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는 이형숙의 활동명입니다. / 필자 주

 

화이너(S. E. Finer)는 ‘현대정치와 군부’에서 군은 민간조직에 비해 세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조직구성면에서 군은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단일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로는 단일한 이데올로기로 무장되어 있는 상징적 조직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무기를 독점함으로서 어떤 국가 기구보다 가장 뛰어난 힘을 가진 조직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조직적 장점을 이용할 욕망 있는 정치군인들이 준비되어 있고, 기꺼이 이들이 권력을 취하고자 하는 경우 많은 나라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곤 했다. 중남미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의 잦은 군부쿠데타, 가까이 미얀마의 경우 또한 군부의 권력욕이 가져온 정치적 불행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정치권력을 탐하는 군부로 인해 두 번의 군부 쿠데타를 경험하였다. 12‧12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는 집권하기 이전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이 어떻게 권력을 무너뜨리는지를 지켜보았다. 바로 부마민주항쟁이 그것이다. 항쟁은 10.26의 대통령 시해로 이어졌고, 이를 틈타 전두환 자신이 집권할 수 있었다.

부마항쟁 당시 보안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직접 부산을 방문하여 군‧경‧검‧중정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단 구성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를 보안사가 지휘하도록 했다. 부마항쟁 참여자들 중 연행된 사람들은 부산 501부대 권정달 부대장이 단장을 맡았던 합동수사단의 수사를 받았다.

유신정권의 몰락을 경험한 신군부 정권은 대학생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러한 극단적 방법 중에 하나가 데모하는 학생들을 학교와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의식을 개조하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학생운동 등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군대로 강제징집되어 격리되어졌다. 이렇게 강제징집 된 병사들은 ‘특수학적 변동자’로 분류되어 일상적으로 보안사의 조사, 감시, 그리고 활용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보안사는 강제징집자들을 고문하여 각종 시국 관련 정보를 얻었고, 이를 안기부, 경찰 등과 공유하기도 했다. 경찰이나 안기부도 자신들이 필요한 민주화운동 관련 정보를 보안사를 통해 얻었다. 더 나아가서 보안사 등 5공화국 세력은 이들을 프락치로 활용하기도 했다.

강제징집은 5공화국 출범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강제징집 된 대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어 일정 기간 수사를 받은 후 경찰서에서 휴학신청서를 쓰고, 입영통지를 받고 곧바로 다음날 함께 훈련소에 입소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폭력적인 행위들은 보안사, 학교당국, 경찰, 병무청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불법, 강제징집 되어 끌려간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는 아직도 보안사가 붙여놓은 작전 명칭으로 ‘녹화사업’이라 부른다.

이렇게 강제징집 된 녹화사업 대상자가 되어 군 입대를 한 이들 중에는 고려대 4학년생이었던 김두황씨와 양창욱씨도 있었다.

의문사 당한 김두황의 서사

김두황씨는 1980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전두환 정권에서도 경제학과 학회, 현대철학연구회, 제일교회 등에서 세미나팀으로 활동하며 고려대 학내는 물론 외부 전두환 정권 퇴진을 위한 반독재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후배의 참여 기반을 넓히기 위한 활동을 중추적으로 담당하며 헌신하였다.

4학년이던 1983년 3월 8일 시위 모의 혐의로 성북경찰서에 연행, 구금되어 조사를 받던 중인 3월 18일 강제징집 되었다. 22사단 2대대로 징집된 김두황씨는 군복무 중 특수학적변동자로 분류되어 보안부대로부터 사찰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83년 6월 18일 총기에 의해 의문사 당하였다.

당시 헌병대는 M16 총기에 의해 자살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김두황은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특히 헌병대 등 군에서 발표한 사망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총성이 발생한 시간과 사망 장소 등에서 군의 발표와 다른 사실들이 점차 확인되고 있다.

김두황씨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양창욱씨. [사진제공-양창욱]
김두황씨 영정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양창욱씨. [사진제공-양창욱]

김두황씨는 M16 총기에 의한 단발 총성으로 인해 사망하였으나, 사망 이후 유기되어 다시 연발 총기에 의해 사망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김두황씨의 사망을 군이 조작·은폐 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총성실험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헌병대가 사실을 은폐, 조작 했다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타살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실을 더 규명하기 위해 ‘불능’으로 결정함으로서 진실규명의 과제를 남겼다. 김두황씨의 죽음에는 누가 언제 어디서 총을 쐈는가를 규명해야 하는 과제가 있고, 특수학적 변동자로서 보안사 등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 등을 확인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 김두황씨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게 되었다.

스물 세 살의 친구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양창욱의 삶

1980년 고려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양창욱씨는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입학하고 1학년신입생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선배들을 통해 듣게 되었다. 학문으로서의 ‘사회’가 아닌 현실 사회의 문제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과 다른 역사를 점차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친구 김두황씨는 매사가 긍정적인 성격이라 서로 잘 맞았다. 친구 한선모씨와 함께 셋은 의기투합하여 고려대 학생운동에 매진하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세 친구는 각 과에 학회를 만들어 후배들을 의식화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3학년 때는 5공화국이 부활시킨 학도호국단을 사회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맡아 운영하기 위한 일도 벌였다. 각 과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학도호국단장에 이들이 밀었던 진창원씨가 당선되도록 했다. 하지만, 성북경찰서는 투표에 참가했던 학생 중에 학점이 미달된 학생이 참여했다며 진창원씨의 학도호국단장 당선이 무효화 되도록 조치했다. 이들의 학도호국단 장악은 ‘3일 천하’로 끝나게 되었다.

