 금지곡을 만드는가? 참으로 야만의 시대에 산 것 같다. 어처구니없는 금지곡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그렇다.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고 하면서 금지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이야기를 젊은 사람들한테 하면 어이가 없다고들 한다. 그러면서 진짜냐고 묻는다. 사실 신돌석씨 세대도 젊은 시절에는 어른들이 일제 말기나 6.25 때 이야기를 하면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젊은 사람들도 7-80년대 일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가 더 힘들었는가, 누가 더 역사에 기여를 했는가를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각 세대는 그 시대의 아픔을 겪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신돌석씨의 세대는 이렇게 금지곡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으면서도 정치적 자유, 투쟁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지금처럼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될 수 있었다. 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퇴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덤프트럭을 사서 지입을 한 뒤 오주석은 돈을 벌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정신없이 일했다. 자연히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2002년에 화물연대 노조가 결성될 때 즈음해서 오주석이 신돌석씨를 찾아왔다. 그 동안 황창석과는 몇 차례 봤었다고 하였다. 오주석은 솔직하게 말해서 자기는 노조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힘은 들었지만 어느 정도 돈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차 할부금도 거의 갚아 나갈 때였다. 그런데 IMF사태가 터지고 날이 갈수록 운임이 깎이기 시작했다. 회사는 지입제로 전환할 때는 물량을 자기네가 책임지고 대줄 것이고, 운임도 결코 깎는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지입제가 시작된 뒤 저가입찰경쟁을 시켰다. 말하자면 개인차주끼리 경쟁을 시키는 것이었다. 이전에 사원이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경쟁을 시키고, 그들에게 더 싸게 할 수 있으면 물량을 그쪽으로 옮겼다. 게다가 하청, 재하청 구조를 만들어서 운임을 점점 더 싸게 만들었다. 항의를 하면 자기네도 화주들이 운임을 깎고 나와서 죽을 맛이라고 했다. 결국 개인차주들 입에서 오르내리던 노조 결성 이야기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오주석은 두려웠다고 했다. 이건 법적으로도 보장된 것이 아니고, 이러다가 안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날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상의할 친구가 황창석이었다. 대답은 뻔했다. 뭐하러 노조 같은 걸 하냐? 이제 그만 두고 자기와 사업하자고 했다. 그렇게 몇 차례 계속되는 동안 상황은 진전되었다. 오주석으로서는 당시에 중간 정도 되는 나이였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뛰어야 할 사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만두면 뭐하고 살 것인가? 황창석의 사업 제안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우정도 금이 갈 거라고 봤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노조 결성에 참여하기로. 그러고 나니 신돌석씨가 생각나서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상의할 게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기 심경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고민이 있을 때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지지할 사람을 찾는 법이다. 신돌석씨도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파업을 하느냐 마느냐 할 때도 고민을 하다가 파업을 할 생각이면 그것을 지지해 줄 사람을 찾아가고, 하지 않을 생각이면 파업에 반대할 사람을 찾아가곤 했었다. 오주석도 그랬다. 실컷 이야기를 들어준 뒤 신돌석씨는, 화물차주들이 노동조합 하면 왕창 후원한다고 황창석이 말했었는데 뭐라고 그러더냐고 슬쩍 물었다. 오주석은 그냥 듣고 웃기만 했다.

2002년에 화물연대 노조를 결성한 뒤 이듬해에 대규모 파업이 벌어졌다. 그때 노조에서 요구한 것이 바로 ‘표준요율제’였다. 지금의 ‘안전운임제’의 전신인 셈이다. 그때부터 15년이나 지난 2018년에 비로소 안전운임제가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202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그것도 일몰제로 시행된 것이었다. 안전운임제가 되면서 수입이 많이 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속과 과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로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거리당 운임이 20% 정도 높아지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 ‘대기료’라는 게 생겼다. 이전에는 공장에 도착해도 화주의 사정에 따라 상하차가 몇 시간씩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시간 동안 쉬지도 못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음 장소에 무리하게 운행해서 가야 했다. 안전운임제에는 정해진 시간 내에 작업이 안 이뤄지면 시간당 대기료를 주도록 법에 명시되었다. 화주들은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법으로 강제하니 할 수 없이 상하차 시스템을 개선해서 대기료가 안 나가도록 했다. 그것은 자연히 덤프트럭 때문에 일어나는 대형 사고가 줄어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다시 중단되고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올해 또 파업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오주석은 그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정신없이 싸우고 다녔다. 파업이 벌어지면 정부와 운송회사와 싸워야 했고, 평소에도 개인사업자로 살아가려고 하는 노동자들과 싸워야 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과도 싸웠을지 모른다. 그 기간 동안 구속도 두 번이나 당했고, 구류나 연행은 수도 없었다. 요즘은 요령껏 피하기도 하고, 경찰도 이전에 비해서는 유해졌는데,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정말 경찰한테 많이 맞았다고 한다. 그래도 해병대 출신이라고 맞서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한참 동생 같거나 조카 같은 놈들한테 많이 두들겨 맞았단다. 언젠가 한 번은 전경을 오히려 두들겨 패는 바람에 공무집행방해죄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조사받으면서 전경 팼다고 하니까 어떤 형사가 한 대 치려고 해서 막고 서로 멱살 잡고 싸우는데 고참 형사가 와서 말리더란다. 알고 보니 해병대 있을 때 자기 밑에 있던 후임이었단다. 이런 이야기들을 그 동안 만날 때마다 가끔씩 했는데 오늘도 노래 부르다 술 마시다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서 했다. 그리고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잠시 노래를 멈추고 앉았을 때 황창석이 오주석에게 한마디 했다. 왜 도우미를 부르지 못하게 하냐는 것이었다. 오주석이 이제 그런 것 끊었다고 하자, 왜 사냐고 거칠게 물었다. 오주석의 답은 이랬다. 자기 동료 중에 고속도로에서 승용차와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동료가 깜빡 존 것 같았다. 사실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 것이 화물차주들의 현실이다. 이를 악물고 모는데 워낙 과로하기 때문에 가사 상태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과속을 해야 한다. 또 조금이라도 많이 실어야 하니까 과적을 해야 한다. 부딪힌 승용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남녀였는데, 덤프트럭과 부딪혔으니 차는 완전히 찌그러지고 차에 탄 두 사람은 거의 죽기 직전이었고, 결국 병원에 옮기는 과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원으로 가족들이 왔는데 사고당한 두 사람이 유부남, 유부녀로 각각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단다. 나중에 듣기로는 여자는 30대 여자인데 회사를 다니면서 거래처 사람의 소개로 도우미를 하기 시작했단다. 그러다가 그만 바람이 난 것이다. 오주석은 말을 중단하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화물차 기사들에게 들으니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누구 잘못인가? 이전처럼 정조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할 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향락 문화가 이런 일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바람 난 여자들 탓할 게 아니라 우리 남자들이 이제 그런 짓 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런 문화도 사라질 거다. 나부터 그러려고 한다. 내가 노동조합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그거다.”

황창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몇 달씩 해외 나가 있는 자기는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느냐고 오주석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즐기고 사는 자기도 인생이 재미없을 때가 많은데 허구한 날 파업이나 하는 오주석은 얼마나 지겨운 인생이겠냐고 하였다. 어차피 세상은 그런 것 아니냐? 한번 사는 인생 뭐 그리 어렵게 따지고 사느냐는 것이다. 오늘 아주 풀코스로 모시려고 했는데 자기만 헛물켰다고 중얼댔다.

“창석아, 걱정마라. 누가 나더러 이렇게 살라고 해서 사는 것 아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내가 언젠 별 볼 일 있었냐? 하지만 이제 나는 제대로 사는 게 무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만 해도 나는 지난 세월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전운임제가 완전히 제도화될 때까지, 42만 화물운수노동자가 모두 그 적용을 받을 때까지 나는 이렇게 살 거다. 창석이 걱정은 진심으로 고맙지만 내가 왜 그러는지를 조금은 이해하려고 해다오. 네 기준으로만 한심하게 보지 말고.”

황창석도 신돌석씨도 양줏잔만 들고 한참을 심각한 표정으로 있었다. 그렇다. 신돌석씨도 경험한 것이지만 제대로 된 삶을 조금은 안다는 것, 인생에서 그것 이상 좋은 게 있을까? 노동자이기도 하고, 사장이기도 한 오주석. 그는 진짜 노동자가 되었다고 보아야 하리라. 하나의 인재를 만들기 위해 온 마을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데, 진짜 노동자 한 사람 나오기 위해 수십 년의 피와 땀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하면서 천천히 술을 마셨다.

 

 

* 편집자 착오로 연재물을 며칠 늦게 게재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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