이들은 1983년 3월 7일 고려대 교내 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시위에 사용될 유인물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시위 모의자가 되어 3월 8일 성북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경찰의 수사는 불법 구금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성북경찰서와 미시건호텔 등에서 번갈아 가며 열흘 넘게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문도 끝없이 이어졌다.

수사가 끝나자 경찰은 이들에게 강제로 학교에 휴학계를 쓰도록 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입영 통지를 받았다. 휴학계를 낸 다음날 성북경찰서에서 양창욱씨는 친구 김두황씨, 한선모씨와 함께 훈련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친구 김두황은 22사단 2대대에, 양창욱씨는 22사단 3대대에 배치되었다.

특수학적 변동자로 분류된 양창욱씨의 군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입대하고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집으로 가던 길에 양창욱씨는 처음으로 경찰, 보안사 등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부대에 복귀하고 나서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친구 김두황의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이 크겠지만 힘내라는 편지였다.

그리고 편지를 받은 일주일 후 1983년 6월 18일 친구 김두황의 죽음을 듣게 되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특수학적 변동자로 분류된 자신에 대한 보안사의 조사가 9월부터 시작되었다. 슬픔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보안사는 강제징집 된 특수학적 변동자들의 등급을 분류하고 조사를 위해 서울과 경기도에 조사 분실들을 가지고 있었다. 양창욱씨는 과천의 한 아파트에 위치한 ‘과천분실’을 거쳐 충무로에 있는 진양빌딩의 ‘진양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진양분실은 프락치 공작으로 더 알려져 있는 장소이다. 진양분실에서 가해진 고문 후에 보안사는 양창욱씨에게 휴가를 보내줄 테니 고려대에 가서 후배들을 만나 정보를 사찰해 올 것을 강요했다. 너무도 고통스런 상황이었다.

막상 강요된 휴가를 나왔으나 어찌할 수 없었던 양창욱씨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밤새 울었다. 다음날 그는 고려대에 가서 후배들에게 프락치 강요 사실을 털어놨다. 그러자 후배들은 얼마 전 성북서 조사과정에서 이야기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그에게 전해주었다. 후배들은 어차피 드러난 사실들이니 이 정도로만 보안사에 이야기 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국가기구가 집권을 위해 국민을 볼모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국가 폭력을 행사하는 지경이었다. 다행히 1984년을 넘어서며 녹화사업 공작은 느슨해졌다.

제대한 후 양창욱씨는 친구 김두황이 없는 학교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길로 용접 기술을 배워 인천의 공장에 들어갔다.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1986년 인천 5.3시위 때는 부평역 옥상 시위를 벌여 3시간 동안 점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구속되어 9개월간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하고 나서는 인천지역에서 노동자 정당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학교 선배였던 노회찬 전 의원과 함께였다.

노동운동, 진보정당 활동에 뛰어들다 보니 집안 경제는 자연스럽게 부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도 커가고 혼자서 집안 경제를 책임지기 어려웠던 부인이 책임 맡는 것에 대해 중단을 선언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활동을 접고 취업을 하게 되었다. 양창욱씨가 얻은 직장은 생협중앙회 기획관리부장이었다.

생협중앙회 활동은 그에게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사회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한국의 협동조합 운동은 외국의 사례 등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대안 사회와 경제에 대한 모색을 하고 각종 정책을 통해 실현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협 활동 이후에는 협동조합 형태로 학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창욱씨는 친구 김두황씨의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 사이 김두황씨의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했던 친구들도 하나 둘 병으로 곁을 떠났다.

이 진상규명 과정에서 친구 김두황씨를 비롯한 강제징집자들 중 보안사의 조사 과정에서 의문사한 더 많은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선도공작’ 등에 의해 군대에 끌려갔던 많은 피해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들 군에 의한 폭력 피해자들은 사십 년이 지나 60대가 되서야 국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진상규명 활동 또한 그의 주요한 활동이다.

김두황 씨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양창욱씨. [사진제공-양창욱]
김두황 씨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양창욱씨. [사진제공-양창욱]

징집제도 자체도 강제적인데 이를 정권유지에 동원했던 5공화국 최고 책임자는 사과 한마디 없이 얼마 전 사망했다. 강제징집은 비단 5공화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천 명의 학생을 징집하여 군대에 묶어두고 고문을 통해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 정보를 캐고, 사랑하는 선‧후배들을 뒷조사하도록 하는 프락치 강요까지 비극적 한국 현대사의 단면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참으로 긴 어둠의 시간을 지나 우리는 현재, 지금에 와 있다.

양창욱씨에게 어떻게 숱한 시간을 견뎌왔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내가 술만 먹으면 울어요. 그런 주사가 생겼어요.”

지금도 친구 김두황씨의 죽음과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주도했던 세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는 노력하고 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침묵의 입’을 열리도록 그는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 징집제도에 의해 발생한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 이형숙 약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추모연대 집행위원장/

성공회대학교 사회학 박사(한국군(軍) 관련 논문)/

성공회대학교 강사/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

한‧일노동자연대기록모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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